카라얀도, 루키우스도 디저트에 관심이 없는 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손은 정직했다.
루미나는 디저트에 손을 대지 않아도 금방 테이블 위가 깨끗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왜 안 먹고 있지?”
들켰다.
루키우스는 눈치가 빨랐다.
카라얀 또한 이미 알고 있었는지 진지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보고 있었다.
루미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럴 리가요. 계속 먹고 있었어요.”
“나보다 커진다더니 그렇게 먹으면 내 절반도 못 큰다.”
이미 아버님의 절반 이상은 컸는데요!
루미나는 완전 범죄를 위해 머랭 케이크 한 조각을 개인 접시에 옮겼다.
콕. 하압.
오물오물.
잘 먹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자그마한 입술을 최대로 벌려서 한 입에 쏙 넣었다.
그 과정에서 루미나의 입가에 생크림이 묻게 됐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생크림이 한쪽 입꼬리를 장식한 모습이 퍽 귀여웠다.
심지어 케이크를 잔뜩 넣어 양쪽 볼도 빵빵해져 있었다.
열심히 씹느라 빵빵한 볼이 꼼실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라얀이 생크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루미나에게 뻗어진 손은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부자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시에 루미나의 양옆으로 손이 다가왔다.
묻힌 생크림은 하나.
그걸 제거하려는 손은 둘.
두 남자의 시선이 사납게 부닥치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제 쪽이 더 가깝습니다.”
“내 팔이 더 길다.”
가운데에 낀 루미나는 도록도록 눈을 굴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심지어 그들의 나이를 고려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다툼이었다.
“제가 먼저 손을 뻗었습니다.”
“아니. 내가 0.1초 빨랐다.”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건 좋은데,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이러니 불편해졌다.
입 안에 케이크가 잔뜩 있는 터라 이 분쟁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내가 더 빨랐네, 내가 길쭉하네 하는 의미 없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루미나가 꼭꼭 씹던 케이크를 꿀꺽 삼켰다.
그러다가 문득 입가에 생크림이 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쓰윽-.
무신경하게 엄지로 생크림을 닦아내자 한창 싸우던 두 사람이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싸운 적 없는 것처럼 서로를 외면하더니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싸운 건데?’
어쩐지 아까보다 힘없이 디저트에 손을 대는 하트 부자를 바라보던 루미나가 입가심으로 남은 차를 마셨다.
그 후, 루미나의 예상대로 디저트가 대부분 자취를 감추며 식사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때를 기다리던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껏 셋이 전부 모인 적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루미나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감동에 젖은 것처럼.
“오늘이 돼서야 저한테 새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서 정말 기뻤어요.”
시선을 내리깐 루미나는 이미 바닥을 보인 찻잔만 쳐다봤다.
촉촉한 목소리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완벽한 시선 처리.
생활 연기의 달인인 루미나는 아련한 감정 연기도 잘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앞으로 오늘처럼 다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큰 바람이겠죠?”
“아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뭐, 한 끼 정도는…….”
루키우스와 카라얀이 차례대로 말했다.
어색하고 쑥스러워하는 듯했지만, 루미나가 간절히 바랐기 때문인지 큰 고민 없이 냉큼 대답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면 앞으로 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 볼 일도 없어지겠지.’
속내를 숨긴 루미나가 진심으로 기쁜 듯이 화사하게 웃었다.
***
그날 이후로 루키우스가 예고했듯이 물밀 듯이 교사들이 찾아왔다.
덕분에 카라얀의 일과가 바쁘게 돌아갔다.
툴툴거리면서도 수업 도중 주변을 뒤엎었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잘 따라가고 있는 듯했다.
황자 앞에서도 ‘멍멍’거리는 불같은 성격인 걸 고려하면 제법 인내심 있게 구는 것이다.
그리고 루미나에게도 개인 교사가 붙었다.
그 탓에 루미나의 일상도 바쁘게 돌아갈 것 같았지만, 카라얀에 비하면 훨씬 널널했다.
게다가 취미 생활이라고 느껴질 만큼 배움이 어렵지 않아 만족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조금 걸리는 점이 있긴 하지만. 뭐, 아직까지는 괜찮으니까.’
바쁜 하트 부자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식당으로 가 만찬을 가졌다.
그렇다고 부자 사이가 비약적으로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고 루미나는 믿었다.
“햇살이 뜨겁네요.”
하녀가 아직 닫혀 있는 나머지 창문을 열며 이어 말했다.
“이번에 작은 마님의 여름용 드레스를 추가로 잔뜩 구매하길 잘한 것 같아요. 당장 입혀보고 싶은 날씨예요.”
사심이 잔뜩 담긴 발언이었다.
요즘 하녀들이 귀여운 작은 마님 꾸미기에 한창 열을 올리는 걸 모르는 사람은 저택 내에서 없었다.
날이 점점 더 따뜻해져서 낮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작은 마님, 편지가 왔어요.”
“……설마 황녀님이야?”
루미나는 이 따뜻한 날씨에 벽난로 불을 지필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근래 편지를 보낸 사람이라면 아라벨 황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뇨. 네쥬로 아카데미에서만 발행하는 우표가 붙어 있네요.”
아카데미.
루미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발행인에는 엔디미온 랑슈스라고 적혀 있어요.”
“랑슈스의 도련님께서 작은 마님께 안부 편지를 보냈나 봐요!”
다른 하녀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이전에 루미나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남동생이 얼마나 똘똘한지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 똘똘한 남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몇 번이나 대신 부치기도 했고.
랑슈스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는 루미나가 유일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가족 구성원이었다.
“어서 뜯어보도록 해요!”
루미나는 편지를 건네받았다.
단번에 하녀들에게 둘러싸이게 됐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루미나는 봉인된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작은 마님께서 여러 번 편지를 보냈는데 답신이 온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아카데미 생활이 바빠도 그렇지. 너무해요.”
한 하녀가 투덜거렸다.
그간 답장 한 장 보내지 않은 매정한 동생의 행보에 속이 상한 게 분명했다.
옆에 있던 다른 하녀가 그런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여기 있는 하녀들 모두가 어여쁜 작은 마님의 편지를 무시하는 남동생의 존재를 곱게 보지 못했다.
만약 남동생을 언급하는 루미나의 목소리에서 뿌듯함이 묻어나오지 않았다면 ‘놈팡이’라고 불렀을 거다.
그렇지만 속상한 것과 별개로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 봉투만 응시하던 루미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으로 갈래.”
도서관은 루미나가 일부러 하녀들을 데려가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따라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들을 따돌려는 걸 눈치챈 하녀들이 더는 방정을 떨지 않았다.
‘엔디미온한테 너무하다고 말해서 혼자 있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해를 했나 보네.’
도서관에서 답장까지 쓸 작정으로 작은 가방에 펜과 종이를 야무지게 챙기고 나온 루미나가 뺨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엔디미온이 무슨 내용을 썼는지 몰라서 혼자 확인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오해를 받아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느릿하게 걸어 도서관으로 향했다.
묵직한 문을 밀어내자 코끝을 스치는 종이 냄새와 도서관 특유의 고요함이 루미나를 감쌌다.
마침 수업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루미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항상 정리돼 있던 도서관의 무질서가 눈에 띄었다.
책상 주변에 책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것이다.
책을 벽처럼 쌓아놓은 게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 중심에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엎드려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이는 피어싱.
“카라얀 님?”
깨어 있었는지 아니면 목소리를 듣고 깼는지 카라얀이 움찔거렸다.
“뭐 하세요?”
“명상.”
루미나가 알기로 원래 이 시간에 카라얀은 한창 수업을 듣고 있어야 했다.
그간 수업 도중 주변을 뒤엎는 게 아니라 땡땡이를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업의 일부야.”
“네, 네.”
카라얀의 뒤늦은 변명에 루미나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넌 뭐 하러 왔어?”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내려고요.”
“편지?”
카라얀이 관심을 보였다.
“누구한테 온 거야?”
“엔디미온이요.”
“엔디미온이면 네 동생?”
“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카라얀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엔디미온.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때 오해를 해서 잠시나마 철천지원수가 된 놈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리고 루미나가 잠꼬대로 이름을 부를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
‘내 이름은 한 번도 부른 적 없으면서.’
카라얀은 엔디미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속 좁고 못생겼으며 멍청할 것 같다는 평가를 철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