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왜 이제 와서 편지를 보낸대?”
카라얀은 엔디미온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도, 루미나가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는 동안 답장 한 번 보낸 적도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엔디미온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건 물론, 그를 언급하는 말투마저 탐탁지 않았다.
“바빴겠죠. 게다가 기숙사제잖아요.”
엔디미온이 아카데미로 간 건 루미나, 자신의 영향이 지대했던 터라 절로 두둔하게 됐다.
하지만 카라얀이 보기에는 괜히 감싸는 것처럼 보였다.
순진한 건가. 딱 봐도 남동생이라는 놈이 하나뿐인 누이를 귀찮게 여기는 것 같은데 혼자만 모르는 듯했다.
속에 있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카라얀은 제게서 멀어지는 루미나를 직시했다.
“답장 보내겠다며. 어디 가?”
“으음. 먼저 책부터 골라볼까 해서요.”
책을 구실로 도망치려는 듯했다.
그리고 카라얀의 예측은 정확했다.
루미나는 도망치는 거였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이 카라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 주변을 견고하게 지키던 책의 탑을 무너뜨려서 대충 한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우르르, 와르르.
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리도 아닌 터라 루미나의 신경이 절로 분산됐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해. 내가 갖다 줄 테니까.”
주변을 대충 치운 카라얀이 제 옆자리에 난 의자를 뒤로 밀며 말했다.
“그동안 넌 여기 앉아 있어. 그 연약한 다리로 또 쫄랑쫄랑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카라얀은 퍽 귀족스럽고 신사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루미나는 그가 예절 수업을 반절은 듣고, 반절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명상 중 아니었어요?”
“오래전에 끝났어.”
카라얀이 루미나가 어디 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부려먹으라는 의미야.”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 그는 하녀들과 달리 집요했다.
도서관 밖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필시 따라올 것이다.
루미나는 어째서 카라얀까지 엔디미온이 보낸 편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루미나는 결국 그가 빼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동화책이요.”
“……동화책?”
“그림이 잔뜩 있는 동화책을 찾고 있었어요!”
하트 공작저에 있는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장서가 구비돼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이용 도서는 없었다.
‘고명한 하트 공작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을 테고, 그림책도 봤을 텐데 도서관에선 한 권도 보지 못했어. 격식 있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지.’
카라얀 또한 이곳에서 동화책 같은 건 아예 취급하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림 많은 동화책은…….”
“너무 보고 싶은데 가져올 수 있으시죠?”
반짝반짝.
루미나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카라얀을 쳐다봤다.
윽.
이러면 동화책이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약해진 카라얀은 없는 책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 꼼짝 말고 앉아 있어.”
“네!”
카라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방긋방긋 미소 짓던 루미나는 입꼬리를 내리고, 카라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빠르게 편지를 펼쳐 봤다.
[누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답신이 늦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살짝 삐죽삐죽한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글씨체를 흉내 내듯 미숙함이 느껴지는 필체와 늙은이가 쓸 법한 말투.
엔디미온이 맞았다.
[그간 보내주신 서찰은 모두 읽었습니다.
보내주신 글로만 봤을 때는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만약 글로 쓰지 못하는 부조리한 일이 있다면 편지 한구석에 당근을 그려주시면 됩니다.
혹, 그 또한 하지 못한다면 작은 먼지 같은 점이라도 찍으십시오.
바로 혼인법을 연구하여 해결책을 내겠습니다.]
‘……당근?’
한때 애쉬가 카라얀을 박하게 평가했기 때문인지 엔디미온은 아직도 루미나의 결혼 생활에 대해 근심과 걱정이 많아 보였다.
이런 아이가 그간 보낸 편지를 일부러 무시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기에 저에 대한 걱정도 할 것 같아 덧붙이자면 바로 답신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카데미 내 동기간의 다툼 친목을 다지느라 근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텃세가 심했나 보네.’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속사정을 바로 눈치챘다.
엔디미온의 나이나 갑작스러운 편입이라는 뒷사정을 떠올리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아카데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일상에 대한 보고가 편지지를 빼곡히 채웠다.
‘하녀 언니들 앞에서 편지를 열어봐도 됐겠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돌부리처럼 걸리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졸업하기 전까지 방학 기간에도 아카데미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수석 그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 학업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1등 이상이면 아카데미 내 서열 0위, 이런 거야……?’
엔디미온의 의중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누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등의 이유가 아닙니다.
오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졸업할 때까지 꾸준하게 훌륭한 성취를 보이면 황족이 직접 찾아와 치하한다고 합니다.
저는 황족을 알현하여 황실에 있다는 금지된 서고의 입장을 허락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는 편입을 해서 1학기 점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학우들보다 노력해야 하여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금지된 서고라면 온갖 금서를 보관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흑마법과 관련된 도서였다.
‘엔디미온이 흑마법에 관심을 가지는 건가?’
의문을 가진 루미나가 답장을 썼다.
쓱쓱 적은 편지를 예쁘게 접어 봉투에 넣었을 때였다.
“여기.”
쿵-.
루미나의 옆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루미나는 거대한 책 더미를 볼 수 있었다.
“전부 다 그림 동화책이야.”
책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서관에 없는 것들인데 이렇게 빨리 다녀온다고?
“정말 금방 갔다 왔네요.”
“마침 근처에 있었어.”
카라얀은 저택을 나가 서점으로 달려가서 그곳에 있는 그림 동화책을 싹 쓸어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입 밖으로 떠벌리면 생색내는 것 같지 않은가.
그 먼 거리를 뛰었는데도 카라얀은 숨이 벅찬 티도 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루미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를 힐끔거렸다.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루미나에게 온 편지였다.
강탈할 수도, 대놓고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에둘러 표현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네! 엔디미온이 잘 지낸대요! 정말 다행이죠?”
“……동생이랑 많이 친한가 봐.”
머뭇거리던 카라얀이 겨우 한마디 물었다.
가족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예민해지는 루미나가 또 매몰차게 내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서점과 저택을 오갈 때도 평온했던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듯한 기분이었다.
흐음.
카라얀의 얘기를 듣고 잠깐 딴생각을 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루미나가 선뜻 입을 열었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됐어요. 엔디미온은 제 친동생이 아니라 이복동생이거든요.”
이제껏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였다.
카라얀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처음 만났다 보니 가족보다는 남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네?”
“친해진 계기가 있을 거 아니야.”
카라얀은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루미나 또한 그가 대화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청난 비밀도 아닌데.’
사실 랑슈스 가문을 아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면 바로 들을 수 있는 얘기였다.
아버지인 루키우스처럼 뒤에서 캘 수도 있는데 당사자한테 정직하게 묻는 모습이 마냥 나빠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이제 남은 가족은 둘밖에 없으니까 친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게 다예요.”
“엔디미온이라는 애는 천재야?”
“네?”
“네 살에 아카데미 입학을 한 거잖아.”
끔뻑끔뻑.
카라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루미나는 이내 꺄르르 웃고 말았다.
그가 어떤 오해를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아뇨. 저랑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요. 아버지가 재혼하기 전까지 엔디미온은 혼외 자식이었거든요.”
그제야 카라얀은 루미나가 만만치 않은 콩가루 집안에서 자랐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간의 의문이 해소되면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
카라얀은 루미나를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평소에 해 본 적 없는 행동이었기에 문장이 곧바로 완성되지 않았다.
루미나가 재빠르게 말을 낚아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죽은 사람들이잖아요. 산 사람은 산 사람끼리 지내야죠.”
정말 아무렇지 않기 때문에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루미나가 아픔을 꾹꾹 누르고 있다고 해석했다.
위로 한 마디 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돼 버린 그는, 자신이 섬세하고 다정한 성미가 아닌 걸 저주했다.
“만나보면 좋은 애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카라얀은 그 외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루미나.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루미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라얀 님.”
카라얀은 문득 가슴께가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책 가져다주셔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루미나가 몸을 일으켜 카라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