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69)화 (69/152)

“……!”

그 순간 카라얀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버렸다.

뺨에 닿는 몰캉하고 부드러우며 따스한 촉감.

거의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지만 마치 시간이 멈췄던 것처럼 선명했다.

거기다 입술을 떼고 저를 보며 방긋 웃는 루미나의 어여쁜 얼굴까지.

카라얀은 본인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루미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홱-.

“?”

루미나가 매몰차게 몸을 돌리더니 후다닥 도망쳤다.

흩어지는 밀빛 머리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기습 뽀뽀를 당한 카라얀은 넋을 놓은 채 멀어지는 루미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발목에 쇠공이 달린 사람처럼 우뚝 섰다. 루미나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굳어버린 그가 루미나가 있던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안 루미나는 유유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주제가 주제인 만큼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던 참이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한 루미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엔디미온에게 답장을 보내고, 겸사겸사 선물까지 부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

그 이후로 며칠 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루미나는 클라인 부인이 외치는 박자에 맞추어 춤을 췄다.

시선 처리,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춤 선, 하물며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날리는 드레스 자락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좋아요, 완벽해요!”

예법 교사로 초빙된 노라 클라인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박수를 쳤다.

“볼 때마다 실력이 부쩍 느니 더는 제가 가르칠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이게 다 부인의 가르침이 훌륭한 덕이죠. 저를 너무 좋게만 봐 주시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트 공작님께서는 총명한 며느리를 두어서 행복하시겠어요.”

부인과 루미나 사이에 덕담이 오갔다.

“그러면 잠깐 쉬도록 하죠.”

“네, 부인.”

휴식 시간 동안 클라인 부인은 항상 챙겨 먹는 물약을 마셨다.

붉은 액체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동안 루미나가 그녀를 쳐다봤다.

클라인 부인은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가 되었다.

결혼 생활을 일 년도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삼십 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자식이 없지. 그 이유로 구설에 많이 올랐고.’

내연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문이 남편의 사망 직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클라인 부인은 지금까지 재혼하지도 않고, 남자와 가까이 지내지 않으며 정숙하게 지냈다.

추문은 추문으로만 남았다.

빈틈없는 그녀의 행보에도 불구하고 혹 더러운 일을 숨기는 건 아닌지 지켜보는 하이에나들이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그렇지만 십 년 넘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사교계에서 자기 관리를 잘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러니 내 예법 교사로 초빙되었을 테고.’

수업 또한 강압적이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제게 친절하게 구는 이자가 미묘하게 거슬렸다.

“역시 클로이 님의 따님이에요. 날이 갈수록 닮아가는 것 같네요.”

바로 이거였다.

클라인 부인은 루미나의 친모를 자주 언급했다.

그때마다 루미나는 듣지 못한 것처럼 여러 번 흘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라벨 황녀님의 티파티에 초대된 적이 있다고 하셨죠?”

“네.”

“혹시 황궁에서 엘리엇 황자님을 만나셨나요?”

“아뇨. 저는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걸요.”

엘리엇이 먼저 그날의 만남을 아라벨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한 만큼 루미나 또한 시치미를 뗐다.

클라인 부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듣기로 아라벨 황녀님께서 루미나 님을 전속 시녀로 들이고 싶어 할 만큼 아끼신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황녀님과 가까이 지낼 기회가 많겠죠.”

그새 소문이 쫙 퍼진 듯했다.

루미나는 아라벨의 포기를 모르는 집착에 미약한 두통을 느꼈다.

“혹시 엘리엇 황자님과 마주치게 되더라도 거리를 두세요.”

“왜요?”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퍽 순진하게 되물었다.

달리 듣는 귀가 없건만 클라인 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예전에 사냥터에서 마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엘리엇 황자님께서 습격을 받고 다리를 절게 됐어요. 모두가 황자님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죠.”

“…….”

“다행히도 목숨은 부지했지만…….”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없게 됐다.

“황후 폐하께서는 소중한 황자가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고 크게 상심하셨다고 해요. 이건 소문일 뿐이지만, 그 충격으로 황후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얘기도 있답니다.”

클라인 부인이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손으로 루미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긴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 아라벨 황녀님이면 몰라도 엘리엇 황자님과는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것 없어요.”

클라인 부인은 어린 루미나를 배려해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황실의 뒷사정을 알고 있었다.

‘저딴 불구자가 제 아들일 리 없다며 황후가 매일 소리를 질렀다거나. 제 아들을 부정하다가 그대로 미쳐버렸다거나. 이런 얘기를 어린애한테 할 수는 없지.’

그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한 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후의 존재는 황실의 치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후궁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엘리엇은 저를 부정한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고 그리워했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숨기기보다 아름다운 추억이나마 남겨놓기로 한 듯했다.

루미나는 그런 황실의 방식에 어떤 사감도 느끼지 못했다.

아라벨이든 엘리엇이든 황실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으니까.

“장차 황제가 되실 마르셀 전하나 레기온인 아라벨 황녀님과 달리 그분께서는 황궁에서 쫓겨나지만 않으면 다행이죠. 그러니 그분을 피하는 데 죄책감을 갖지 않으셔도 돼요.”

루미나의 침묵을 달리 해석한 건지 클라인 부인이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잘 행동하고 계시니 제 조언은 참고로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

“클로이 님께서도 지금의 루미나 님을 볼 수 있었다면 뿌듯하게 여겼을 거예요.”

그녀는 또 루미나의 어머니를 언급했다.

결국 참다못한 루미나가 묻게 됐다.

“부인께서는 제 어머니를 잘 아시나 봐요. 그렇지만 저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터라 두 분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네요.”

“아, 제가 일방적으로 클로이 님을 알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일방적이라면요?”

“끝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낭만성이 인상 깊어서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죠.”

낭만성?

루미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어머니는 동화 속 공주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자를 구하러 온 기사도 아니었다.

‘친부와 계모에게는 사랑을 방해하는 마녀 같았겠지.’

그런데 뭘 안다고 자꾸 친모를 추켜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미나 님께서는 클로이 님을 많이 닮았으니 몇 년만 더 지나면 그분처럼 어여쁜 숙녀가 될 거예요.”

“부인.”

루미나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붙잡힌 손을 빼냈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저는 어머니와 별개인 사람이에요.”

“…….”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인 건 알겠지만, 불편하니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칭찬이 오가던 다정한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불편하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을뿐더러 닮고 싶지도 않아요.”

가식 없는 진심이었다.

루미나는 친모를 반면교사 삼고 있었다.

저 싫다는 남자를 억지로 붙들어서 결혼까지 한 과욕은 루미나가 기피해야 할 종류였다.

“믿을 수 없네요. 클로이 님은 사랑을 쟁취한 분이에요. 존경해도 모자란데…….”

정말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한 클라인 부인의 표정이 덩달아 차가워졌다.

언제나 루미나를 상냥하게 대했던 그녀였기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마치 가면을 벗은 듯했다.

그런 그녀와 마주한 루미나는 어쩐지 냉랭한 얼굴이 본래 것처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클라인 부인은 자신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다급히 상냥함을 흉내 냈다.

“사담이 길어졌네요. 다시 수업에 들어가죠.”

친절하지만, 미묘하게 냉정한 태도로 말을 돌린 클라인 부인이 흐름이 끊어진 수업을 계속하려던 그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휘청거렸다.

“부인?”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루미나가 클라인 부인을 불렀다.

그렇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털썩-.

그녀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

클라인 부인은 몇 번이나 몸을 흔들고, 이름을 불러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미나는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다급히 불러 그녀를 손님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사를 데려와 진찰하게 했다. 도중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부인께서 왜 갑자기 쓰러진 거죠?”

그녀의 상태를 샅샅이 살피던 의사가 루미나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영양실조입니다.”

“네?”

귀족 부인이 영양실조라니?

“최근 무리하게 체중을 줄이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영향으로 실신한 듯합니다.”

루미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쓰러진 클라인 부인을 내려다봤다.

그러던 중이었다.

“루미나.”

“아버님!”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찾아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