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70)화 (70/152)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란 루미나가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곧 만찬 시간이다. 걸을 힘이 없어서 식당으로 오지 못한 건가?”

……방금 쫑쫑 달려간 거 못 보셨나요?

당황한 루미나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루미나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더니 쑥 들었다.

“……?”

언제나 그렇듯 무를 뽑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는 이 상태로 식당까지 데려갈 생각인 듯했다.

창공으로 날기 위해 날개를 푸드덕거리려다가 사진으로 박제된 한 마리의 새처럼 루미나는 어정쩡하게 양팔을 들게 됐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꺾인 순간이었다.

“아, 아버님! 내려주세요!”

“또 휘청거리려고?”

“아뇨. 제 다리는 멀쩡해요!”

루키우스가 의심스러운 듯 루미나를 쳐다봤다.

“의사도 있는데?”

두 발로 걷기는 글렀다.

루미나는 자신이 아파서 의사를 부른 게 아니라고 해 봤자 그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루키우스의 입장에서 본 루미나는 바람 불면 날아가는 종이 인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루미나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다른 자세로 들어주세요!”

“다른 자세?”

“네! 이렇게 들어주세요.”

루미나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짐짝처럼 들릴 바에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렇게?”

“아뇨, 아뇨! 요오렇게!”

“흠. 맞는 거 같은데.”

“이 자세는 공주님 안기라고 불려요.”

“공주나 공자비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자세는 싫으니까 요오로오케에…….”

“그래. 요로케.”

루미나가 정확한 자세를 지시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의사와 하인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돌아가신 공작부인을 제외하면 이제껏 저 냉혈한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있었던가?

서툴긴 했지만 충실하게 루미나의 명령을 따르는 모습이 훈훈했다.

또 한편으로는 인지 부조화를 느끼게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루키우스는 제법 그럴싸한 자세로 루미나를 안아 들었다.

“좋아요. 이번이 최종본이에요.”

루미나가 다시 안아달라고 두 팔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만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엉덩이를 받치며 안정적인 자세로 쑥 들었다.

황실 마차 부럽지 않은 승차감이었다.

루키우스와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아진 루미나는 잠깐 잊고 있던 존재를 언급했다.

“제 개인 교사인 클라인 부인께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게 왜?”

“…….”

“무슨 상관이지?”

인정머리 없는 레기온!

그래서 곧 만찬이 시작되는데 꾸물거린 거고, 그래서 의사를 불렀다는 얘기를 하는 건데 그는 루미나의 행동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쓰러지든 말든 무시하고 식사하러 내려오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루키우스의 생각이었다.

루미나는 이 레기온 중 레기온한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뒤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하트 공작님!”

클라인 부인이 깨어난 것이다.

루키우스를 발견한 그녀는 쓰러져 있던 사람답지 않게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이 여자.’

그 순간 루미나는 눈치챘다.

‘아버님을 좋아하는구나.’

클라인 부인은 쓰러져 있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 “크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만약 손거울이 있다면 매무새를 아주 꼼꼼히 가다듬었을 거다.

공작과 마주해서 예의를 갖추려고 보이는 반응치고는 조금 더 사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 행동이었다.

마치 풋풋한 십 대의 미성년이 짝사랑하는 이성 앞에 선 듯한.

“하트 공작님. 저는…….”

노라입니다.

그간 공작님을 많이 뵙고 싶었어요. 공작저에서 개인 교사를 구할 때 면담을 한다고 해서 당연히 공작님을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슬펐답니다.

사실 저희는 십 년도 더 전에 만난 적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봄이었고, 근사한 무도회였죠.

그런 사사로운 얘기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클라인 부인은 ‘저는’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새 몸무게가 준 것 같군. 깃털처럼 가벼워. 간식은 먹은 건가?”

루키우스의 신경이 온통 루미나에게 쏠려 있었던 탓이었다.

그는 루미나를 항상 깃털처럼 가볍게 들었으면서 새삼스러운 발언을 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간식이 들어갈 배가 없어서 걸렀어요.”

거짓말이다.

매번 챙겨주는 간식이 워낙 많아서 루미나 속 루미나가 소식을 강력히 주장했다.

어차피 루미나는 대식가가 아니었기에 이 주장은 큰 반발 없이 받아들였다.

정 디저트가 먹고 싶으면 집무실에 찾아가서 하트 공작의 불합리하고 강압적인 지시하에 먹으면 되니까.

어디서나 꼼수는 있는 법이다.

“흠. 점심을 많이 먹었단 말이지…….”

루키우스는 진위를 판가름하듯 유심히 루미나를 살펴봤다.

“나보다 두 배는 커지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것치고 관리를 소홀히 하는군. 오늘 만찬에서는 네 몸집을 두 배로 늘리는 걸 목표로 하지.”

아버님, 그렇게 많이 먹으면 누구나 죽어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목표치가 높은 탓에 루미나가 시무룩해졌다.

안 그래도 안쓰럽고 귀여운 얼굴이 배로 귀여워졌다.

“목표가 그렇다는 거다.”

루키우스가 은근슬쩍 루미나의 앙증맞은 콧잔등을 톡톡 건드리며 기운을 북돋아줬다.

그때 한번 무시당한 이후로 눈치만 보던 클라인 부인이 끼어들었다.

“공작님. 혹시 하루만 더 머무를 수 있을까요. 너무 어지러운 탓에…….”

“알아서 하도록.”

루키우스는 루미나의 콧잔등을 만져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때문에 클라인 부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대충 대꾸했다.

그리고 루미나를 든 채 방을 빠져나갔다.

지금 그에게는 앙상하게 마른 루미나를 왕창 먹여서 왕 귀여운 상태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식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그가 말했다.

“카라얀은 오늘도 저녁을 거르겠다고 하더구나. 요 며칠 새 연무장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루미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지만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뽀뽀한 이후부터 일부러 나를 피하고 있어.’

카라얀이 하루 이틀 자취를 감췄을 때는 ‘바쁜가 보다’라고 넘겼다.

그러나 시일이 계속 지나다 보니 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루키우스는 웬만해서 아들에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는 터라 억지로 식당까지 끌고 오지 않았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어려워하는 방임주의자의 태도였다.

***

빵빵.

만찬이 끝난 후, 루미나는 볼록해진 듯한 배를 두드리며 침실로 돌아왔다.

전체적인 몸집은 몰라도 위장은 두 배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악랄한 레기온인 루키우스의 계략에 제대로 놀아난 루미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모두 잠든 늦은 시각.

루미나는 잠들지 못하고 널찍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다른 데서 잘 생각인가.”

쿠션을 안은 루미나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루미나는 혼자였다.

루미나가 열 명 뛰어놀아도 충분하다 못해 널찍한 침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최근 카라얀이 하루 24시간 내내 루미나를 피한 탓이다.

이쯤 되면 카라얀이 자신을 싫어해서 피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습 뽀뽀를 당한 직후 다신 얼굴을 보지 않을 사이처럼 자취를 감췄을 리 없었다.

“손잡는 건 괜찮았는데.”

손잡기는 치료할 때도 하는 거니 큰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가 먼저 손을 잡은 전적이 있었고.

그런데 더 친밀한 사이끼리 할 수 있는 뽀뽀는 아직 일렀던 것 같다.

“아무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어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루미나는 카라얀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적당한 호감 정도?

추측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일단 카라얀이 루키우스 다음으로 싫어한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아라벨이었다.

그런데 루미나가 황궁으로 불려갔을 때 직접 찾아와 줬다.

아라벨의 주둔지인 황궁으로.

그가 같은 공기 마시기 싫다며 제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던 인물인 걸 고려하면 확실히 루미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뽀뽀하기 전까지…….”

에휴.

루미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래도 뽀뽀 한 번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호감을 죄다 깎아 먹은 듯했다.

카라얀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피하고 본다.

그런 성정을 고려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추리였다.

‘지금 하트 부자 사이에서 오작교 노릇을 할 때가 아니라 나부터 잘해야 할 때였네.’

하염없이 기다려봤자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터.

루미나는 침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연무장에 있다고 했지.’

옛 현인들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기필코 오늘 결판을 내겠다고 다짐한 루미나는 가스등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연무장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기억을 따라서 걷던 중이었다.

문득 수상한 형체가 시야에 잡혔다.

‘클라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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