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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71)화 (71/152)

비쩍 마른 체구 탓에 언뜻 유령처럼 느껴지는 그녀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지?’

클라인 부인은 루미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황급히 가스등을 끈 루미나는 살금살금 그녀의 뒤를 밟았다.

도둑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부인이 도착한 곳은 주방이었다.

같이 들어갔다가 뒤를 밟았다는 걸 들킬 것 같아 루미나가 멈춰 섰다.

그런 루미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곧이어 클라인 부인은 경비를 돌던 하녀한테 딱 걸려 주방에서 내쫓기게 됐다.

부인이 잔뜩 당황해 어쭙잖은 변명을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루미나는 생각했다.

‘꿍꿍이가 있어.’

목적은…….

‘아버님이겠지.’

루미나는 그녀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개인 교사가 된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

한편, 시간을 돌려서 오늘 낮의 연무장.

탁, 탁, 퍼억-!

단단한 목검끼리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며칠 전부터였다.

공작가의 연무장에서는 이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렸다.

그 원인은 바로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자님, 카라얀이었다.

“갑자기 집에서 지내겠다고 하지를 않나, 연무장에 들이닥쳐서 기사들을 한 명씩 조지고 다니지를 않나. 나는 공작님보다 공자님이 더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아.”

암월 기사단 소속 기사, 헉슬리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마찬가지로 암월 기사단 소속의 유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네가 이해해서 뭐 해. 나불거리지 말고 부지런히 검이나 놀려.”

“방금 못 봤어? 공자님한테 제대로 깨지고 온 거! 나는 허수아비 인형이야. 공자님의 목검을 맞고 쓰러진 허수아비 인형.”

카라얀의 대련 상대로 암월 기사단이 선정됐다.

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카라얀을 상대했는데 이상하게도 기사들만 만신창이가 되고 카라얀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기사들은 여럿이고 카라얀은 혼자인데.

제국에서 손꼽히는 인재인 그들은 상대가 레기온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가끔 카라얀한테 생채기를 낼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카라얀이 중얼거렸다.

“그 애의 몸에 흠집 하나 나면 안 돼.”

루미나라면 상처의 크기와 상관없이 선뜻 능력을 쓸 것이다.

그럴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카라얀은 검 끝이 자신을 스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면 몰라도 그 애의 상처가 되는 거라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면 카라얀은 각성한 것처럼 거침없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기사들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 애라니?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건가?

조금 소름이 돋긴 했지만 카라얀의 날카로운 공격을 받아치다 보면 의문도 종식됐다.

몸이 힘드니 생각할 겨를이 없어지는 거다.

“아니, 한창 신혼이잖아!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어린 부인이랑 잘 지내려고 그런 거라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는데. 그러면 작은 마님이랑 좀 더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은가 보지.”

유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요 며칠 새 카라얀에게 악독하게 굴려진 헉슬리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혹시 싸웠나? 부부 싸움?”

“헉슬리.”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자님이었다. 적당히 하라는 의미로 유리가 경고했다.

그렇지만 카라얀과의 잦은 대련은 정예 기사인 헉슬리에게도 힘들어서 앙금이 남아 있었다.

오죽하면 차라리 마물 토벌을 가고 싶다고 외쳤던 터라 헉슬리는 그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부부끼리 싸울 수도 있지. 내 생각에는 부부 싸움을 해서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거 같아!”

“넌 기사가 되길 잘한 것 같다. 그 머리로 어떻게 기사단에 입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을 거다.”

유리가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악담을 퍼부었다.

유리의 악담이 익숙한 헉슬리는 꿋꿋이 나불거렸다.

“그런데 나도 작은 마님 보고 싶다. 리나 말로는 요정이 따로 없대. 과장 아니라 진짜로!”

“리나?”

“내가 아는 아름다운 레이디의 이름이지.”

헉슬리가 씨익 웃으며 느끼한 눈빛을 했다.

번역하자면 공작저 내에서 일하는 하녀라는 의미다.

헉슬리는 기사단 내 최고의 바람둥이였다.

아마 공작저 내의 모든 하녀와 알고 지내는 사이일 거다. 본인은 그냥 사교성이 좋은 거라고 주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 녀석은 분명 여자 꼬시려고 기사 된 거다.

기사들이 입을 모아 그런 얘기를 할 정도니 말 다 했다.

“네가 작은 마님을 봬서 뭐 하려고.”

그분께서는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으며 기혼자시다. 이 미친놈아.

라는 경멸 어린 시선을 담아서 유리가 말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친 마음이 치유되는 외모라잖아. 애쉬만 호위를 맡다니. 이건 차별이야! 듣기로는 뺨이 우유처럼 하얗고 말랑말랑…….”

그때였다.

어떤 물체가 빠른 속도로 헉슬리에게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헉슬리가 몸을 피했다.

그렇지만 살기를 담은 그것이 뺨을 스쳐 지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콱-!

식은땀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끼며 헉슬리는 고개를 돌렸다.

목검이 벽에 박혀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목검인데.

정통으로 맞았으면 분명 죽었다.

뺨에 난 생채기에서 피가 난 헉슬리는 덜덜 떨면서 검이 날아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그곳에는 다른 암월 기사와 대련 중이던 카라얀이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헉슬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리로 와 봐.”

“유리…….”

“공자님께서 부르신다. 가라.”

마주한 모두 여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헉슬리였지만(본인 주장), 정작 그와 오래 지낸 유리는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울상이 된 헉슬리는 벌벌 떨면서 카라얀 앞에 섰다.

곧이어 헉슬리의 비명이 이어졌다.

“으악! 유리! 살려줘!”

“죽어라.”

헉슬리를 싸늘하게 외면한 유리가 등을 돌렸다.

저 녀석. 공자님한테 찍혔네.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이 쯧쯧 혀를 찼다.

해가 질 때까지 혹독하게 굴려진 암월 기사들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애쉬를 깨웠다.

“애쉬, 일어나라. 암월 기사단은 너 빼고 모두 전멸했다.”

“아.”

“기사단의 미래는 앞으로 네게 맡기겠다. 부탁한다.”

꼭 다신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대사를 하며 동료 기사들이 애쉬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실제로는 애쉬 빼고 다들 쉬러 가는 것뿐이었다.

카라얀의 대련 상대로 애쉬를 홀로 남겨두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 막둥이. 고생한다.”

“그래, 조금 더 고생해라. 우린 먼저 들어간다.”

능력이면 몰라도 나이순으로 줄을 서면 맨 뒷줄에 서게 되는 애쉬에게 모든 잔업을 떠맡긴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중 헉슬리는 거의 기면서 연무장을 나가야 했다.

기사들이 빠지고, 느릿하게 일어난 애쉬가 카라얀에게 다가갔다.

“공자님.”

애쉬의 부름을 듣고도 카라얀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지면만 내려다봤다.

그런 그의 숨이 살짝 거칠었다.

아무리 레기온이어도 며칠 동안 밤낮 가라지 않고 싸우는 건 부담이 되는지 눈 밑 또한 거뭇거뭇해졌다.

저러다가 쓰러지겠다 싶은 상태였건만 카라얀은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아라벨이 기습 방문했을 때처럼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맛있는 감자 타령을 하더니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카라얀은 머리가 끓고 있었다.

보글보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루미나가 뺨에 입을 맞췄던 그때가 자꾸 머릿속에서 반복됐기 때문이다.

쪽-.

감촉까지 정확히 떠오르는 탓에 미칠 것 같았다.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숨 쉬듯이 떠오르니 자책하게 됐다.

‘왜 자꾸 되새기는 거야!’

‘죽을 때까지 그날만 곱씹다가 죽고 나서도 떠올려서 시체 상태로 벌떡 일어나겠어.’

‘미쳤어? 변태야?’

등등.

거의 반쯤 미치광이인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루미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카라얀은 마음을 가라앉힐 특단의 조치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연무장을 찾았다.

몸이 고되면 머리가 비워지니까.

그런데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여전히 뜨거워서 마음이라는 솥이 바닥까지 타고 있었다.

솥 안에 있던 내용물이 잔뜩 졸아 버린 것이다.

‘후우. 진정하자.’

전혀 진정하지 못한 카라얀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계속 깨먹은 탓에 이번이 몇 번째일지 모를 목검을 들고 애쉬와 마주했다.

그렇게 해가 뜰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됐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깜찍한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카라얀 님!”

루미나였다.

순간 환청을 듣는 줄 알고 당황한 카라얀의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카라얀 님! 잠깐 멈춰 보세요. 할 말이 있어요!”

환청이 아니었다.

진짜 루미나가 서 있었으니까.

루미나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두 손을 들어서 휘휘 흔들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카라얀의 눈에는 루미나밖에 보이지 않는데.

루미나가 정말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카라얀은 힘 조절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애쉬와 대련 중인 것도 잊고 흥분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카라얀의 검이 정확히 애쉬를 내리쳤다.

콰앙-!

그 순간 루미나는 생각했다.

‘죽은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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