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72)화 (72/152)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시야를 가릴 정도로 흙먼지가 거세게 휘날렸다.

멀찍이 서 있던 루미나가 기세에 밀려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휘오오-.

실눈을 뜬 루미나는 머리칼이 날리는 걸 느꼈다.

“애쉬 경!”

애쉬의 생사가 걱정될 정도로 파괴력 있는 공격이었다.

콜록콜록.

흙먼지를 삼키는 바람에 잔기침을 한 루미나가 최대한 사태를 살피려고 했다.

무언가 보였다.

‘빛?’

그냥 빛이 아닌 오러였다.

일반적인 레기온이라면 인간을 초월한 힘인 마력을 다룰 줄 알았다.

그러니 마력의 한 종류인 오러쯤은 쉽게 쓸 수 있다고 한다.

아니면 소드 마스터쯤 돼야 오러를 다룰 수 있으니 루미나는 당연히 카라얀의 것이라고 추측했다.

동시에 섬뜩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애쉬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긴 하지만, 내가 알기로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아직 2년 정도 남았어.’

아직 소드 마스터가 아닌 애쉬가 진심이 담긴 레기온의 공격을 받아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지금쯤 애쉬는…….

흙먼지가 점점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깨끗해졌다.

루미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가장 먼저 애쉬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입이 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

루미나가 본 오러는 카라얀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애쉬의 것이었다.

루미나는 흙먼지로 시선이 흐려져서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서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애쉬의 목검에 회색 오러가 둘려 있었다. 훈련용 목검에 과분할 만큼 강력한 오러였다.

‘벌써?’

루미나는 제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애쉬에 관한 전생의 정보를 되짚어 봤다.

하지만 기억은 잘못되지 않았다.

정말로 애쉬가 2년이나 빠르게 각성한 것이다.

루미나는 당혹스러웠다.

전생과 현생에서 강력한 변수는 루미나 자신인데, 저는 애쉬의 성장에 별달리 한 일이 없었다.

뭔가 잘못돼도 제대로 잘못되고 있는 거다.

“애쉬.”

루미나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동안 카라얀이 애쉬를 불렀다.

그는 루미나에게 한눈팔려 있다가 자신이 애쉬를 죽일 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애쉬, 괜찮아?”

“……괜찮습니다.”

“미안해. 내가 힘 조절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실책이야.”

친구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카라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 본인도 얼떨떨했던 것이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애쉬의 얼굴에 놀라움이 새겨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애쉬가 오러를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라얀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루미나에게 외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해.”

더는 머릿속이 보글보글 끓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지니 루미나와 마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거리를 두기로 했다.

루미나라면 오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꽥 쓰러질 것 같았다.

루미나를 종이 인형 취급하는 건 부자가 똑같았다.

발만 동동 구르던 루미나는 카라얀의 말을 듣고 용건을 꺼내기 위해 하압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한편, 카라얀과 애쉬의 격렬한 결전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저택이 흔들렸다.

덕분에 곤히 자던 기사들이 눈곱도 떼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일어나야 했다.

그들은 카라얀과 애쉬 사이에서 큰일이 났나 싶어서 일제히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최근 카라얀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굴었어도 이 정도로 강하게 힘을 방출한 적은 없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가 폭주했다면?

혹은 이 사태가 폭주의 징조라면?

기사 한두 명으로는 절대 카라얀을 막을 수 없었다.

“애들끼리 싸우다가 좀 격해진 거 아닐까?”

“그러길 바라야지.”

“애들 싸움 참 살벌하다, 살벌해.”

무기를 챙긴 기사들이 우르르 모여서 뛰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징조가 없는 터라 살짝 긴장이 풀렸다.

보통 카라얀이 폭주하면 ‘쾅!’이 아니라 ‘쾅! 쾅! 쾅쾅쾅쾅!’인 터라 폭주의 가능성이 낮다고 느껴졌다.

“빨리빨리 갑시다. 이러다가 우리 막둥이 소드 마스터 되겠어요.”

누가 그런 농담을 할 만큼 여유를 되찾고 이동한 그들은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애쉬의 오러를 목격할 수 있었다.

‘진짜 소드 마스터……!’

막내가 소드 마스터가 됐다는 사실에 놀랄 뻔했다.

한 소녀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신 뽀뽀 안 할게요!”

뽀뽀 안 할 게요오오오…….

소녀의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하게 연무장을 울렸다.

갑작스레 뽀뽀 발언을 듣게 된 기사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굳은 건 카라얀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정지됐던 카라얀이 흙먼지 날릴 정도로 루미나에게 우다다 달려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한 그대로요! 다신 뽀뽀 같은 짓 하지 않을 테니까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미워하지 말라니?”

내가 언제 널 미워했는데.

당황한 카라얀이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를 썼다.

“제가 잘못했어요.”

루미나가 추욱 늘어졌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카라얀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자꾸 그때가 떠올라서 도저히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너만 보면 음흉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카라얀이 어떤 식으로 곱게 포장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뽀뽀래.”

“뽀뽀?”

“그래. 뽀뽀!”

기사들이 바보 같은 대화를 쑥덕거렸다.

말이 쑥덕거리는 거지 목소리가 기본적으로 커서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잔뜩 뿔이 난 카라얀이 그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흰 뭐야?!”

“공자님이 폭주한 줄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대화가 가능한 걸 보니 멀쩡하시군요!”

“…….”

“저희는 그만 철수하겠습니다. 하던 거 계속 하십쇼.”

하하.

왠지 약이 오른 카라얀이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럴 땐 눈치가 빠른 기사들이 애쉬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우리 막둥이가 소드 마스터가 됐잖아.”

오러가 둘린 목검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애쉬가 겨우 오러를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목검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 재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들이 “우어어!” 하고 처음 불을 발견한 인류처럼 환호했다.

“우리 막둥이가 소드 마스터래!”

“기념으로 파티하자, 파티!”

“파티!”

우와와-!

덩치 큰 자들이 애쉬를 번쩍 들었다.

헹가래를 당한 애쉬는 맹한 표정으로 허공에 떴다가 내려오길 반복했다.

너무 많은 일이 한순간에 벌어져서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동년배와 비교하면 애쉬는 덩치가 큰 편에 속하건만, 기사들도 한 덩치 하는 터라 제 나이에 맞게 작아 보였다.

게다가 맹한 표정도 애쉬를 제 나이로 보이게 하는 데 한몫했다.

우람한 어른 곰들에 둘러싸인 큰 아기 곰 같았다.

기사들이 난리가 난 틈을 타 유리가 루미나에게 다가갔다.

“작은 마님. 저는 공작가 소속, 암월 기사단의 유리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침실까지 호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루미나는 카라얀을 힐끗 쳐다봤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라고?

뭔가 탐탁지 않았다.

“시각이 늦었습니다. 미성년은 일찍 자야 키가 큽니다.”

유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때 카라얀이 끼어들었다.

“내가 데려갈 테니 넌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카라얀이 함께 이동한다면 유리가 굳이 루미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오늘로 공자님의 지옥 훈련은 끝인가 보군.’

카라얀이 연무장을 떠난다는 건, 암월 기사단의 극기 훈련 또한 끝났다는 암시였다.

잔뜩 들뜬 동료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면 더 좋아하겠지, 생각하며 유리가 몸을 돌렸다.

“늦었어. 어서 가자.”

“네? 네!”

한편 유리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카라얀이 루미나를 재촉했다.

마음 같아서는 루미나가 자신한테 뽀뽀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기사들의 입막음부터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부터 축제 중이었다.

카라얀은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또한 지금도 콩알인 루미나가 오늘 못 자서 계속 콩알 상태로 있는 건 사양이었다.

카라얀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루미나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루미나가 최선을 다해 뛰듯이 걸어도 평범한 속도로 걷는 카라얀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진 터라 루미나는 속으로 카라얀을 욕했다.

“뭐 해.”

루미나의 속내를 읽은 걸까.

카라얀이 홱 고개를 돌렸다.

‘바보, 멍청이, 메롱.’

“카라얀 님 따라가고 있죠!”

음흉한 속내와 달리 루미나가 퍽 순진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 루미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카라얀이 다가왔다.

‘바보, 멍청이, 메롱 모두 취소! 취소!’

진짜로 속이 읽혔을 리 없지만 시기가 너무 기가 막힌 터라 루미나가 속으로 외쳤다.

그러는 동안 카라얀이 괜히 무섭게 무뚝뚝한 얼굴로 루미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보의 반대! 멍청이의 반대! ……응?’

그가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살짝 앞장서서 나아갔다. 아까보다 훨씬 느린 걸음이었다.

“자꾸 그렇게 뒤처져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이 낚아채간다.”

“네! 좋아요!”

‘역시 손잡는 것까지만 허용인가 봐.’

루미나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듣지 않고 대충 긍정했다.

“……조그만 게 못하는 말이 없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잖아.”

“?”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루미나는 카라얀의 뒤통수만 어리둥절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뭐라 해놓고 난리였다.

한편, 루미나가 연무장을 떠나고 나서 헉슬리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헉! 작은 마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어디 가셨지.”

“취침하러 가셨다.”

“안 돼! 목소리밖에 못 들었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달려가면…….”

“너도 그냥 자라.”

헉슬리의 뒷덜미를 낚아챈 유리가 그를 질질 끌고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