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씻고 올 테니까 자고 있어.”
루미나와 카라얀이 방으로 돌아왔다.
굉장히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은 먼저 루미나를 재우려고 했다.
그러나 루미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다릴게요!”
뽀뽀로 인해 생긴 앙금을 완전히 풀 작정으로 루미나는 냉큼 소파에 앉았다.
“오래 걸릴 텐데?”
“괜찮아요! 지금 전혀 졸리지 않거든요.”
반짝반짝.
필사적으로 자신이 졸리지 않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루미나와 마주한 카라얀이 “그러든가.”라고 말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보통 사람이라면 이를 딱딱거릴 만큼 시린 냉수로 온몸을 적신 카라얀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진정됐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또 머릿속이 팔팔 끓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는 제게서 불쾌한 냄새가 날까 봐 뼈까지 닦을 기세로 벅벅 씻었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연무장을 뒹굴었던 탓에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다.
냉수로 몸을 식히던 카라얀은 문득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루미나와 맞잡았던 부분이었다.
아직까지도 온기가 남아 있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이러니까 미친 거 같잖아……. 정신 차려라. 제발.”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카라얀이 아까 씻었던 부분을 다시 씻기를 반복하며 길고 긴 목욕을 겨우 마쳤다.
옷을 입고 나니 이제 욕실에서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나가면 루미나가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면서 저를 쳐다볼 게 뻔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리고, 겨우 식혔던 열이 다시 오르는 터라 그는 선뜻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몇 차례 고민한 끝에 결국 문고리를 잡길 포기하고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으아아아.”
그러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문을 따라 쭉 미끄러져 내려 쭈그려 앉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감아도 그 애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를 리 없었다.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은 카라얀은 겨우 욕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귀에 들려온 건 숨소리였다.
코오오-.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루미나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 난리를 피웠던 게 무색해지는 장면이었다.
누구와 달리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게 자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운이 쭉 빠졌다.
처음에는 허무했다가 이내 피식피식 웃고 만 카라얀은 루미나를 깨워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둬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였다.
기우뚱-.
루미나의 머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었다.
다급히 손을 뻗어서 머리를 받쳐준 카라얀은 더는 고민할 것 없이 루미나를 가뿐히 들었다.
루미나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줬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러는 동안에도 루미나는 한 번도 몸을 뒤척이지 않았다.
“빨리 무럭무럭 자라서 나만큼이라도 커.”
그렇게 중얼거린 카라얀은 천사 같은 루미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뭔가를 할까 말까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부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넓은 침대를 내버려두고 소파로 가서 누웠다.
그런데 귓가에 루미나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라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랜만에 눕는 건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
공작가의 저택이 분주했다.
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작은 연회를 준비했다.
바로 애쉬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된 기념 연회였다.
원래 기사들끼리 소소하게 축하하려고 했으나 누군가(헉슬리) 공작가의 하녀들을 전부 초대하면서 그럴 수 없게 됐다.
심지어 누군가(헉슬리) 떠벌린 탓에 애쉬가 소드 마스터가 됐다는 사실을 공작저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됐다.
하녀들만 초대하고 자신들은 제외하냐는 하인들의 불만이 작게라도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판을 키울 생각이 없었던 기사단장 제임스는 ‘그런 거 안 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념 연회 소식을 들은 올리비아가 발 빠르게 행동했다.
“공작님. 우리 귀염둥이 아들이 소드 마스터가 됐다고요. 소드 마스터! 그러니 연회, 열어야 합니다. 꼭이요.”
브랜든이 옆에서 “옳소, 옳소!”라고 외친 건 덤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질척일 것이 뻔한 터라 루키우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허락했다.
그렇게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들이 참석할 수 있는 연회가 급하게 준비됐다.
연회 시각은 저녁이었다.
루키우스는 루미나의 의사를 물어본 후 매일 함께하던 가족 만찬을 취소했다.
‘애쉬가 소드 마스터가 된 일을 다들 제 일처럼 기뻐하고 있네.’
오전부터 주위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건 루미나의 피부에도 와 닿을 정도였다.
비록 당장 제 앞에 있는 하녀는 온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모두 품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작은 마님. 정말로 이것만 먹어도 괜찮으세요? 혹 오늘 식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제가 빨리 주방장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루미나가 먹다 남긴 점심 식사를 보며 하녀 리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연회 때 맛있는 거 많이 먹게 속을 비워두는 거야.”
나름 타당한 이유를 내놓았으나 리나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루미나가 과식하는 체질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루미나가 빠르게 말을 돌렸다.
“다들 연회 준비하느라 바쁘잖아. 괜찮으니까 어서 가 봐. 아, 내가 도울 건 없어?”
“작은 마님께서는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면 돼요.”
리나가 싱긋 웃으며 식기를 정리했다. 루미나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클라인 부인께서는 아직 저택에 머무르고 계시지?”
“네. 회복이 덜 되셨다면서 누워 계세요. 듣기로는 자택에 편지를 보냈다던데, 아마 귀가가 늦어진다는 얘기를 한 게 아닐까요?”
“얼마나 아프길래?”
“현기증이 심해서 아예 거동을 못 하세요.”
그런 사람이 오밤중에 저택을 돌아다닌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루미나가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말했다.
“리나. 부인께서 식사는 제대로 하시니?”
“네. 오늘 조찬과 오반 모두 그릇을 깨끗이 비우셨다고 해요.”
“다행이네. 그러면 바쁜 와중이지만 네가 곁에서 부인을 지켜봐 줄래?”
리나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루미나가 이어 말했다.
“제자인 내가 곁에서 계속 지켜보면 불편해하실 것 같아. 빨리 나가라는 재촉처럼 느낄 수도 있고. 그러니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루미나의 명령을 받은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해가 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건만 저택은 낮처럼 환했다.
귀여운 노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크게 땋아서 양 갈래로 묶은 루미나가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밝은 복도를 걸었다.
루미나의 곁에 있던 애니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은 마님. 연회에 불참하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응? 혹시 내가 있으면 불편한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기사님과 사용인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작은 마님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귀족만 입단할 수 있는 황실 기사단과 달리 공작의 휘하에 있는 암월 기사단은 봉신 가문의 자제를 제외하면 거의 평민으로 구성돼 있었다.
평민과의 겸상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애니가 뒤늦게나마 얘기를 꺼낸 것이다.
‘집안 고용인들에게 베푸는 연회라니. 기사들 탓에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쳐도 전례가 없긴 하지.’
열셋의 나이로 몇 없는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드는 것도 전례 없긴 했지만.
“듣기로는 공작님께서도 느지막하게 참석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작은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따로 저녁을 챙겨드릴게요.”
“아냐. 애쉬 경은 내 호위 기사인걸. 내가 아는 사람한테 좋은 일이 생겼으니 나도 기뻐.”
“…….”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잖아. 그리고 좋은 소식을 공유하고 축하하는 데 신분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해.”
“작은 마님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네요.”
애니가 작게 감탄했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와 친분을 유지하는 게 나쁘지 않아서라고 하면 더는 감탄하지 않겠지만.
루미나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테이블들이 세로로 기다랗게 놓여 있고, 먹을 것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본 익숙한 사람들로 연회장이 가득 찼는데, 애쉬가 그 중심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원래는 부모님한테 배신자 낙인이 찍히니 소드 마스터가 되고 나서도 누구한테도 축하받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애쉬가 귀족이기는 하나 아직 열셋밖에 안 된 커다랗고 어린 기사님이었다.
모두가 성인인 사용인들은 애쉬를 귀여워하며 축하해 줬다.
루미나는 여전히 맹한 애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카라얀의 옆자리에 앉았다.
카라얀이 움찔했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쇠뿔을 단김에 빼려고 했는데…….’
어젯밤에는 자버렸고, 자고 일어나니 카라얀은 어제보다 더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기분이 나쁠 때 대화해서 좋은 결과로 이끌 수 없을뿐더러 카라얀이 더는 자신을 피하는 것 같지 않았다.
루미나는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나 싶었다. 사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손만 잡고 뽀뽀는 안 하면 되겠지.’
루미나가 무심히 생각했다.
그 와중에 드디어 루미나를 본 헉슬리가 루미나한테 접근하려 했다.
“헉슬리.”
“윽.”
그러나 유리에게 팔이 꼬집히면서 시도로만 그쳤다.
엄청난 비명을 삼킨 헉슬리는 소문보다 더 귀여운 작은 마님을 그저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땡, 땡, 땡-.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기사단장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푼으로 잔을 쳐서 좌중을 조용히 만들었다.
“여러분!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된 애쉬를 위해 축배를 듭시다.”
미성년에게는 과일 주스가, 성인에게는 알코올 함량이 낮은 맥주가 준비됐다.
다들 음료가 가득 담긴 잔을 들었다.
“건배사는 공자님이 하시죠. 애쉬가 소드 마스터가 된 데는 공자님의 덕이 크니까요.”
헉슬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끼어들었다. 발언권을 넘겨받은 카라얀이 당황했다.
“……뭔데?”
“자, 다들 들으셨죠?”
모두가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뭔데!”
짠-!
다들 입을 모아 외치며 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