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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74)화 (74/152)

얼떨떨하게 서 있던 카라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혼자서 잔도 못 들고 넋 나간 채로 있으니 헉슬리가 거들먹거렸다.

“공자님. 이게 바로 어른들의 세계라는 겁니다.”

카라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카라얀이 레기온이라는 걸 잊었는지 아니면 간이 배 밖에 나왔는지.

지난 지옥 훈련을 새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헉슬리가 카라얀에게 치근덕거렸다.

“공자님. 제가 연애 비법 전수해 드릴까요?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게 아니에요. 공자님이라 제안 드리는 거지.”

“필요 없어.”

“제가 이래 봬도 기사단에서 연애를 제일 많이 해 봤습니다. 아직 결혼은 못 했어도 여심은 훤히 꿰고 있으니 저만한 조언자가 없을 겁니다.”

“필요 없다니까.”

카라얀이 헉슬리를 밀어냈다.

그러면서 힐끔 옆자리에 앉은 루미나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루미나는 엉뚱한 건배사를 듣고 꺄르르 웃느라 바빠서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는 듯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때였다.

시끌벅적한 연회장이 일순 고요해졌다.

짧은 정적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로 술렁거렸다.

아까처럼 마냥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경계와 의문. 그리고 경악.

초대받지 않은 객의 등장 탓이었다.

바로, 노라 클라인.

현기증이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클라인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그녀가 그냥 왔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경계하지 않았을 거다.

“옷이…….”

“……역시 그렇죠?”

프릴과 리본이 달린 분홍 드레스는 조금 더 귀여운 인상을 한 여인에게 어울릴 법했다.

안타깝게도 클라인 부인은 깐깐하게 생긴 터라 옷과 따로 놀았다.

심지어 최근 살이 빠져 막대기처럼 빼빼 말라서 옷이 그녀를 삼킨 꼴이 됐다.

‘게다가 십 년 전쯤에 유행하던 양식이잖아.’

오래된 유행에다가 사교계에 갓 데뷔하는 영애가 입을 법한 복장이었다.

아무리 봐도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를 반길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기에 루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라얀 님. 클라인 부인이 이곳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저 하나뿐인데 제가 자리를 옮겨도 괜찮을까요?”

“저 사람이 누군데.”

“제 개인 교사예요. 건강 문제로 쓰러져서 잠시 저택에 머무르게 됐어요.”

“밖으로 내보내.”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라얀이 원래 까칠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격한 반응이었다.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저 사람이 입은 거. 어머니가 자주 입었던 옷이랑 비슷하잖아.”

멈칫.

잠깐 굳었던 루미나가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카라얀을 달랬다.

“괜찮을 거예요.”

‘내가 나설 거니까.’

카라얀에게서 등을 돌린 루미나가 차가운 눈빛을 했다가 빠르게 표정을 바꾸고는 클라인 부인에게 다가갔다.

“부인. 여긴 어쩐 일이세요.”

“공작가의 기사가 소드 마스터가 됐다면서요. 축하받아야 마땅한 자리라고 생각돼서 찾아왔네요.”

부인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루미나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구석진 자리로 이끌었다.

‘공작부인이 살아계셨을 적에 일했던 고용인들도 클라인 부인이 그분을 따라 입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어.’

기저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북함을 밀어내며 루미나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끌었다.

“그 드레스는 처음 보네요.”

“연회가 있다기에 집에서 급하게 갖고 와 달라고 했답니다.”

클라인 부인이 호호 웃으며 대꾸했다.

‘자택으로 편지를 보냈다더니. 늦게 돌아간다고 연락을 넣은 것이 아니라 옷을 갖고 오라고 했던 거구나.’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저택을 떠날 생각이 없었던 거다.

실제로도 그녀는 자꾸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루미나가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부인께서 영양실조래요. 평소에 식사를 잘 챙기지 않으시나요?”

“영양실조라니. 오진이겠죠.”

실제로 감시역을 맡은 리나는 클라인 부인에게서 거식증 증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이곳의 의사들은 유능해. 오진일 리 없지.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그녀가 무슨 짓을 꾸미려는지 감을 잡은 루미나는 부인에게 음식을 권했다.

클라인 부인이 예법 교사답게 우아한 자세로 음식에 입을 댔다.

“그러는 루미나 님이야말로 커트러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군요.”

“저는 누군가 손을 댄 음식을 먹지 않아요.”

일순 클라인 부인이 미소를 잃었다.

“이곳 하녀들은 입이 가볍나 봐요.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떠벌리다니.”

“으음? 그게 무슨 소리죠?”

“…….”

“하녀들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루미나가 딱 잡아뗐다.

클라인 부인은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별일 아니니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살짝 초조해졌는지 클라인 부인은 잔을 만지작거렸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그녀는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작님께서는 아직 오시지 않았나 봐요. 시간을 맞춰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버님이요?”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쩌죠. 아버님께서는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하녀들이 흘린 얘기를 들었는지 클라인 부인이 확신했다.

루미나는 속으로 조소를 삼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저한테만 살짝 얘기해 주셔서 다들 모를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버님께서 저를 각별히 여기는걸.”

클라인 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사람. 아버님이 날 안아들었을 때 반쯤 깨 있었구나.’

그렇다면 얘기가 편해졌다.

“음. 제가 아버님을 불러올까요? 생각해 보니 아버님도 이 자리에 있으면 즐거워하실 것 같네요.”

클라인 부인이 더 고민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회를 잡지 않으면 그녀가 하트 공작과 마주할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됐다.

그러니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루미나가 발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머리핀이 떨어졌다.

마침 근처에 있던 헉슬리가 바로 머리핀을 주워서 건네주려고 했다.

그런데 루미나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연회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뒤를 따라간 헉슬리는 모두가 연회장에 있는 탓에 고요한 복도에서 루미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작은 마님! 작은 마님! 머리핀이 떨어졌습니다.”

“앗! 경이 아니었으면 난처했을 거예요. 감사해요.”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작은 마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루미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봤다.

금빛 머리칼에 헤이즐넛 색 눈동자를 한 사내였다. 곰 같은 기사들 중 호리호리한 체격을 하고 있어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굵고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와 능글거리는 미소까지.

‘전형적인 바람둥이 같은 인상.’

루미나와 암월 기사들은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는 탓에 루미나는 애쉬를 제외하고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이자에 대해 잘 몰랐지만, 금방 알 수 있는 점이 있었다.

바로…….

“그쪽은 헉슬리 경이지?”

“헉!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감동입니다!”

여기저기서 ‘헉슬리!’ 하고 부르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있잖아. 경은 애쉬 경과 친하게 지내?”

“네! 그렇습니다!”

사교성 좋은 헉슬리는 모두와 친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잘됐다! 안 그래도 내가 남들 몰래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뭡니까?”

서두만 뗐을 뿐인데 헉슬리가 바로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와 마주하며 루미나가 씩 웃었다.

사교성과 장난기.

딱 루미나가 찾던 인재였다.

***

원래라면 루키우스는 카라얀이 편하게 연회를 즐기게 느지막이 얼굴만 잠깐 비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자그마한 소녀의 등장으로 계획은 그저 계획으로만 남게 됐다.

“아버님! 빨리 오세요, 빨리!”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예정보다 이르게 집무실을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루미나는 자꾸만 그를 재촉했다.

저 짤막한 다리로 저런 엄청난 속도를 내는 게 제법 웃음이 나왔다.

“다들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뭐가 편하다고 저택의 사용인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고용주를 찾겠는가.

“어서 가요, 어서.”

그렇지만 입 안의 혀처럼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아이의 투정에 못 이겨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가 루미나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가자 다들 잠깐 하던 행동을 멈췄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고갯짓하자 다들 빠르게 연회를 다시 이어갔다.

그중 카라얀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자리를 피했을 텐데 카라얀은 그러지 않고 거리만 유지했다.

그것만으로도 루키우스는 만족했다.

“아버님. 저쪽 자리에 앉아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잔뜩 있어요.”

루미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루키우스는 제법 힘없이 루미나에게 끌려갔다.

어쩐지 자신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 잔뜩 있는 테이블이었다.

“또 끼니를 거르셨을 거 아니에요. 일단 식사부터 해요.”

“그래.”

루키우스는 제 옆자리에 앉은 루미나의 말을 따랐다.

식전에 가볍게 음료를 마시기 위해 잔을 찾는데 누군가 나머지 옆자리를 차지했다.

분홍 드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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