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75)화 (75/152)

“공작님.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누구지?”

“루미나 님의 예법 교사 노라라고 합니다.”

클라인 부인이 죽은 남편의 성을 쏙 빼놓고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렇군.”

저택 내에서 루키우스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때문에 누군지 물었던 거다.

혹시 브랜든의 장난인가 싶어서.

하지만 그것도 아닌 듯해 관심을 뚝 끊었다.

애초에 상대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니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대놓고 무시당한 클라인 부인은 굳이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미리 준비된 잔을 루키우스 앞으로 밀어서 술을 따랐다.

마침 음료를 마시려고 했던 루키우스가 잔을 들려 했다.

그때 루미나가 외쳤다.

“저도 마셔 보고 싶어요!”

“이걸?”

“네! 듣기로는 알코올이 거의 없대요. 그러니 조금만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음.”

루키우스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루미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잔을 빼앗아갔다.

그 나이 또래 아이가 할 법한 행동이었기에 다들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루미나 님. 그러면 안 돼요.”

클라인 부인이 루미나를 호되게 혼내며 잔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제삼자가 루미나가 들고 있는 잔을 앗아가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

헉슬리였다.

클라인 부인이 나서는 것보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게 더 빨랐다.

꼴깍.

“작은 마님. 취하지 않아도 아직 마시기에는 이릅니다. 한 세 살만 더 먹고 드십시오.”

“언제부터 작은 마님이랑 알고 지냈냐고 끼어드냐!”

우우.

다른 기사들이 헉슬리의 행동에 야유를 보냈다. 친하기 때문에 장난삼아 하는 행동이었다.

헉슬리 또한 여유롭게 반응하던 때였다.

“헉!”

갑자기 헉슬리가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헉슬리,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너 또 장난치려고 그러는 거지? 아무도 안 속으니까 그만해라.”

쏟아지는 야유에도 헉슬리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헉슬리!”

다들 장난이라고 믿는 와중에 단 한 명의 기사가 헉슬리에게 다급히 달려갔다.

검은 머리칼을 단발로 자른 차가운 인상의 기사. 바로 유리였다.

“헉슬리, 숨을 못 쉬겠어?”

“그으윽…….”

“내 말은 들려?”

유리가 진지하게 헉슬리의 상태를 살피니 사람들은 그제야 진짜 헉슬리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했다.

“그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헉슬리가 루미나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루미나는 클라인 부인을 보고 있었다.

“아니야, 안 돼…….”

헉슬리가 술을 마셨을 때부터 그녀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겁에 질린 사람처럼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이성을 잃은 듯 비명을 질렀다.

“싫어!”

부인의 비명을 듣고 깜짝 놀란 헉슬리가 벌떡 일어났다.

계획이 완전히 어긋났으니 지금이 아니면 연기라는 걸 밝힐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헉슬리는 유리를 뒤로하고 애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애쉬! 왜 날 걱정하지 않는 거야!”

“……?”

가만히 있던 애쉬가 어리둥절해했다.

헉슬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숨겨뒀던 물건을 애쉬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그리고…….

퐁-.

종이 폭죽이 터지며 색색의 종이꽃이 애쉬의 머리 위로 나풀나풀 내려앉았다.

헉슬리는 서둘러 자그마한 고깔모자를 꺼내 애쉬의 머리에 씌워주고, 코끼리 나팔도 꺼내서 불었다.

뿌우우-.

곱게 말려 있던 나팔이 펼쳐지며 괴상한 소리가 났다.

“네가 나한테 다가오면 작은 마님이랑 같이 이러려고 했는데 멀뚱히 서 있는 바람에 다 끝났어!”

나름 열심히 연기했는데.

헉슬리는 힘이 빠졌다.

“심지어 작은 마님한테 너랑 친하다고 호언장담을 해 놨단 말이야. 그런데 유리 빼고 아무도 날 걱정해 주지 않고!”

자신이 쓰러지면 애쉬가 달려올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헉슬리.”

그리고 헉슬리를 가장 걱정했던 유리가 음산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멀쩡한가 봐?”

“그, 그렇지?”

괜히 찔린 헉슬리가 말을 더듬자 유리는 항상 그렇듯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잘됐네.”

헉슬리가 어쩐지 유리한테 잘못한 기분이 마구 드는 동안 루미나는 새파랗게 질린 클라인 부인을 돌아봤다.

“그런데 클라인 부인.”

“…….”

“뭐가 그렇게 싫으셨어요?”

“그, 그게…….”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보통 싫다고 하지는 않잖아요.”

클라인 부인의 외침은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그러니 발뺌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아버님이 드실 술에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죠?”

충분히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올리비아가 술잔을 회수했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이건 제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헉슬리는 마시는 척만 했기 때문에 음료는 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아니니까…….”

‘아버님을 죽이려는 건 아니었으니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지.’

그녀의 꿍꿍이를 알고 있는 루미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이 부인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고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부인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연회는 더는 연회라고 부를 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

어쨌든 애쉬는 축하받아야 마땅했기에 불편한 분위기를 깨고 루미나가 활기차게 외쳤다.

“좋은 날인데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네요!”

“…….”

“그러면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감옥에서.

루미나는 빙긋 웃었다.

***

도박장이란 어제의 부자가 오늘의 거지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별별 인간 군상이 다 모여들었는데,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은 없었다.

‘망한 인생의 집합체. 일종의 시궁창.’

감옥에만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범법자도 득시글거렸다.

하지만 도박을 할 능력만 충분하다면 서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돈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 사랑의 묘약을 만든 사람이라고! 이까짓 돈, 묘약만 몇 번 팔면……!”

자신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전생에서 자신이 사랑의 묘약을 제작했다고 주장했던 남자도 그랬다.

그의 얘기를 들은 적 있는 루미나는 클라인 부인의 꿍꿍이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능한 부관인 올리비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하고 루키우스에게 보고했다.

“노라 클라인이 공작님께 사랑의 묘약을 쓰려 했습니다.”

하트 공작의 집무실.

루미나가 소파에 앉아서 루키우스와 함께 보고를 들었다.

자신의 개인 교사와 관련된 일이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다고 해서 한 자리 차지한 것이다.

“효능이 있는 건가?”

“아뇨. 대충 흉내만 낸 물약입니다. 그렇지만 복용하면 심장이 빠르게 뛰어 일시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할 수는 있을 겁니다.”

“독인가?”

“맹독은 아닙니다. 하지만 심장이 약한 사람이 한 병을 단숨에 마시면 그 자리에서 바로 심장 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랑의 묘약이 아니라 지옥의 독약이었다.

“노라 클라인은 공작님께서 레기온인 걸 감안해 치사량보다 많은 양을 썼습니다. 확실한 결과를 원한 거겠죠.”

“사용법은 어떻게 되지?”

“‘사랑의 묘약’이라는 이름을 단 불법 물약이 워낙 많다 보니 복용 방법도 각각 달랐습니다. 노라 클라인이 입수한 이 약의 경우는…….”

루미나는 전생에 묘약 제작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을 진행했기에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랑의 묘약? 그게 뭔데? 마시고 눈 뜨면 사랑에 빠지는 건가?”

“그러다가 생판 남이랑 눈이 마주치면 헛물켜는데 팔릴 리가 있나. 좀 더 확실하게 만들어서 팔았지.”

“확실?”

“구매자한테는 한 달간 붉은 약을 마시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짝사랑하는 상대한테 푸른 약을 먹이라고 하는 거지.”

“두 사람 다 약을 먹었으니 동화처럼 묘약을 마시고 첫눈에 본 상대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겠군.”

그리고 굳이 한 달의 제약을 둔 건 판매자가 수월하게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효과는 있는 건가?”

“그럼, 있지. 복용 기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구매자가 의심하거든.”

비열하게 웃은 그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구매자가 빨간 약을 마시면 심장이 빠르게 뛰며 체중이 급격하게 빠진다.

처음 며칠은 살이 빠지니 주변에서 예뻐졌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 약이 효과가 있구나!’ 하고 믿는 것이다.

푸른 약도 색만 다를 뿐 효과는 동일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자가 알려 준 비밀 재료를 조합해 약을 만들 수 있었고, 곧바로 돈방석에 앉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팔면 한 사람한테 같은 약을 두 개 팔 수 있지.”

“아저씨. 그거 살인인 건 알죠?”

“지금 나를 탓하는 거냐?”

듣다 못한 루미나가 한마디 했었다. 그러나 남자는 뻔뻔했다.

“애초에 물약의 도움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착하다고 동정하는 건지. 쯧쯧.”

“…….”

“며칠만 지나도 몸이 나빠졌다는 걸 알 수밖에 없는데, 중간에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겠지. 하지만 계속 복용했으니 구매한 사람 잘못 아닌가?”

그 말을 들으며 루미나는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처벌받지 않았어.’

도박장에서 자신이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고 고래고래 외쳤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자산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도박꾼들만의 철칙이었으니까.

“노라 클라인은 현재 지하 감옥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놀랍게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더군요.”

루키우스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고심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미나가 말했다.

“그러면 제가 그때 아버님 몫의 술을 마셨으면 클라인 부인을 사랑하게 됐겠네요?”

“작은 마님은 특별한 경우라 단언할 수 없지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뛸 수도 있었겠네요.”

올리비아의 말을 듣자마자 루키우스가 입을 열었다.

“수거해.”

“네?”

“암암리에 거래되는 사랑의 묘약. 모두 수거해.”

아직 부족했다.

루미나가 한 번 더 끼어들었다.

“그런데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수거해도 다시 생기지 않을까요?”

“만든 작자도 잡아 와.”

“…….”

“본인이 만든 약을 맛볼 기회를 줘야 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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