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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76)화 (76/152)

루키우스가 음산하게 선언했다.

루미나는 그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아버님, 대단해요!”

우와, 우와.

루미나가 순진하게 감탄했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지.”

루키우스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루미나도, 올리비아도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해 줬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알겠습니다, 공작님.”

“올리비아.”

“네, 알겠습니다.”

루미나의 정서를 지키기 위해 올리비아가 꿋꿋하게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인간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그가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어떤 잔혹한 발언을 할지 몰랐다.

중간에 말이 끊긴 루키우스가 불쾌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마님 앞에선 안 돼요!’

올리비아는 필사적으로 루미나를 눈짓했다.

그러자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대충 올리비아의 의도를 파악한 듯했다.

루키우스는 그녀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러면 저는 곧 다른 수업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볼게요.”

폴짝.

소파에서 내려온 루미나가 루키우스와 올리비아에게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섰을 때.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불렀다.

“루미나.”

“네?”

“사탕 먹고 가라.”

오늘 루미나는 자신을 위한 사탕을 하나도 먹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쫑쫑.

다시 돌아온 루미나가 사탕을 몇 개 집어서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었다.

“더 가져가라.”

“…….”

“더.”

“…….”

“더.”

루미나의 주머니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빵빵해졌다.

그런데도 루키우스는 영 만족하지 못하는 기색을 보여 루미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 ‘더’를 외치지 않았다.

루미나는 넘친 사탕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겨우 집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늦은 밤.

루미나는 카라얀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럴싸한 외모의 남성 모습을 한 브랜든과 만나서 지하 감옥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진짜 잠깐 대화만 할 거지?”

“그럼요.”

클라인 부인과 잠깐 대화를 나누겠다고 브랜든에게 따로 부탁했다.

‘아버님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단 말이지.’

다행히도 브랜든은 ‘아주 잠깐’이라는 조건을 달고 남들 몰래 지하 감옥을 개방해 줬다.

“그런데 꼬마 마님. 오늘 식사는 왜 걸렀어?”

“먹었는데요?”

“먹는 척만 했잖아.”

“……속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아버님한테는 비밀이에요. 알겠죠?”

이미 루키우스의 귀에도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루미나가 신신당부했다.

“그래. 내일부터라도 많이 먹고 다녀.”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만 브랜든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어줬다.

“아저씨. 저만 내려가도 될까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제가 클라인 부인을 풀어줄 리 없잖아요. 잠긴 문을 열 재주도 없고요. 그 점은 확실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소리야.”

브랜든이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가 꼬마 마님을 해코지할까 봐 내가 곁에 있으려고 했지.”

“……저요? 하지만 클라인 부인은 갇혀 있는데 어떻게 제게 해코지를 하겠어요?”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그리고 사람은 남을 꼭 신체적으로만 해치지 않지.”

“…….”

“혀 위로 노니는 언어가 칼날이 되어 마음을 벨 수 있는 거야.”

브랜든은 진심으로 루미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허점을 찔린 루미나가 순간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브랜든이 두 눈 딱 감고 루미나 혼자 내려가는 걸 허락해 줬다.

브랜든은 루미나의 유년시절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루미나가 어째서 홀로 노라 클라인과 대면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노라 클라인과는 꼭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해. 알겠지?”

“네!”

“문지기인 척 여기 서 있을 테니까 약속한 대로 빨리 다녀와.”

혼자 지하로 내려간 루미나는 창살 안에 갇힌 노라 클라인을 볼 수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빗겨져 있던 머리칼은 산발이 돼 있었다.

또한 그녀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분홍 드레스는 때가 타서 제 색을 잃어 꼴이 남루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너절해 보이게 만드는 건 뼈만 남은 듯 비쩍 마른 체구였다.

루미나는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가느다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앙상하지 않았다.

꼭 비대한 탐욕이 그녀의 육신을 집어삼켜버린 것 같았다.

노라 클라인이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러나 저를 찾아온 상대가 루미나인 걸 알고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부인. 아직도 제 어머니를 존경하세요?”

고요한 지하에 루미나의 목소리가 차분히 울렸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세요. 잠깐 미쳐서 눈이 멀었다고 말이에요.”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쯤 공작부인이라고 불리며 공작님의 사랑을 받았을 거다.”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가 전부 루미나 탓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더 이상 루미나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친절의 가면을 벗은 것이다.

“묘약은 가짜였어요.”

“아니, 그건 진짜였어. 널리 퍼지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가짜라고 말했을 거야.”

노라 클라인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속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루미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적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거울을 보지 않았나요? 비쩍 마른 스스로를 보면서 느낀 게 정말로 없나요?”

“이보다 더한 고난도 넘긴 적 있는데 그럴 리가.”

“설마…….”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루미나는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남편을 죽인 거예요? 나중에 아버님과 재혼하려고?”

푸하하-.

노라가 미친 사람처럼 박장대소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라고 살인까지 저지른 거예요?! 아버님과 진솔한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있나요? 아니, 아버님이 당신이 누군지도 모를 만큼 접점이 없었잖아요.”

한참을 웃던 노라가 웃음을 뚝 멈추고 말했다.

“사랑에 거창한 이유를 덧붙이는 건 어린아이나 하는 짓이지. 그분을 보자마자 첫눈에 알 수 있었단다.”

“…….”

“평생 그리던 이상형이라는 걸.”

루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저 타이밍이 좋지 못했을 뿐이야. 원래 아이리스가 아닌 내가 차지해야 할 자리였는데…….”

노라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아이리스는 영악한 계집이었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악랄했어. 날 비참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공작님께 접근한 게 분명해.”

“왜 본인의 사랑만 진심이라고 믿는지는 둘째 치고, 순진한 척하면서 못된 짓을 일삼는 건 제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니, 클로이 님은 달랐어. 남의 불행을 즐기는 그 못된 계집과는 다르다고.”

“고인을 모욕하지 마세요.”

루미나는 공작부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쉽게 폄하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네가 아이리스를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란다. 누구보다 공작님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애였어.”

“…….”

“나는 그 결혼이 잘못됐다는 걸 확신했지. 나였다면 그 악독한 애처럼 굴지 않았을 텐데.”

노라가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듯 과장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공작님께서는 왜 그 여자를 택한 거지? 그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단다. 묘약을 썼기 때문이겠지!”

예법 교사인 그녀와 한때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오랜 기간 망상증을 앓았으면서 정상인인 척, 연기한 것이다.

“다행히 일찍 죽었지만, 그 애가 쓴 묘약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공작님께서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묘약과는 상관없어요. 부인께서 언제, 어떤 얼굴로 아버님을 만났든 상관없이 아버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순간 노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깐깐하던 그녀의 인상이 단번에 악독해졌다.

“너 또한 그 묘약을 썼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거지?”

노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살에 바짝 얼굴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라벨의 티파티에서 영애들이 사랑의 묘약을 쓴 게 아니냐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발 없는 말만큼 빠른 게 없다고, 그 얘기가 어린 영애들의 입을 통해 어른들의 귀에도 닿은 듯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노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네가 어린 나이에 공자비가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확신했단다.”

“…….”

“역시 클로이 님의 딸이라는 걸.”

노라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나와 같지.”

“……달라.”

“다르지 않아. 네 어머니가 사랑을 쟁취했기에 그 증거로 네가 존재하는 거니까. 핏줄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루미나는 끔찍한 저주를 들은 것처럼 심장이 옥죄이는 걸 느꼈다.

“……그럴 거면 낳지 말지 그랬어.”

자그맣던 루미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누가 낳아 달래? 마음대로 낳아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닮지 않았다면서 날 꾸짖었잖아!”

결국 감정이 북받친 루미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차 싶었지만 떨리는 입술은 이미 진심을 쏟아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엄마를 사랑해?”

“…….”

“난, 나는…….”

엄마의 감정을 버릴 쓰레기통이 아니야.

루미나는 노라 클라인이 정신을 차리기 바랐다.

결코 쌍방이 될 수 없는 사랑을 하던 어머니가 죽기 직전에도 남을 원망만 하던 모습을 지켜봤다.

아마 어머니는 자신이 동화 속 마녀 역할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으리라.

진실한 사랑으로 가는 장애물이 아닌 영혼의 반쪽을 기다리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겠지.

루미나는 노라 클라인을 통해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비춰보게 됐다.

그래서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동정했다.

굳이 그녀를 찾아온 것도 자그마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어쩌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루미나가 가만히 서 있는 사이 노라는 창살 사이로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얘기를 하면서 제게 가까이 다가온 루미나를 잡아채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어?’

누군가가 루미나의 허리를 잡아채서 뒤로 당겼다. 힘에 밀린 작은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검은 손이 창살 밖으로 나온 노라의 손을 낚아채고, 으스러뜨릴 듯이 힘을 줬다.

“으아아악!”

노라의 비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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