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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77)화 (77/152)

손이 꺾인 노라는 핏발이 선 눈으로 제 손을 붙잡은 사람을 쳐다봤다.

“고, 공작님!”

평소처럼 검은 정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루키우스가 노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낭만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노라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물론 그것도 잠깐이었다.

“으으윽!”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앞에서 도취된 사랑은 고개를 숙이게 됐다.

노라는 루키우스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 준다는 행복감을 잊게 됐다.

“아파, 아파, 아파!”

울상을 지은 노라가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로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입매는 일자로 굳어 있었으며 턱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꼭 눈을 보지 않더라도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혼자서 처리할 생각 마시죠.”

루미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소년.

카라얀이 삐딱하게 말했다.

“인간은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정작 아들의 말버릇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루키우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여전히 노라의 손을 잡은 채로 루미나를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카라얀이 루미나를 보호하듯이 제 뒤편으로 숨겼다.

루미나가 충분히 가려지긴 했지만 루키우스의 눈에는 귀여운 소꿉장난처럼 보였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내 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카라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했다.

“어째서?”

“같이 처리하고 싶으면 가까이 다가와야지.”

“굳이 같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러면 내가 다 끝내기 전이라고 말해 두지.”

카라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루키우스에게로 다가갔다.

덩그러니 남은 루미나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작은 마님!”

“……올리비아?”

분명 그들 몰래 지하로 내려왔는데.

브랜든이 망을 봐준다고 했는데.

어째서 하트 부자뿐만 아니라 올리비아까지 있는 걸까.

“손 좀 봐. 떨고 계시잖아.”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노라와 대화하던 도중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뿐인데 올리비아가 안쓰럽다는 듯이 루미나를 바라보고는 꼭 안아줬다.

“괜찮아요, 괜찮아.”

루미나는 원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루미나가 큰일을 당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올리비아가 루미나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

순간 목구멍에 돌멩이를 쑤셔 넣은 것처럼 루미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공작님. 작은 마님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금방 처리하고 따라가지.”

루미나는 올리비아를 따라서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를 나오자 문지기인 척 서 있는 브랜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브랜든이 짐짓 모른 체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루미나는 브랜든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브랜든이 제게 보인 호의는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브랜든과의 유착 관계를 들키면 안 되기에 루미나는 그를 못 본 체했다.

그리고 올리비아와 함께 방으로 갔다.

“그런데 올리비아. 왜 이 시간에 거기 있었던 거야?”

“사랑의 묘약 건으로 오후 내내 바빠서 그 여자를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었어요. 뒤늦게 떠올리고는 지하 옥사로 갔는데 마침 공자님과 마주치게 됐죠.”

그러니까 타이밍이 좋지 못했던 거다.

“공자님께서는 작은 마님이 나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돼서 나왔다고 하셨어요.”

자는 걸 확인하고 살금살금 나왔는데 그걸 또 눈치챘나 보다.

여러모로 낭패였다.

루미나는 고개를 들어서 올리비아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루미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마치 노라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들었어?”

“제가 무거운 입 하나로 지금껏 공작님을 보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대화를 들었던 거다.

“언제부터 들은 거야?”

“공작부인을 모독할 때부터요.”

루미나는 제 이마를 팍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정도면 거의 다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작은 마님. 잠깐 기다려주세요.”

루미나를 침실로 데려다주고 사라진 올리비아가 금세 돌아왔다.

그녀는 루미나에게 따듯한 우유를 내밀었다.

루미나는 머그컵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한 끼도 드시지 않았잖아요. 이대로 자면 몸이 많이 상할 거예요. 한 입이라도 드세요.”

올리비아마저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전부 알고 있는 거다.

“오늘 못 먹은 것만큼 내일 많이 먹을게!”

애써 발랄하게 외쳐 봤지만 올리비아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갑자기 식사를 거르시는 거예요? 저한테만 살짝 귀띔해 주세요.”

루미나가 머뭇거렸다.

“제게 많이 의지하셨잖아요. 네? 조금만 힌트를 주셔도 좋아요.”

“……올리비아는 그 사람이 늦은 밤에 주방으로 갔다가 하녀한테 걸린 사실을 알고 있지?”

“네. 보고를 들었어요.”

“그때 그 사람이 음식에 독을 넣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알아.”

루미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아버님한테 물약을 먹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아마 아버님의 잔이 어떤 것인지 생김새를 확인하려고 몰래 잠입했겠지.”

알고 있는데도 음식을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전생에 조제프가 음식에 독을 탔던 후유증이었다. 한번 의심을 하게 되니 망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단순히 내 마음의 문제니까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식사할 거야. 괜히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

금방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고 확신한 루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받아들인 언어의 무게는 루미나와 같지 않았다.

“……올리비아. 울어?”

“못된 사람들. 독도 쓴 거예요? 얼마나 모질게 굴었으면 그런…….”

올리비아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올리비아는 내 전생을 모르니까.’

친모나 계모 혹은 친부가 독을 썼다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엄마를 사랑해?”

그런 말까지 듣게 됐다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조제프 외숙부는 아직 독을 쓴 적 없으니까 굳이 정정하진 말아야지.’

다만 너무 적나라한 속내를 들켜버려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올리비아, 울지 마! 내가 우유 다 마셔줄 테니까 뚝해, 뚝!”

“마시지 마세요!”

올리비아가 머그컵을 빼앗았다.

마시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애초에 마시라고 갖고 온 것 아니었나.

트라우마가 악화될까 봐 염려돼 머그컵을 뒤로 숨겼다는 걸 눈치챔과 동시에 푸시시 웃음이 나왔다.

루미나는 소매로 올리비아의 눈물을 닦아줬다. 옷자락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다.

“올리비아. 코도 흥 할래?”

“……됐어요.”

한참 울다가 진정이 됐는지 올리비아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루미나의 뒤편을 힐끔 쳐다봤다.

무언가 있음을 눈치챈 루미나가 고개를 돌려보니 하트 부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저들은 또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두 사람 다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이었다.

‘노라 클라인이 공작부인을 험담할 때부터 들었다고 했지. 그러면 쉽게 화가 풀릴 리 없지.’

루미나는 어째서 자신이 야심한 시각에 노라 클라인과 만남을 가졌는지 변명할 필요를 느꼈다.

브랜든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주긴 할 테지만 루키우스와 카라얀은 당장 의문이 들 거다.

어쩌면 그 못된 노라와 한패를 먹고 밀담을 나눴을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 여자가 나한테 자기와 같다고 했으니까.’

꼭 연기가 아니어도 루미나는 절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게 됐다.

“많이 속상하셨죠? 제가 오늘 그냥 자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지 뭐예요! 문지기 아저씨를 졸라서 지하로 내려가긴 했는데 부인께서 그런 식으로 고인을 비하할 줄 몰랐어요…….”

아, 혀 씹을 뻔했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질수록 루미나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게다가 지금 루키우스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목소리가 절로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살금살금 눈치를 보게 됐다.

“루미나.”

“네, 네!”

빠르게 대답한 루미나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루키우스가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그의 구두코가 보였다.

루미나는 움츠러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

루키우스가 자신의 선글라스를 루미나에게 씌워준 것이다.

‘뭐, 뭐지. 앞을 보지 말라는 건가.’

“오늘 내가 준 사탕은?”

“네?”

“사탕은 어떻게 했지?”

“외출복 주머니에 있어요.”

힐끔.

루미나가 드레스룸이 있는 방향을 곁눈질했다.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있는데 루키우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막대 사탕이었다.

‘대체 평소에 사탕을 얼마나 들고 다니는 거야?’

브랜든이 이미 나서서 해명해 준 건가? 그래서 혼내는 대신 챙겨주려는 건가 싶었다.

오늘 낮에 주머니 가득 사탕을 줬는데도 불만스러워했던 걸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루미나는 미리 손을 내밀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루키우스가 꺼낸 막대 사탕을 본인 입에 넣었기 때문이다.

“……?”

아. 사탕을 먹고 싶었구나.

헛물을 들이켠 루미나는 쑥스러워졌다. 뺨에 살짝 열이 올랐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다.”

뭐지? 사탕 자랑을 하는 건가?

루미나만 루키우스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카라얀 또한 ‘뭐 하는 레기온이지?’ 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버지에 대한 혐오가 깊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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