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먹어라.”
루키우스는 그런 카라얀에게 막대 사탕을 줬다.
싫다고 거부하려던 카라얀은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조용히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그 다음은 올리비아한테 줬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올리비아 또한 사탕을 받아서 입에 쏙 넣었다.
세 사람이 늦은 밤에 옹기종기 모여서 막대 사탕을 우물거리게 됐다.
“루미나.”
루키우스는 마지막으로 루미나를 불렀다. 그리고 딱 한 개의 사탕을 줬다.
루미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평소보다 과하게 사탕을 챙겨준 이유가 있었구나.’
식사를 거르는 걸 알고 사탕이라도 먹으라고 준 것이었다.
‘아버지’인 루키우스는 자식을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또한 과하게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카라얀과의 사이가 완전히 어긋났으니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의 방식인 거다.
‘선글라스를 씌워준 것도…….’
아마 울었다고 생각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려준 것이겠지.
루미나는 막대 사탕을 내려다봤다.
전생에 잔뜩 먹어서 질린 탓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딸기 맛 사탕이었다.
‘아버님은 이런 맛 사탕만 들고 다녀.’
루미나의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루키우스가 말했다.
“싫으면 도로 줘라. 내가 두 개 먹으면 되니까.”
“아뇨. 제가 먹을 거예요.”
빠르게 포장을 깐 루미나가 다들 그랬던 것처럼 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몇백 번이나 먹어서 잔뜩 질렸다고 생각한 사탕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따라 훨씬 달콤하게 느껴졌다.
***
노라 클라인은 친족 살해, 불법 약물 거래, 공작 암살 시도 등등의 죄목으로 가중 처벌을 받게 됐다.
본인의 죄는 한 남자를 사랑한 것밖에 없다고 외칠 것만 같던 그녀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제 죄를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
루미나는 지하 감옥에서 나와 마차로 운송되던 노라 클라인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얼핏 봐도 미친 것 같은 꼴을 한 그녀는 루키우스를 보자마자 움츠러들었다.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자와 마주쳤을 때 흔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내가 올리비아를 따라서 지상으로 올라가 있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봐.’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홀로 키워온 집착이었다.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만 같던 감정이 하룻밤 만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이다.
루미나는 루키우스와 카라얀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평생 모르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클라인 가의 재산과 작위는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재산의 일부는 저희에게 배상했으며 당사자는 약에 중독되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더군요.”
“…….”
“짧게 남은 인생을 평생 감옥에서 지낼 테니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겁니다.”
올리비아가 사무적인 어조로 보고했다.
제 방처럼 집무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은 루미나는 쿠키를 냠냠 먹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물약은 어떻게 했지?”
“당장 시중에 풀린 물량을 입수했으며 나머지도 차차 수거될 겁니다.”
“…….”
“그리고 당장 수거한 것들은 곧 인부들이 들고 올 겁니다. 고문 도구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해 기대가 되네요.”
호로록.
차로 입가심을 한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 예법 선생님은 새로 구하지 않는 건가요?”
“흠. 꼭 구할 필요가 있나?”
엄청난 일이 있었다 보니 루키우스는 교사를 더 들이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듯했다.
“공작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작은 마님은 이미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니 꼭 개인 교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죠.”
올리비아까지 거들었다.
너무 완벽하면 의심받을까 봐 설렁설렁 예법 수업을 들었던 루미나로서는 머쓱해지는 칭찬이었다.
“요즘 수업을 듣느라 바빠서 나를 찾아오지 않던데 잘됐군. 수업이 하나 줄었으니 그 시간에 날 만나러 오면 될 테지.”
“그거 좋네요. 작은 마님 전용 의자를 놓는 건 어떨까요?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으세요?”
“……아니. 괜찮아.”
대체 얼마나 앉혀놓으려고 전용 의자까지 준비하려는 건지.
루미나는 지금 앉아 있는 소파로도 충분했다.
“그래요. 정 앉고 싶다면 공작님 무릎 위에 앉으면 되죠.”
올리비아가 멋대로 상사의 무릎을 고급 의자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 무릎도 있고요!”라고 외치는데 루키우스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리비아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릎 위에 앉혀놓고 동화책도 읽어 줄 수 있다.”
“……?”
그런 악취미는 없는데요…….
이해 못 할 루키우스의 발언으로 차게 식은 눈빛을 한 루미나가 다과를 깔끔히 해치운 후.
곧이어 인부들이 상자를 잔뜩 들고 왔다.
루미나는 그것을 관심 있게 쳐다봤다.
“와, 이게 다 사랑의 묘약이에요? 구경해도 되나요?”
“그래. 배고프다고 마시지만 말아라.”
먹보 취급!
루미나가 살짝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상자 안을 살펴봤다.
섬세하게 세공된 하트 모양의 유리병이 상자 안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대부분 붉은색이었는데, 푸른색도 일부 있었다.
“모두 한 사람이 만든 건가요?”
“아니. 제작자 수가 제법 되었지. 다들 연고 없는 이들이었어.”
“그런데 묘약을 담은 유리병의 모양새가 다 같네요?”
이상하다고 느낀 루미나가 끌리는 대로 아무 묘약이나 들었다.
그런데 어느새 루미나의 뒤로 온 루키우스가 그 약병을 빼앗아갔다.
‘먹으려고 안 했는데!’
잔뜩 억울해진 루미나가 루키우스를 홱 돌아봤다.
루키우스는 루미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들고 있는 유리병에 붉은 마력을 둘렀다.
그 순간 붉은 액체가 반짝였다.
“올리비아. 묘약에 불완전하지만 흑마법이 사용됐다.”
“네? 그럴 리가. 묘약 제작자를 전부 찾아냈는데 그중 흑마법과 관련된 인물은 없었습니다.”
올리비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루미나. 어째서 유리병 모양이 모두 같은지 궁금하다고 했지.”
“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거라면 아무 병이나 싼값에 구해서 넣어 팔면 되잖아요.”
“그렇지.”
“아, 근데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잠깐만요!”
루미나가 팔짱을 끼고 ‘으음’ 하고 잠깐 고민했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생긴 병에 담긴 액체가 무조건 사랑의 묘약이라는 인식을 주려는 게 아닌 이상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 답을 찾은 루미나를 칭찬하듯, 루키우스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할 만한 자는 딱 한 명밖에 없지.”
“박사.”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박사라면…….’
결코 만나서는 안 된다고 브랜든이 신신당부했던 자였다. 레기온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었다.
“제작자들이 모두 같은 진술을 했죠. 묘약을 제조하는 데 단서를 준 자를 우연히 만났다고요.”
“…….”
“하지만 그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다들 모르더군요. 나이, 성별, 말투 등에 대한 진술이 각각 다른 걸 보면 처음부터 추적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전생에서 루미나가 만난 묘약 제작자도 묘약 재료를 알려준 기연이 있다며 떵떵거렸다.
그 사람 혼자만 기연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간 꼬리를 말고 숨어 지내는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움직였던 건가.”
루키우스가 동굴처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는 레기온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 조종하려고 실험을 하려 드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는 으스러뜨릴 듯, 유리병을 힘주어 잡았다.
“뭐가 됐든 상관없지. 흔적을 남기고 다니면 추적이 쉬워지니까. 올리비아. 이 병의 제작자를 찾아라.”
“네, 알겠습니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 그 목을 비틀어버리겠다고 맹세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야지.”
루키우스의 말투에서는 평소와 달리 조소와 혐오 그리고 희열이 느껴졌다.
***
뎅-. 뎅-. 뎅-.
정오를 알리는 엄숙한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지면서 수업을 끝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오전 수업을 끝낸 네쥬로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걸어갔다.
그중 엔디미온이 있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엔디미온은 혼자였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한쪽 옆구리에 끼워진 두툼한 하드커버 서적.
깃털 펜과 잉크를 보관한 소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엔디미온이 짤막한 다리를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중이었다.
툭-.
옆에 지나가던 누군가가 엔디미온의 어깨를 거세게 치고 지나갔다.
순간 휘청거린 엔디미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무슨 냄새야. 평민 특유의 천박한 악취가 여기까지 풍기는군.”
엔디미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년이 엔디미온과 부딪친 어깨를 손으로 털며 중얼거렸다.
벨로메 후작 가문의 차남 그레고리.
그는 대놓고 엔디미온의 태생을 비웃었다.
“아, 이게 누구야. 밤마다 곰 인형을 붙잡고 엄마를 찾는 마마보이 아닌가.”
“…….”
“왜?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해? 내가 일으켜주길 바란다면 ‘엄마, 보고 싶어요’ 하면서 질질 짜 봐. 네가 매일 밤마다 잘하는 짓이잖아.”
그레고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엔디미온이 손바닥을 털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필기구부터 덤덤하게 챙겼다. 그레고리의 도발을 무시로 일관한 것이다.
저보다 어린 엔디미온한테 외면당한 그레고리가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대상을 바꿨다.
“아, 그래. 엄마는 죽어서 이제 누이를 대신 찾는 건가?”
비열하게 이죽거린 그레고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특징 없는 하얀 편지 봉투였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봤다.
자신이 루미나에게 보내려 한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