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어째서 그레고리의 손에 있는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레고리가 제 하수인처럼 뒤편에 세워놓은 학생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기숙사 룸메이트, 호세였다.
비쩍 마르고 키만 쭉정이처럼 큰 호세는 덜덜 떨면서 다급히 눈을 피했다.
소심한 편이라 평소 엔디미온과 마주할 때도 당당하지 못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찔리는 게 있는 사람 같았다.
엔디미온은 깨달았다.
그가 편지를 빼돌려서 그레고리한테 건네준 것을. 곰 인형 얘기 또한 호세가 그레고리한테 들려줬을 거다.
“열어볼까. 보나마나 징징대는 말이 적혀 있겠지. 누나, 보고 싶어요. 징징. 아카데미 생활 힘들어요. 징징.”
그레고리가 편지 봉투를 흔들면서 빈정거렸다.
“무슨 일이야?”
“싸우나 봐.”
“쟤는 편입생인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나고 식당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오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엔디미온과 그레고리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그중 그레고리를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교수를 부르러 간 사람도 없었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테니 하나둘 모여들어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구경꾼이 늘어나는 게 만족스러웠는지 씨익 웃은 그레고리가 엔디미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그래. 네 이복누이는 널 경멸하려나? 그럴 만도 하지. 네게 모든 걸 빼앗겼으니까.”
어디서 랑슈스 가의 내부 사정을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루미나를 언급하자 무심했던 엔디미온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심지어 그 끔찍한 레기온이 사는 하트 공작가에 팔려갔다지? 너랑 사느니 차라리 그 괴물과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엔디미온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엔디미온은 더는 그레고리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뒤로 밀었다.
“윽!”
그동안 엔디미온이 잠자코 있던 탓에 방심하고 있던 그레고리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비열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쳐 봐!”
교내에서 폭력은 금지돼 있었다.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면 경우에 따라 정학을 받거나 사안이 심각할 때는 퇴학이었다.
그레고리는 엔디미온이 둘 중 어떤 처벌을 받아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퇴학 쪽을 원하지만.’
홀로 인생을 달관한 것처럼 구는 이 망할 꼬맹이를 눈앞에서 치울 수 있다면 뺨 한쪽 정도는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어차피 저 녀석한테는 이 아카데미가 유배지나 마찬가지일 테니 도와줄 뒷배도 없겠지.’
엔디미온은 입학 전에 이복누이인 루미나와 친근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입학 후에는 루미나가 자주 편지를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그레고리 님의 눈은 속일 수 없지.’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해서 다정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
이리저리 수집한 소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게 이상한 가정환경이었다.
그레고리는 루미나가 착한 척하면서 아카데미로 엔디미온을 쫓아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칠 수 있으면 쳐보라니까? 주먹을 들 용기도 없는 건가?”
그레고리가 남들이 듣지 못할 목소리로 엔디미온을 도발했다.
항상 무표정했던 엔디미온의 얼굴에 분노가 새겨졌다.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후려칠 것만 같았다.
그레고리가 루미나를 언급한 순간부터 더는 냉정한 사고를 이어갈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쓰러지면서 흘린 소지품으로 손을 뻗었다.
그중 필통에서 삐져나온 뾰족한 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 펜으로 목을 찌르면 즉사할 거다. 그리고 잘못 찌르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테지.
‘하지만 안 돼.’
엔디미온의 이성을 휘발시킨 주제가 루미나였다면 억제력을 갖게 한 사람 또한 루미나였다.
‘편입 시험 결과보다 더욱 완벽한 성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어.’
편입 시험에서 문제 하나를 틀렸다.
그러니 완전무결하게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루미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거다.
루미나가 들었다면 ‘대체 그런 약속은 언제 했어? 그보다 엔디미온……. 아니다.’라고 했을 법했다.
엔디미온이 어린애답게 굴었으면 하는 루미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엔디미온은 그저 마음을 다잡았다.
펜을 쥐려던 그의 손이 살짝 빗겨 갔다.
그리고 다른 걸 집어 들었다.
검은색 유리병이었다.
크기가 작긴 했으나 저걸로 머리를 후려치면 뺨 맞는 정도로 아프지 않을 터.
그레고리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뭐 하는……. 윽!”
엔디미온이 더는 지체하지 않고 병을 휘둘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레고리는 아픔과는 사뭇 다른 걸 느꼈다.
‘……차갑잖아?’
물을 끼얹은 것처럼 축축했다.
다시 눈을 뜬 그레고리는 그제야 엔디미온이 집어 든 유리병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잉크병이었다.
뚜껑을 열어 남김없이 자신한테 흩뿌린 것이다.
그레고리는 단숨에 잉크를 뒤집어쓴 남루한 꼴이 되었다.
“누님께서 제게 입학 기념으로 준 선물입니다.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죠.”
무뚝뚝한 엔디미온의 설명을 들으며 그레고리가 다급히 손등으로 뺨을 벅벅 닦았다.
그러나 잉크가 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번지면서 검은 부위가 넓어졌다.
“저것 봐.”
큭큭거리는 구경꾼들의 비웃음 소리가 그레고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엔-디-미-온-!”
까만 얼룩 사이로 얼굴이 군데군데 벌겋게 달아오른 그레고리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가 이 일을 교수한테 말하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교내에 분란을 일으킨 죄로…….”
“우연히 부딪쳐서 잉크를 쏟은 일 말입니까? 그런 사소한 실수를 처벌하다니요. 그렇게 엄한 학칙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처럼 엔디미온 또한 뻔뻔하게 나갔다.
그레고리가 할 말을 잃자 “그럼.”이라고 말한 엔디미온은 깔끔한 행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고리의 패배로 싸움이 끝나자 구경꾼들도 빠르게 흩어졌다.
씩씩대는 그레고리를 뒤로하고 엔디미온이 향한 곳은 식당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라 사서마저도 잠깐 자리를 비운 도서관.
아무도 없어 고요만이 남았기에 엔디미온은 아까부터 자꾸 자신의 뒤를 밟는 자를 금방 눈치챘다.
기숙사 룸메이트이자 편지 도둑인 호세였다.
“에, 엔디미온. 미안해…….”
네쥬로 아카데미는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권장하는 입학 적정 나이가 따로 있었다.
12-13세로, 그 나이 또래의 똑똑한 아이면 충분히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 아카데미 측 의견이었다.
실제로 1학년들 대다수가 그 나이 때 입학했다.
아닌 경우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엔디미온이 아카데미 학생 중 최연소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호세 또한 엔디미온보다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덩치만 컸지, 하는 행동은 엔디미온만큼 의젓하지 못했다.
“그레고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바지를 벗긴 채로 여학생 기숙사에 밀어 넣는다고 했어.”
“…….”
“알잖아. 그레고리가 한다면 하는 애인 걸.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된다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호세는 심약해서 그레고리가 휘두르기 딱 좋은 유형이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책장을 쭉 둘러보던 엔디미온이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호세를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나 이곳이 도서관임을 의식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저가 없는 어투라 호세는 뜨끔했다.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성정 또한 다른 건 당연한 일이죠. 힘에 굴복하여 강자에게 바짝 엎드리는 것도 한 가지 생존 방법임을 존중합니다.”
호세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말로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나을 만큼 수치스러워졌다.
하지만 천성이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주섬주섬 변명을 내뱉었다.
“그레고리는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교수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데다 수석을 놓칠 위기라 심술이 난 거야.”
“…….”
“너만 없으면 수석이 될 수 있다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그런 얘기는 굳이 제게 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뒷담을 하는 모양새라는 걸 인식한 호세가 또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차, 찾는 책이 있다면 내게 말해! 도서 위원이니까 금방 찾아줄 수 있을 거야.”
제 딴에는 호의를 베푸는 듯했다.
엔디미온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카데미 학생이 된 이후로 드넓은 도서관을 꼬박꼬박 방문했다.
그러나 원하는 책을 찾지 못했기에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침묵을 깨뜨렸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으응?”
호세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엔디미온을 쳐다봤다.
“질문을 정정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기술한 책이 존재합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편입할 만큼 똑똑한 엔디미온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허무맹랑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호세는 엔디미온이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런 농담을 할 성격이 아닐뿐더러 아직 어린 소년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