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건 흑마법으로나 할 법한 일이잖아.”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그대로 꺼낸 호세가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흑마법은 금기인데 지금 무슨 얘기를. 이러니까 꼭 엔디미온이 흑마법에 가담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호세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귀는 없었다.
호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법이라. 역시 그렇겠군요.”
그렇지만 엔디미온이 진지한 태도로 긍정하자 심약한 호세는 또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흐, 흑마법은 불법이잖아. 잘못 언급하면 잡혀가…….”
“알고 있습니다.”
무신경한 대답이었다.
호세는 엔디미온이 앞으로 흑마법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엔디미온은 겁쟁이인 자신과 달랐으니까.
“있잖아. 왜 그런 책을 찾는 거야?”
“제가 목도한 광경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책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게 잘못된 방향인 것 같군요.”
“대체 뭘 봤길래?”
엔디미온은 호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루미나의 친모인 클로이와 대면한 적 없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재혼한 직후 랑슈스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클로이의 초상화를 봤다.
친모가 그녀를 끔찍이 싫어했으므로 창고 한구석에 박혀 있던 초상화.
한 번 보고 잊었던 그것을 다시금 상기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당장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말의 울음소리.
그리고 뒤집힌 세상.
전복된 마차에서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엔디미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리고 최후의 사자(死者)가 될 것이었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솨아아-.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적셨다.
그의 다리는 무너진 마차에 깔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다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잊히며 엔디미온은 점차 꺼져가는 생명의 소리만을 들었다.
그때, 엔디미온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력을 잃은 엔디미온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저를 감싸는 따스한 손길을 느끼고 살며시 눈을 떴을 때는 얼핏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초상화 속 여자와 소름 끼치도록 닮은 그 얼굴이.
클로이.
그녀였다.
엔디미온은 상념에서 벗어나 살며시 눈을 떴다.
“아니면 복제한 것처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도플갱어 같은.”
“그, 그것도 흑마법…….”
“결국 답은 흑마법이군요.”
“안 돼! 흑마법을 연구하는 건 퇴학으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적극적으로 흑마법을 연구하겠다고 한 적도 없건만 호세가 벌벌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엔디미온은 딴생각을 했다.
‘누님의 외모는 친모에게 물려받았지.’
그러나 마차 사고 당시 목격한 여자가 루미나일 리는 없었다.
첫 번째. 당시 루미나는 저택에 있었다. 이는 확실했다.
두 번째. 환영일지 흑마법의 잔재일지 모를 존재는 다 큰 성인이었다.
결혼 생활 중 그린 듯한 초상화가 밖으로 나왔다고 착각할 것처럼.
마차 사고 이후 엔디미온은 루미나가 신경 쓰였다.
공교롭게도 바뀐 그녀의 태도도 태도지만, 자신을 살려준 여자와 닮은 외모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쩌면 황실의 금지된 서고라면 네가 찾는 얘기가 적힌 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거기에 금서가 모여 있으니까.”
엔디미온이 호세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란 호세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하, 하지만 황제 폐하의 인가를 받아야 해. 그러니까 포기하는 게 좋아.”
순리대로였다면 그날 엔디미온은 부모와 함께 숨이 멎었어야 했다.
그러니 그 존재가 정녕 흑마법의 부산물이라면 엔디미온의 삶 자체가 금기였다.
“황제의 인가.”
엔디미온이 진지하게 되뇌었다. 의문을 해결하려면 어떻게든 황족과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설마 진짜로 폐하를…….”
“오늘 대화에서 먼저 흑마법을 언급한 건 그쪽입니다. 제게 흑마법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 또한 그쪽이고요.”
힉!
겁 많은 호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니 오늘 나눈 대화는 함구하길 바랍니다.”
끄덕끄덕.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호세는 엔디미온이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
당연했다. 룸메이트건만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호세라고 불러. 우, 우린 동급생이니까 말도 놔. 그런데 내가 네 룸메이트인 건 알지?”
“압니다.”
평소와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도둑질을 한 일로 양심이 찔린 호세가 외쳤다.
“앞으로 안 그럴게!”
“…….”
“그레고리가 시키는 대로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거 말이야. 다신 그러지 않을게…….”
“네.”
엔디미온은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한편 잉크를 뒤집어쓴 그레고리는 피부가 벗겨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박박 씻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이 호언장담했던 대로 잉크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장장 일주일 동안.
“쟤 봐, 쟤.”
“요즘 얼룩이무늬가 유행이었나?”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일주일 내내 그런 비웃음을 들은 그레고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게다가 이 일로 ‘점박이 그레고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화가 잔뜩 난 그레고리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엔디미온을 괴롭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 없었다.
심지어 불시에 치른 쪽지 시험에서 엔디미온 혼자 만점을 받으며 그레고리는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런 그레고리를 피해 루미나에게 편지를 보낸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얼마 후 엔디미온은 답신과 함께 선물을 잔뜩 받게 됐다.
자그마한 보석이 박혀 있는 값비싼 필기구와 사탕 한가득. 그리고 손 한 뼘은 될 법한 두툼한 법전.
언뜻 동생의 공부를 격려하는 누이의 태도 같았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큭.
메모를 본 순간 엔디미온이 웃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사치품 선물을 제한했다.
때문에 루미나는 당장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전한 것이다.
엔디미온은 가장 먼저 두 손으로 법전을 들고 붕붕 휘둘러봤다.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를 듣고 호세가 이불 속으로 숨은 건 덤이었다.
루미나의 우리 애 기 살리기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
평소와 같이 평화로운 날이었다.
예법 수업 외에도 루미나가 듣던 수업이 몇 가지 있었다.
이름이 ‘카’로 시작하는 누구누구와 달리 성실한 학생인 루미나는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반백수가 됐다.
루미나가 우수한 학생인 것도 있었지만, 취미나 마찬가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터벅, 터벅.
루미나는 한가하게 복도를 거닐었다.
그때, 사각지대에서 팔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루미나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겼다.
“읍……!”
비명을 지르려던 루미나의 입을 거대한 손이 틀어막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루미나의 귓가에 그가 속삭였다.
“진정해. 나야, 나.”
“아저씨!”
입을 막던 손이 치워지고,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브랜든이었다.
“요즘 바빠서 하녀 변장을 할 여유도 없었어.”
“그 박사라는 사람 때문이죠?”
브랜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쪽으로 혹사당하는 중이었다.
“오늘 네게 전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각각 하나씩 있어. 뭐부터 듣고 싶어?”
“나쁜 소식부터 들을래요.”
일단 나쁜 소식으로 기분을 상하게 한 후 좋은 소식을 듣고 회복하는 거다.
치밀한 계략하에 루미나가 선택했다.
“나쁜 소식은 말이야, 아무리 봐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재차 검증 과정을 거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대. 그런데 내가 들어도 그럴 만하더라.”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서론이 길었다.
“네 몸에서 나온 꽃 말이야.”
“네.”
죽을병이라도 되나?
아니면 불치병?
정말 나쁜 소식이라면 그런 것밖에 없었다. 루미나가 은근히 긴장했다.
“그게 마석이래.”
“엥?”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별거 아니라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에테르가 담긴 거예요? 돌덩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꽃처럼 보이던데.”
“일단 마석과 성분이 같아.”
“그게 왜 나쁜 소식이에요?”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평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레기온들한테도 절대 체내에서 나올 수 없는 물건이니까 나쁜 소식이지.”
마석은 자연 광물로도 존재하지만 보통 마물에게서 구할 수 있었다.
마물에게 마석이란 핵(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석 안에 든 에테르로, 아주 귀중한 자원이었다.
상급 마물일수록 품고 있는 에테르의 양이 많았다.
레기온의 임무는 마물을 토벌해 마석을 수거하는 것.
마석 외에 마물의 쓰임새는 없었다.
“아뇨, 좋은 소식이죠.”
“왜?”
“그걸 팔면 되잖아요!”
“뭐?”
“에테르가 있다면서요. 그러면 못해도 마차 한 대 살 돈은 나오잖아요. 초기 자금을 충당할 수 있겠네요.”
비자금으로 딱 좋았다.
돈이라고 생각하니 의사가 가져간 것도 빼앗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몇 개 더 뱉어내고 싶기도 하고.
갑자기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신세가 된 루미나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브랜든은 당혹스러웠다.
“아직 어린 애가 무슨 돈을 그렇게 밝혀. 너는 네 몸 걱정은 안 돼?”
“돈을 밝히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을 한 거예요. 그리고 마석 뱉고도 지금 멀쩡하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생명체는 심장을 빼내면 죽는다.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루미나가 마물이었다면 그걸 뱉어낸 즉시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루미나의 심장은 아주 잘 뛰고 있었다.
‘에리카가 만능도 아니고 내 몸에서 어떻게 이런 게 나왔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을 리 없지.’
그렇다면 당장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게 옳았다.
그게 바로 꽃을 현금화하는 거였다.
“그러면 좋은 소식은 뭐예요?”
나쁜 소식이 이렇게 반가운데 좋은 소식은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