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81)화 (81/152)

“좋은 소식은 이거야. 네가 저번에 에리카한테 만들어 달라고 한 약.”

루미나는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관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야?”

“궁금해요?”

“응.”

끄덕, 끄덕!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브랜든을 보며 루미나가 씨익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과 마주한 브랜든이 움찔했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해 버린 기분이었다.

퐁-.

루미나는 유리관을 막고 있던 마개를 빼냈다. 그리고 유리관을 다시 브랜든에게 넘겼다.

“아저씨한테 필요한 거예요. 한번 마셔보세요.”

“나한테?”

약이라고 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것의 정체를 모르니 냄새부터 맡게 됐다.

킁킁.

쌉싸름한 냄새가 나긴 했으나 색깔은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에리카가 만들지 않았고, 루미나가 건넨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마시지 않았을 거다.

꿀꺽.

약의 정체를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브랜든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으웩.

“어때요?”

“맛이 끔찍한 것 외에는 잘 모르겠어. 뭐야? 미각 살해 독약, 그런 걸 만들라고 부탁한 거야?”

브랜든의 신랄한 비평을 듣고 루미나가 한 방울만 살짝 먹어봤다.

“확실히 맛이 별로네요.”

딱 한 방울인데도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콧잔등까지 찡그린 루미나가 고민에 빠졌다.

‘맛 얘기를 하지 않았더니 실용성에 중점을 두고 만들었나 보네.’

일단은 ‘약’이라고 표현했으니 쓴맛이 나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터.

‘보통 약은 쓰고, 맛이 없으니까.’

분명 브랜든은 좋은 소식이라면서 알려줬는데 막상 들어보니 이쪽이 더 나쁜 소식처럼 느껴졌다.

“아저씨. 이걸 마시고 나서 뭔가 느껴지지 않아요?”

“딱히? 평소랑 같아. 아, 아니다. 맛없는 걸 먹어서 기분이 나빠졌어. 이것만은 확실해.”

브랜든이 질색을 했다.

루미나는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사탕을 꺼냈다.

“이거 드세요.”

“……사탕 장사 하니?”

“아버님이 챙겨줬어요. 전부 저 먹으라고 준 거라 아저씨한테 하나 준 건 비밀이에요.”

장사를 하냐고 물을 만큼 가방이 사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브랜든은 사양하지 않고 알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한결 낫네.”

“맛을 중화하게 단맛을 내달라고 에리카한테 전해 주세요. 흠. 그래도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마시자마자 ‘파바박-!’ 하고 느낌이 올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에리카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에리카는 학자로서 약물을 만든다면 나는 상인으로서 보니까 만족하지 못할 수밖에.’

이대로 판매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손을 봐야 할 것 같아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자니 브랜든이 의문을 표했다.

“이거 약 아니었어? 약이면 굳이 달게 만들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아프면 먹을 수밖에 없을 텐데.

루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저보다 판단이 느린 하수를 대하는 듯한 고갯짓이었다.

“이왕이면 맛도 좋아야 손이 더 자주 가죠. 그리고 이건 말이죠.”

브랜든이 귀를 쫑긋 세웠다.

“간 질환을 예방 치료하고, 눈앞이 또렷해지며, 기미와 여드름을 치료하고, 피로를…….”

“자, 잠깐만. 무슨 만병통치약이야?”

브랜든은 믿지 않았다.

루미나가 대답 없이 웃었다.

“정말? 진짜 그런 효과가 있는 거야?”

“피로를 회복하고, 정력에도 좋으며…….”

의심만 하는 브랜든과 마주 보며 웃기만 하던 루미나가 남은 기능을 줄줄 읊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판가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브랜든이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네 말이 진짜라면 난 매일 사 마실 거야. 그러니까 한 입만 더 마시면 안 될까?”

“아까는 맛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보니 맛있는 거 같아!”

아직 불완전한 시제품이건만 요즘 과로로 지친 브랜든이 영혼이라도 팔 것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게 바로 루미나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브랜든처럼 찌들고 지친 어른들이 돈 다발을 흔들 상상을 하자 루미나의 심장이 콩콩 하고 방정맞게 뛰었다.

***

오전 수업을 끝낸 카라얀은 연무장에 찾아갔다.

레기온인 그가 따로 검술을 배울 필요는 없었으나 배움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간 바깥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살았던 카라얀에게 격식 있는 수업은 지루했다.

금방 알 수 있을 만한 내용을 줄줄 늘어놓는 것만 봐도 그랬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수업을 들었다.

그러니 한두 번 땡땡이를 부리는 것쯤이야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담당 교사가 알았다면 뒷목부터 잡았을 테지만.

그래도 오늘은 수업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들은 뒤 연무장을 찾아왔다.

수업을 너무 잘 들었다.

이제 몸을 움직이면서 머리를 비울 차례였다.

‘그럼 기껏 수업을 들은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라는 교사들의 절규가 은은하게 울려 퍼질 만한 상황이었다.

대충 휘두를 목검을 쥔 카라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뭔가 다른데.’

연무장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들떠 있었다.

눈길을 돌리니 덩치 큰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 중심에서 소녀의 청명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정말요?”

카라얀이 기사들을 밀어내고 중심으로 헤쳐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얼굴을 보게 됐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루미나였다.

바지를 입은 루미나는 꼬마 기사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저도 검술을 배우려고요!”

“네가?”

목검보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부터 잔뜩 먹어야 할 네가?

“네! 생각해 보니까 제 몸 하나는 지킬 줄 알아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연무장에 왔는데 기사분들이 모두 자상하고 친절한 거 있죠?”

루미나의 말을 듣고 기사들이 쑥스러워했다.

카라얀은 털이 부숭부숭 난 덩치 큰 기사들이 소녀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다가가기 조금 어려웠는데, 하녀 언니들뿐만 아니라 기사분들까지 카라얀 님 같아서 안심했어요.”

흠흠.

생각보다 한심한 일이 아닐지도?

“헉슬리 경, 그러면 부탁할게.”

“네, 작은 마님!”

헉슬리가 루미나를 데리고 연무장 한구석으로 이동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지쳐서 기절하듯 잠을 잘 만큼 확실하게 가르쳐줘!”

“네, 알겠습니다!”

포부가 남달라서 살짝 의아했다.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거라고 넘겨짚은 헉슬리가 루미나의 옆에서 검을 잡는 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줬다.

카라얀은 멀찍이 떨어져서 원래 목적인 대련을 했다.

그런데 헉슬리가 자세를 교정해 준다면서 루미나와 가까워질 때마다 거슬렸다.

검을 든 자세가 흐트러질 만큼.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

“와, 헉슬리 경. 멋져!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거야?”

신경 쓰지…….

“하하. 작은 마님께서도 몇 년 열심히 검을 쥐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신경……!

“고, 공자님!”

카라얀과 대련하고 있던 기사가 창백하게 질린 채로 다급히 그를 불렀다.

“오러를 거둬주십시오!”

기사의 외침을 듣고 카라얀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검은 오러를 방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무슨 추태인지.

폭주해서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니고 저 감자한테 정신이 팔려서 큰일 날 뻔했다.

깜짝 놀란 루미나마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별일 아니야.”

대충 상황을 수습하고는 애쉬를 불렀다.

“애쉬. 네가 대신 가르쳐 줘.”

왜 그런 귀찮은 일을 저한테?

어리둥절했지만 애쉬는 군말 없이 헉슬리와 교대했다.

“베기를 500번 합니다.”

“으응?”

“베기 500번입니다.”

유들유들한 헉슬리와 달리 애쉬는 고지식한 선생이었다.

정석적인 베는 법을 한 번 보여주더니 무작정 오백 번이나 반복하라고 했다.

‘이게 맞는 건가?’

루미나는 잠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베기를 500번이나 하면 확실히 지칠 것 같아 결국 목검을 휙휙 휘둘렀다.

애쉬가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은 탓일까.

차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라얀은 훨씬 진정된 상태로 목검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그러면 이제 두 분은 뽀뽀 금지입니까?”

애쉬에게 검술 선생 자리를 빼앗긴 헉슬리가 카라얀에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흠칫.

카라얀은 순간 험악한 욕을 삼켜야 했다.

본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모르는지 헉슬리가 흐흐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작은 마님께 뽀뽀하고 싶으실 텐데 어떡합니까? 공자님이 작은 마님을 보는 눈빛에서 불이 아주 활활 타오르는데 그건 또 어떻게 참으시는지…….”

“무슨 소리야.”

수많은 욕설을 삼키던 카라얀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쟤가 날 더 좋아해.”

“……?”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헉슬리는 다년간 여러 여성에게 구애한 전적이 있었다.

그 결과 여성의 심리나 연애와 관련한 학위가 있다면 박사가 되고도 남을 만큼 빠삭해졌다.

그런 제 눈에는 루미나가 미지근한 물이라면 카라얀은 주전자도 감당 못 할 만큼 팔팔 끓다 못해 모든 걸 녹이는 용암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자존심을 세우는 건가? 뭐, 그 나이에는 그럴 수 있지.’

헉슬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을 보듯 카라얀을 쳐다봤다.

카라얀은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으나 직감적으로 기분이 나빴다.

“공자님, 결혼은 사랑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결혼한 이후가 중요하죠.”

“…….”

“그러니까 상대에게 꾸준히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해야 뽀뽀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매력?”

듣지 않는 척하면서 카라얀이 헉슬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헉슬리는 살면서 처음으로 공자님이 제법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네. 사람마다 각자 방법이 다르지만, 그중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죠.”

“…….”

“저와 대련 한번 합시다. 제가 필사적으로 지는 척해드리겠습니다.”

“넌 원래 나한테 못 이기잖아.”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 어리숙한 공자님은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헉슬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라얀이 이어서 황당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날 좋아하면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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