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82)화 (82/152)

“……예?”

누가? 루미나가? 카라얀을?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헉슬리는 카라얀의 생각을 읽고 싶었다.

루미나가 카라얀을 지금보다 훨씬 좋아하면 곤란해하는 게 아니라 좋다고 끌어안아야 하는 거 아닌가?

헉슬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뭘 놓치고 있는지 반추해 봐야 했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봤을 땐 그런 상황이 아닌데?’

이 꼬마 부부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 수 없으니 헉슬리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너랑 대련하면 된다는 거지? 안 그래도 그러고 싶었는데 잘됐네.”

카라얀이 씨익 웃으며 목검을 다잡았다.

시원스레 미소를 지으니 뾰족한 송곳니가 살짝 보였다.

그것이 그를 덜 자란 맹수처럼 보이게 해, 헉슬리는 맹수의 발바닥에 깔린 초식 동물처럼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잘못 건드렸구나!’

“네가 져준다고 했으니 최선을 다해서 져 봐.”

“네, 네……. 제가, 그랬었죠…….”

헉슬리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목검을 쥐었다.

그 뒤로 연무장에서는 헉슬리의 비명이 단연코 제일 크게 울렸다.

계속 베기만 하던 루미나까지 깜짝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다.

“내가 잘 몰라서 묻는 건데 저대로 내버려 둬도 돼?”

헉슬리가 루미나에게 원했던 반응은 ‘꺄! 카라얀 님! 멋져요!’였다.

그러나 현실은 헉슬리를 보며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가 됐다.

카라얀이 헉슬리를 제대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애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침 지나가던 유리가 한마디 했다.

“작은 마님. 원래 남자들은 뇌까지 근육으로 돼 있어서 좀 맞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풀에 지칠 때까지 내버려두죠.”

헉슬리와 수련생 시절부터 함께해 왔던 만큼 그를 오래 지켜본 유리는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졌다.

‘저번 연회에서도 느꼈지만 실제 암월 기사단은 이런 분위기구나.’

외부인으로서 듣는 암월 기사단의 명성은 대단했다.

강력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건 물론 ‘암월’이라는 기사단의 명칭대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서 은밀히 움직인다 했다.

그런데 실체를 보면…….

솔직히 오합지졸 같았다.

그렇게 암월 기사단의 평판을 200% 깎아먹은 주범인 헉슬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작게 말했다.

“고, 공자님! 덥지 않습니까?!”

“전혀.”

“아니, 더워야 합니다!”

제정신이 아닌가?

카라얀이 헛소리하는 헉슬리의 옆구리를 치기 위해 목검을 들었다.

“일단 제 말을 들어보시죠!”

“…….”

“들어보시고 나서도 헛소리면 그때 때리는 겁니다!”

헉슬리의 필사적인 외침에 카라얀이 툭 하고 그의 옆구리를 쳤다.

“으악!”

말이 ‘툭’이지 헉슬리에게는 ‘퍽’이었다.

헉슬리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치십니까!”

“일단 한 대 때리고 나서 듣게.”

“…….”

헉슬리는 카라얀이 미워졌다.

***

루미나는 기사들에 비해 기초 체력이 영 부실했다. 그러나 근성 하나만으로 베기 300번을 성공했다.

이미 팔이 쑤시고 몸이 무겁다고 느낄 만큼 지쳤기에 앞으로 남은 200번은 잠깐 쉬고 나서 하기로 했다.

‘확실히 밤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것 같네.’

만족스러웠다.

검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실제로는 불순한 목적으로 연무장을 찾은 루미나가 속으로 웃고 있을 때였다.

물통이 불쑥 내밀어졌다.

“유리 경이었나?”

“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고마워.”

배시시 웃은 루미나가 선뜻 물을 마셨다.

유리는 냉랭한 인상을 한 미인이었다.

주변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은데 보기와 달리 섬세하고 다정한 성격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마님.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쉬가 자기 식대로 가르치는 터라 무인이 아닌 작은 마님께는 힘든 게 당연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힘들면 내가 알아서 그만할게!”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냐, 아냐.”

루미나가 손사래를 치던 중이었다.

근처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린 루미나와 유리는 놀랐다.

연무장 중앙에서 카라얀과 헉슬리가 대련 중이었다.

그건 아까도 했던 일이니 그리 놀랄 것 없었다. 중요한 건 헉슬리가 상의를 탈의했다는 거다.

덕분에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단단한 상체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더불어 카라얀은 하얀 셔츠가 반쯤 풀려 있어서 다부진 가슴이 보였다.

“……기사의 수치 같으니.”

빠득.

유리가 이를 갈았다.

머리에 뇌 대신 근육이 들어 있는 헉슬리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명색이 공작 가문의 기사인데 아무리 더워도 상의를 홀딱 벗을 리 없었다.

게다가 공자님까지 꾀어냈으니 누굴 의식하고 하는 행동인지 뻔했다.

유리가 순진한 작은 마님을 지키기 위해 손으로 루미나의 시야를 차단했다.

“저런 거 보지 마십시오. 더럽습니다.”

“어? 어…….”

‘봐도 괜찮은데…….’

눈앞이 까매진 루미나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쉬한테 질문했다.

“애쉬 경, 이것도 자주 있는 일이야?”

너도 벗고 수련해?

그런 질문을 받은 듯해 애쉬가 보기 드물게 질색했다.

“전혀 아닙니다.”

동료의 괄시를 잔뜩 받는 줄도 모르고 헉슬리가 카라얀의 검을 받아쳤다.

마침 지나가던 하녀 몇몇이 그 장면을 목격한 듯했다.

헉슬리가 팔을 휘두르자 구슬땀이 그의 맨등을 타고 흐르고, 그때마다 연무장 외곽에서 ‘꺅’ 하고 행복이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점점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는 하녀들이 많아졌다.

두 남자는 루미나 대신 수많은 하녀들의 눈요깃거리가 된 것이다.

“유리 경, 이제 손을 놔줄래?”

“실례했습니다!”

헉슬리를 향해 욕설을 중얼거리던 유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쉴 만큼 쉰 루미나는 다시 목검을 잡았다.

“남은 베기 200번 할게!”

유리마저 잠깐 헉슬리에 대한 혐오감을 지워내고 미소 지을 만큼 씩씩한 외침이었다.

그렇게 헉슬리의 의도와 달리 공작가 하녀들의 호감만 싹쓸이한 채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요 근래 들어 최고로 힘들어……. 빨리 씻고 자고 싶다.’

루미나는 당장 쓰러질 만큼 지친 몸을 이끌고 연무장을 나왔다.

그 뒤로 카라얀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카라얀은 헉슬리의 조언이 제법 솔깃하게 느껴져 웃기지도 않은 연극 같은 대련을 몇 시간이나 계속했다.

그러나 루미나에게서 기대만 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살짝 불만스러웠다.

루미나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며 걷고 있자니 저질스러운 방법이라 통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다.

카라얀은 넓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셔츠를 단정하게 도로 묶으려다가 말았다.

답답하고 귀찮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도 했고.

‘네가 잘못한 건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기습 뽀뽀와 관련된 얘기였다.

뽀뽀를 한 지가 언젠데.

당연히 루미나는 그 사건이 어영부영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아니었다.

솔직한 마음을 고백할 때를 언제나 노리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 치고 들어가질 못해서 그렇지.

‘하필 대화를 엿듣는 꼴이 돼서.’

지하 감옥에서 루미나가 노라 클라인과 나눈 대화로 루미나의 삶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신 뽀뽀 같은 짓 하지 않을 테니까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건지도.

카라얀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루미나를 불렀다.

“할 말이 있어.”

그래, 지금인 거다!

여성의 심리에 빠삭하다는 헉슬리의 조언에 따르면 지금 루미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못해 넘친 상태여야 했다.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헉슬리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그러니 지금 이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다.

“네?”

“나는 널 미워한 적 없어.”

“네, 알아요.”

루미나는 진심으로 지쳐 있었다. 그 탓에 살짝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루미나가 기죽어서 힘없이 대꾸한다고 받아들인 카라얀이 재빨리 말했다.

“뽀뽀해도 돼!”

“……?”

“해도 된다고!”

해도 된다고 두 번이나 못을 박았다.

그렇지만 베기를 500번이나 해서 힘이 쪽 빠진 루미나에게서 마땅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데친 시금치처럼 흐물흐물할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얘기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인지한 만큼 하루라도 빨리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 상태로 밀어붙이긴 했는데 결과가 영 아니었다.

루미나가 자신을 좋아하니 이쯤 되면 당연히 뽀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참다못한 카라얀이 제대로 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외쳤다.

“나도 할 거니까!”

“?”

뭘 하겠다는 거지?

뇌까지 흐물흐물해진 루미나가 의문만 표하고 있는데 카라얀이 성큼 다가왔다.

루미나의 앞에 선 그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쪽.

루미나의 하얗고 말랑한 뺨에 카라얀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카라얀은 본인이 한 행동에 본인이 충격을 받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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