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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83)화 (83/152)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리어 카라얀이 기습 뽀뽀를 당한 줄 알 듯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루미나도 덩달아 긴장하여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루미나의 사고가 천천히 일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러니까 자기도 한다는 게 뽀뽀였다고?

루미나는 일순 피곤이 싹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소년과 소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다 카라얀이 먼저 외쳤다.

“어쨌든 그렇게 알고 있어!”

도저히 루미나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카라얀이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카라얀은 머릿속이 다시 팔팔 끓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스스로가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아서 죄악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쿵!

거의 달리듯 걷던 카라얀이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쾅!

뭐가 자꾸 거치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미나의 뺨에 닿았던 순간의 감촉이 입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이 망할 주둥이로 뭐라고 지껄였던가.

자신도 하겠다고 했었다!

그건 앞으로 몇 번이나 뽀뽀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부부여도 그렇지, 형식적인 관계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발언을……?

자신을 아주아주 좋아하는 루미나와 달리 자신은 루미나를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쿵!

벽에 세 번째로 부딪친 카라얀이 휘청거렸다.

마침 스스로를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쾅!

목이 탔다.

카라얀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자꾸 부딪치는 줄도 모르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의 목적은 이 갈증을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눈앞에 물웅덩이가 있었다면 그대로 몸을 던질 수 있을 듯했다.

한편, 공작가의 하인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집사님. 뮤네즈 님께서 회수하라고 명령하신 물약입니다. 공작님의 집무실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뭐?”

집사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하인들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집사는 가장 먼저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했다. 하트 모양의 유리병이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앞으로 이것들을 별채 앞에 두라고 명령하셨을 텐데?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보군.”

“그렇습니까?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별채로 다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인들이 열린 상자를 정리하고 다시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유리병 하나를 낚아채 갔다.

“……?”

다들 갑자기 나타난 인물을 쳐다봤다.

카라얀이었다.

어쩐지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가 유리병의 마개를 땄다.

그리고 입에 갖다 댔다.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 어?’ 하는 사이 카라얀이 액체를 꿀꺽꿀꺽 넘겼다.

집사와 하인들은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모습을 순간 넋 놓고 쳐다봤다.

“제기랄.”

물약을 마신 카라얀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양이 코딱지만 해서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 눈앞에 액체가 많이 있어서 하나 더 집어 들려고 하니 하인들이 이번에는 빠르게 그를 말렸다.

“고, 공자님! 안 됩니다!”

“왜? 이게 뭔데?”

카라얀이 짜증이 섞인 어조로 되묻자 하인들이 움찔했다.

“그…….”

기가 죽은 하인들 대신 집사가 말했다.

“조금 전 공자님께서 드신 건 사랑의 묘약입니다.”

“……뭐?”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눈에 뵈는 게 없던 카라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보였다.

그의 손아귀에서 하트 모양의 유리병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비워진 채로.

“젠장.”

카라얀 또한 사랑의 묘약에 대해 들었다.

가짜가 대다수지만 그중 진짜로 효과를 발휘하는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했었다.

“이건 진짜야, 가짜야?”

“그건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수거하라는 명령만 받았기 때문에 따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운이라는 거다.

카라얀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열을 식혔다.

침착하게 생각하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레기온이었다.

물약이 진짜라 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고, 가짜라 하더라도 심장 마비로 사망할 일은 없을 터.

“이것들은 푸른 물약이 따로 없어서 마시고 난 직후에 마주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고 그러던데…….”

어쩌면 물약의 효과로 카라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일까.

하인 중 하나가 충격받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카라얀은 심란해졌다.

안 그래도 루미나와 이렇고 저런 짓을 한 이후라서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더더욱 꼬여버렸다.

카라얀이 그 누구도 보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렸다.

“올리비아는 지금 어디 있지?”

“뮤네즈 님은 현재 공작님의 집무실에 계십니다.”

카라얀은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자신이 마신 묘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빠르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터벅, 터벅-.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걷고 있자니 점차 이성이 돌아오는 듯했다.

마음 한편으로 레기온인 자신에게 이런 사특한 물약이 통할 리 없다고 코웃음 칠 정도니 말이다.

잔뜩 오만해진 카라얀이 모퉁이를 돌았다.

그런데 모퉁이 너머로 흙먼지가 묻은 검은 신발이 살짝 보였다.

카라얀은 부딪치지 않도록 재빨리 멈춰 서야 했다.

이대로 뒤로 물러선 후 저 사람을 피해서 집무실까지 쭉 가면 됐다.

카라얀이 머릿속으로 계획을 착착 세웠다.

만약 익숙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어?”

루미나의 목소리였다.

모퉁이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걸 카라얀보다 늦게 눈치챈 루미나가 깜짝 놀란 듯했다.

상대가 루미나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카라얀은 고개를 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냥 고개가 들렸다.

그러자 자신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황급히 뒷걸음질하다가 발이 엉켜 넘어지기 직전인 루미나를 보게 됐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갔다.

루미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게 된 것과 같았다.

“으앗.”

카라얀이 루미나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바짝 맞닿으며 시선이 교차됐다.

“가, 감사해요. 그런데 카라얀 님은 저택을 한 바퀴 돌다가 온 거예요?”

많이 놀랐는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나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카라얀은 본인의 상태가 아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퉁이를 돌기 전 말이다.

물약을 마시고 상대와 마주하면 사랑에 빠진다고?

그렇다면 이건 가짜였다.

그래. 간사한 물약 따위가 통할 리 없…….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요.”

쿵쾅쿵쾅.

가슴이 아플 만큼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

카라얀이 뺨에 입을 맞추고 홀랑 떠난 이후 홀로 남은 루미나는 조금, 아니, 많이 당혹스러웠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먼저 뽀뽀를 한 건 자신이었으니 이 상황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일단 카라얀 님을 사랑하니까?’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어야 했나?

그런데 지쳐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깜짝 놀라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반응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루미나는 제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아 쑥스러워진 카라얀이 도망치듯 사라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좋다고 또 뽀뽀를 할 순 없잖아…….”

당해보니 알겠다.

아주 가끔 써야 할 만큼 파급력이 큰 행동이었다.

루미나는 자신의 뺨에 손등을 댔다. 카라얀이 입을 맞춘 반대쪽 뺨이었다.

뜨거웠다.

카라얀한테 옮았는지 저도 모르게 열이 올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뽀뽀는 진짜 조심해서 해야겠어.’

위험해.

루미나가 바란 건 카라얀이 치료를 피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호감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루미나 자신도 카라얀에게 그 이상의 호감을 품으면 안 됐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카라얀 님은 나한테 왜 갑자기 그런 거지?’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체감상 카라얀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신에 대한 태도를 휙휙 바꿨다.

도저히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힘이 탁 풀린 루미나는 흐느적거리면서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돈 순간.

저보다 큰 형체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의 부딪치기 직전에 가서야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뒤로 넘어질 위기에 처했으니까.

그대로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릴 줄 알았는데 중력이 이끄는 방향과 반대로 당겨진 루미나가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가, 감사해요.”

“…….”

“그런데 카라얀 님은 저택을 한 바퀴 돌다가 온 거예요?”

카라얀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잠깐 새 또 싫어진 걸까?

이쯤 되면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었다.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요.”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뽀뽀 건도 있는데 시선을 피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루미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카라얀 님?”

저기요. 똑똑?

살아계시나요?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라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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