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84)화 (84/152)

“왜요?!”

깜짝 놀란 루미나가 외쳤다.

하지만 카라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진짜 사랑의 묘약을 마신 것 같다고 어떻게 얘기해.’

그래서 널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머저리 같은 얘기를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자신은 레기온이었다.

무려 레기온!

약효가 돌 리 없다고 잔뜩 비웃어 줬건만 효과는 강력했다.

평소에도 루미나를 보면 심장이 좀 빠르게 뛰는 편이긴 했지만.

그리고 루미나가 있으면 세상이 좀 더 밝게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평소와 비슷한 듯, 조금 더 격렬한 현재 상태는 사랑의 묘약 외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카라얀은 문득 자신의 머리털을 잡아 뜯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손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빨리 씻고 일찍 자고 싶어서요.”

“어? 어.”

카라얀은 머리털을 잡아 뜯는 대신 루미나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거세게 눈을 비볐다.

루미나의 옆에 흩날리는 반짝이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날리는 것 같았다.

“눈에 뭐가 들어간 거예요?”

“많이 커.”

눈에 큰 이물질이 들어가면 심각한 문제 아닌가?

루미나가 걱정스레 그를 쳐다봤다.

“일단 방으로 가서 의사 선생님을 부르도록 해요.”

“나는……, 집무실로 가던 중이었어.”

“집무실이요? 집무실은 이 층이잖아요.”

그리고 여기는 삼 층이었다.

일단 달리고 봤던 카라얀은 순간 층수도 제대로 못 세는 멍청이가 돼 버렸다.

하암.

“그래요. 집무실로 가세요.”

크게 하품한 루미나가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집무실로 간다면서요?”

“내일 가지, 뭐.”

일이 있던 게 아니었나?

일일이 따지기에는 연무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카라얀의 행동이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뽀뽀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루미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정말 아무렇지 않아졌다.

피곤이 몰려온 탓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껌뻑, 껌뻑.

다시 한번 하품을 한 루미나는 에리카가 만든 맛없는 물약을 꿀꺽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바로 기절.

고롱고롱-.

***

짹-, 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드리웠다.

그리고 카라얀은 눈을 부릅뜬 채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그는 머리가 무거웠다.

보통 며칠 잠들지 않아도 멀쩡하건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한 달 동안 불면증에 시달린 듯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반대로 기분 좋게 푹 자고 일어난 루미나가 이 반송장을 발견했다.

“헙.”

루미나는 옆자리가 비어 있기에 카라얀이 일찍 일어났나 보다 짐작했다가, 소파에 널브러진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 꼴은 아무리 봐도…….

“못 잔 거예요?”

“어…….”

카라얀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응수했다.

지난밤 도저히 침대에 같이 누울 자신이 없어서 익숙하게 소파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아 허공만 노려보다가 기력을 전부 소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루미나를 보니 기운이 났다.

“어째서 잠들지 못한 거예요? 아무리 레기온이라도 피곤할 법했잖아요. 지금도 피곤해 보이고.”

밤새 괴로워한 카라얀에게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물음이었다.

네 생각 하느라 못 잤어.

그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자꾸 네 얼굴이 둥둥 떠오르고, 심장은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방방 뛰는데.

카라얀은 쥐구멍으로 숨을 수는 없으니 손바닥으로라도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루미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밤새 아른거리던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싶은 터라 결국 그는 뺨을 살짝 붉힌 채로 말했다.

“평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아!”

카라얀의 말을 들은 루미나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듯이 감탄했다.

“맞아요. 몸이 긴장하면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아무리 지쳐도 잠들지 못하겠죠.”

“…….”

“왜 그걸 바로 생각해내지 못했지? 난 바보인가?”

혼자 중얼거리던 루미나가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

카라얀만이 반송장 같은 꼴로 그 자리에 오롯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복도로 달려 나간 루미나는 가장 먼저 한나를 찾았다.

그러나 한나는 부재중이었다.

어서 빨리 브랜든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요즘 한나로 있을 시간이 없는 브랜든과 만나려면 그가 직접 루미나를 찾아오는 방법뿐이었다.

‘만약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있을 법한 장소가 한 곳 있긴 하지.’

루미나는 곧바로 루키우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그런데 못 보던 물건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흰 천에 가려진 그것은 그림이었다.

설마 엉망진창인 자신의 그림 대신 걸어놓으려는 걸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루미나는 살짝만 구경할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천을 벗겨냈다.

그림은 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굽이치는 머리칼은 봄날에 만개한 꽃처럼 사랑스러운 분홍색이었다.

머리 색보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는 이전에 노라 클라인이 연회에서 입었던 것과 흡사했다.

천사가 연상될 만큼 사랑스러운 인상을 한 미인의 금빛 눈동자를 본 순간 루미나는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이리스 폰 하트.’

세상을 떠난 하트 공작부인이자 카라얀의 어머니.

건드려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걸 직감한 루미나가 다시 천을 씌워놓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터벅.

발소리를 듣고 루미나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거대한 검은색.

루키우스였다.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훔쳐보려고 한 게 아니라…….”

“괜찮다. 네가 못 볼 것도 아니니까.”

루미나는 루키우스가 일부러 기척을 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지 않았다면 루미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놀랐을 테니까.

“공작부인이시죠?”

“그래.”

무겁고 민감한 주제였다.

이제 와서 몸을 빼기도 애매했다.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니 눈앞에 무언가 쓱 내밀어졌다.

“먹을 건가?”

“네, 네.”

막대 사탕이었다.

두 사람은 막대 사탕을 입에 넣은 채 나란히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네? 네! 엄청난 미인이세요. 순간 넋을 놓고 쳐다봤어요.”

사회생활을 잘하는 루미나가 언제 어색했냐는 듯이 싹싹하게 대꾸했다.

“평소에 잘 꺼내놓지 않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더군.”

“부인의 초상화니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있죠.”

“카라얀이 싫어해서 말이다. 정확히는 아이리스를 그리워하는 날 싫어하는 거겠지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루미나는 힐끔 그를 올려다봤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결코 꺼낼 수 없으며 이제껏 얘기할 생각도 없던 주제를 언급했다.

“카라얀 님은 아버님이 부인을 죽였다고 했어요.”

“그래, 내가 죽였지.”

루키우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루미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인을 사랑하잖아요.”

“…….”

“그런데 카라얀 님은 두 분이 사랑한 적 없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 오해를 받아도 괜찮으신 거예요?”

“상관없다.”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어투였다.

필요 이상의 절제였기에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레기온이라 해도 이상해요. 사랑하는데 죽이다니. 스스로한테도 고통스러운 일이잖아요. 분명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테고, 카라얀 님이 그걸 몰라서 오해를 하는 거면…….”

“남의 집안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군.”

“아. 죄송해요.”

드물게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루미나가 빠르게 사과했다.

살짝 고개 숙인 루미나를 힐끔 쳐다본 루키우스가 가죽 장갑을 낀 탓에 새까만 손을 루미나의 머리 위에 얹었다.

‘다시 한번 말실수하면 머리를 터트리겠다는 협박인가?’

루미나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쓰윽, 쓰윽.

그는 천천히 자그마한 밀빛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치 달래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말은 차갑게 했지만, 마냥 비난한 건 아니라는 듯.

한참의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소동을 부린 그 여자가 아이리스를 영악하고 악랄하다고 표현했었지.”

“제정신이 아닌 자의 헛소리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니.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아이리스를 제대로 보고 있더군.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네?”

부인을 능멸했는데 어떻게 이런 반응이?

당황한 루미나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서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이였기에 말을 걸었다고 했으니까. 나와 결혼한 이유도 비슷했겠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며 루키우스가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아이리스가 들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텐데.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얘기를 해 주고 싶군.”

루미나는 그가 스치듯 한 말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하트 공작부인이 제 어머니만큼이나 외모와 성격의 괴리가 큰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보통 망자를 다시 만난다는 건 본인도 죽었을 때를 얘기해.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야.’

루미나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그에게 심장을 넘겨줬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키우스, 그가 모종의 실험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시간 역행.’

만약 그가 시간 역행을 위한 연구를 지속 중이라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는 것.’

그가 간절히 바라는 기적일 거다.

미래의 그는 실험에 성공하지만, 바라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나만이 기억을 가진 채 돌아왔으니까. 아버님은 아내를 되살릴 만큼의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고.’

노라 클라인의 일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루미나는 입 안에서 굴려지는 달콤한 사탕과 달리 쓰디쓴 진실을 말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이 얘기를 듣고 내게 심장을 요구할 수도 있잖아.’

루키우스라면 흔쾌히 루미나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려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하루라도 빨리 이 계약을 마무리 짓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와 공존하기를 바랐지 스스로를 희생하길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꼭 진실을 전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비록 그들의 염원 중 사랑이 아닌 증오만이 미래에서부터 현재로 이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사랑하는 아들만큼은 지킬 수 있을 거다.

자신이 기필코 그렇게 만들 거니까.

“루미나.”

“네, 네?!”

“올리비아를 통해서 내가 쫓는 인물, 박사에 대해 들었을 테지.”

“네. 흑마법을 써서 진짜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면서요. 사특한 힘을 쓰니 제게 조심하라고 했어요.”

그 전에 브랜든이 한 번 경고했지만 루키우스는 모르는 일이었다.

루미나가 시치미를 뚝 뗐다.

“네가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어쩌면 네가 그자와 한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절대 아니에요!”

“그래.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한패가 아니더라도 네가 만약 나와 그자의 일에 방해가 되면.”

“…….”

“나는 너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너를 처단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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