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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85)화 (85/152)

루미나의 솜털이 쭈뼛 설 만큼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럴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니 절대 그자와 만나지 마라. 만약 마주하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도록 해라.”

살벌한 경고였다.

루미나는 그 속에 염려가 섞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

“올리비아가 그림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제가 마주친 사람이 비슷하게 생긴,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다른 특징 같은 건 없나요?”

“레기온을 좋아하는 인간.”

루키우스가 딱 잘라 정의했다.

“레기온에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감을 가진 인간은 절대 제정신이 아니다. 꼭 그자라고 의심되지 않더라도 피해라.”

“…….”

“최대한 널 지켜주려 할 테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까 미리 경고하마.”

그의 말을 듣고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순히 저희의 계약 때문인가요?”

당돌한 물음이었다.

루미나는 자신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걸 뒤늦게 인식했다.

카라얀에게 뽀뽀를 받는 순간 허물어졌던 경계가 아직까지 단단해지지 않은 채로 있는 걸까.

비즈니스 관계이니 당연한 건데 그걸 또 왜 입으로 물었는지.

말이 헛나갔다고 정정하려던 때였다.

루키우스가 다시 한번 루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격한 손길이었다.

루미나의 머리가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당연하게도 단정했던 머리 모양이 엉망이 됐다.

루미나가 항의하려던 순간.

“꼭 그 이유만은 아니다.”

루키우스가 여전히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나와 같은 레기온이니 지켜주는 거지.”

빈약한 변명이었다.

루키우스 또한 그 점을 눈치챈 듯했다.

더는 말하지 않고 아이리스의 초상화만을 빤히 쳐다봤다.

***

“아저씨!”

겨우 브랜든을 찾은 루미나가 반갑게 외쳤다.

“무슨 일이야?”

격렬한 환영이었다.

브랜든은 본능적으로 일이 하나 더 늘어나리라고 직감했다.

“사랑의 묘약에 들어간 재료 중에서 심장이 빨리 뛰게 했던 건 뭐예요?”

“바마세라고 서부 끝 쪽에서 자생하는 식물이야.”

“독이에요?”

“응? 일종의 각성 효과로 심장이 빨리 뛰게 만드는 거라 단독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 없지.”

“…….”

“좋은 것과 좋은 것을 합쳐서 무조건 좋은 게 나오는 건 아니고, 맹독도 약에 쓸 수 있는 법이잖아.”

브랜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에 에리카가 만든 물약 말이에요.”

“왜? 그거 더 주게?”

“아뇨,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저씨한테 막 마시라고 할 수 있겠어요.”

루미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브랜든의 얼굴에서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엿보였다.

“더 마시고 싶어 하는 걸 보니 효과가 있었나 봐요?”

“직후는 모르겠는데 조금 지나니까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더라고. 그, 다른 건 모르겠고 평소보다 덜 지치는 기분이었어.”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미나는 스스로에게도 실험해 봤지만, 아직 어린 탓인지 아니면 너무 무리해서 몸을 움직인 탓인지 푹 잤다.

“에리카한테 바마세를 넣어보라고 전해 주세요. 딱 한 입 마시자마자 살짝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요!”

루미나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맛은 최대한 달게 만들어서 자극적으로! 이걸로 공업 지구를 공략할 거예요.”

돈이 잔뜩 들어와서 주머니가 가득 차다 못해 터질 듯한 미래가 정말 코앞이었다.

그 사실이 루미나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만들었다.

***

“올리비아…….”

“고, 공자님?”

서류 뭉치를 들고 이동 중이던 올리비아는 쓰윽 나타난 검은 형체를 보고 움찔했다.

그리고 검은 형체, 아니, 카라얀이 고개를 들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얼굴밖에 볼 거 없는 공자님인데 못 본 새 밤낮으로 근무한 저보다 얼굴이 더 상하셨네요.”

아차.

속마음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왔다.

올리비아는 이 성격 나쁜 어린 레기온이 분명 발광할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피곤하게 됐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라얀은 올리비아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온순했다.

우리 공자님은 이런 레기온이 아닌데?

올리비아가 의아해하던 중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카라얀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상태 좀 봐 줘.”

“네? 무슨 일이신데요?”

“사랑의 묘약을 마셨어.”

“아, 안 그래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카라얀 님은 레기온이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불편한 곳?

많다.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것 같은데 어디 한 곳만 불편하겠는가.

“이런 일은 의사한테 맡길 수 없으니 일단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카라얀이 침묵을 택하자 올리비아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게다가 사랑의 묘약은 무려 박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무슨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빈 방으로 이동했다.

“제가 봤을 때 현재 공자님은 흑마법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없다고?”

“네. 공자님이 마신 묘약이 가짜라는 의미죠.”

“그럴 리가 없어!”

카라얀이 격렬하게 부정했다.

“만약 제가 잘못 봤다 하더라도 진짜 사랑의 묘약은 불완전한 제품이죠. 그러니 레기온인 공자님께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겁니다.”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강하게 부정한 카라얀이 끝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가짜 묘약을 마셨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오늘따라 온순하다 했더니 한순간의 기우였던 듯했다.

카라얀은 역시 성격 더러운 레기온이 맞았다.

지옥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사람처럼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카라얀을 눈앞에 둔 올리비아는 슬쩍 일어나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발광하는 레기온을 한가하게 지켜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진정이 되셨나요? 무슨 문제인지는 몰라도 묘약 탓은 아니니 저보다는 다른 분야의 의사를 만나는 게 좋아 보이네요. 그러면 이만…….”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다 만 올리비아가 의문을 표했다.

“네? 가짜라도 약효가 강력한가 보네요. 한동안 격한 움직임을 줄여보도록 하죠.”

“가만히 있어도 그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일단 찬물을 마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평소보다 세상이 밝게 보이는 건?”

“그건 또 처음 듣는 얘기네요. 묘약 부작용 사례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올리비아가 사무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카라얀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잠깐, 올리비아. 내 병은 치료해 주고 가야지.”

“공자님께서는 아픈 곳 없이 건강하십니다. 만약 이상이 있다면 심적인 문제 탓으로 보이니 묘약을 마셨다는 걸 너무 의식하지 않는 편이 이롭겠네요.”

올리비아는 별거 아닌 일로 귀한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라얀이 자꾸만 이상증세가 있다고 주장했다.

“설마…….”

이쯤 되니 올리비아 또한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약효가 제대로 돌지도 않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고 세상이 밝아 보이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보통 그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사랑에 빠지신 거야!’

상대가 누구겠는가.

이것저것 재고 따질 것 없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 그랬던 거야.”

카라얀 또한 이 무의미한 대화를 통해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맞아요! 공자님!

공자님이 생각하는 그게 결단코 옳습니다! 절대 완치하지 못하는 그 병이에요!

올리비아가 눈빛으로 그를 열렬히 응원했다.

“난 미친놈이었던 거야!”

아, 아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카라얀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외치자 올리비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

마도공학자 로건 씨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7시 10분이 되면 집에서 나간다.

정각이 아닌 10분인 이유는 출근길이 북적거리니 10분 일찍 나가기로 항상 마음만 먹다가 꾸물거리고 보면 20분이 지나 있기 때문이다.

공업 지구에는 로건 씨처럼 반송장 꼴로 직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우글거렸다.

슬픈 행렬이긴 해도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건 나름 사정이 좋은 축에 속했다.

“어, 어……. 로건. 왔어?”

지금도 봐라.

오자마자 그를 반기는 동료는 퇴근도 못 하고 회사에서 며칠째 하는 숙식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도공학은 제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이었다.

마물의 핵이나 광물 등에서 에테르를 뽑아내 자원으로 활용하는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산업의 통칭이었다.

단편적으로 밤을 빛내는 조명이나 냉각 설비 제품 혹은 난방 시설 등이 해당됐다.

단독으로 초월적인 힘인 마력을 쓸 줄 아는 레기온과 달리 평범한 인간은 기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마도공학은 일상생활에서 상용화돼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보편성과 달리 인력은 항상 모자랐다.

마도공학도 세부적으로 분야가 갈라졌다.

그에 따라 수학, 공학, 에테르 감응력 등의 능력을 요하니 항상 일할 사람이 부족했고, 야근으로 부족한 인력을 메꾸게 됐다.

로건은 점심시간에 카페에 들러서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편이었다.

직장 생활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퇴근하고 싶다. 침대에 눕고 싶다. 퇴사하고 싶다! 밤샘 야근 싫억……!”

오늘 야근 당첨은 로건이었다.

점심 때 마신 커피는 이미 효력을 다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로건은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반만 눈을 뜨고 있는 자신과 달리 동료들은 생기 있어 보이는 것이다.

아침만 해도 거의 죽기 직전인 얼굴이었는데?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낀 로건은 바로 근처에 있는 동료한테 따졌다.

“나 몰래 자고 온 거야? 아니면 연애? 아니, 네 얼굴로 연애를 할 리 없는데. 대체 멀쩡한 이유가 뭐야!”

얼떨결에 어깨가 잡힌 동료는 평소였다면 “으어어…….” 하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을 거다.

그런데 총기 있게 눈을 빛낸 그는 로건의 손을 털어냈다.

“넌 그거 안 산 거야?”

“그거?”

우매한 중생을 보듯, 동료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로건의 몰골을 살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또한 이런 꼴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나중에 먹으려고 딱 하나 남겨뒀는데 네 꼴이 눈 뜨고 못 볼 정도라 특별히 하나 준다.”

선심 쓴다는 듯이 말한 동료는 서랍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갈색 병을 꺼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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