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뭔데?”
“그……. 바 뭐였는데. 아, 여기 적혀 있네.”
동료가 병에 붙어 있는 상품명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바쿠스’라고 적혀 있었다.
정체불명의 명칭을 확인한 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재상을 찾아갔다가 팔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 사 봤지. 가격도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었고.”
동료가 어깨를 으쓱였다.
“위험한 거 아니야?”
“약재상이 파는데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겠어. 그래도 처음 보는 거라 살짝 한 방울만 마셔봤는데 되게 맛있더라고. 정신 차려보니까 깔끔하게 비워버렸지.”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였다.
이미 이 액체에 홀딱 빠진 게 분명했다.
“아, 싫으면 말고! 어차피 내가 나중에 마시려고 꿍쳐놓은 거였어!”
“누가 싫대?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당장 마시려니까 찝찝했는데 막상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로건은 빠르게 뚜껑을 땄다.
처음 맡아 보는 냄새가 났다.
마냥 불쾌하거나 역겨운 냄새는 전혀 아니었고 살짝 단내가 났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 있을 만큼 격렬하게 퇴근하고 싶은 상태긴 했다.
하지만 그게 인생에서 사표 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자꾸만 의심하던 로건은 동료의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쳤다.
며칠 야근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피곤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저 악마의 눈……! 갖고 싶다!
결국 로건은 반신반의하며 혀 위로 한 방울만 올려봤다.
‘음?’
달았다.
피곤에 쩐 몸이 자극적인 맛을 느끼자 조금 더 갈구했다.
꿀꺽.
용기 내어 한 입 마셨다.
그러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꿀꺽꿀꺽.
한 병을 깔끔하게 비운 로건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동료처럼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바쿠스.
그 정체불명의 액체는 공업 지구에서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
“오, 오. 전능하신 루미나 님. 제게 바쿠스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좋다.”
브랜든이 루미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한 루미나가 그의 손 위로 병을 올려주었다.
잽싸게 일어난 브랜든이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 리비한테도 몇 병 찔러줬는데 되게 좋아하더라고. 애쉬는 소드 마스터잖아. 그래서 필요 없대. 소드 마스터라서.”
“아저씨. 애쉬 경이 소드 마스터인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 자랑하세요.”
“우리 꼬마 마님은 눈치가 빠르다니까.”
눈치 없는 사람도 알 만큼 떠벌떠벌 자랑하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정말 못 말리는 가족 사랑이었다.
“앞으로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건 알죠?”
“알지, 알지.”
자양강장제, 바쿠스.
이런저런 효능이 있지만, 주요한 효능은 피곤을 가시게 해서 능률을 올린다는 거다.
마석 꽃을 판매한 자금을 활용해 판매를 시작한 바쿠스는 날이 갈수록 판매량이 늘었다.
그리고 현재.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루미나는 제조를 맡은 에리카에게 판매 수익의 적당한 비율을 떼어주고 있었다.
일부는 고생한 브랜든에게 사례비로 두둑하게 지급했고.
그런데도 차명 계좌에 돈이 착착 쌓이고 있었다.
루미나의 기쁨이었다.
“제가 말했죠? 아저씨 몫도 든든하게 챙겨줄 거라고요.”
브랜든은 돈도 돈이었지만, 남들은 없어서 못 산다는 바쿠스를 마음껏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외근도 잦고, 늦은 시각까지 일할 경우도 많은 그에게 딱 맞는 약이었다.
커피도 졸음을 쫓아내지만, 카페에 앉아서 여유롭게 음미하며 마셔야 하는 음료였다.
시공간적 제약이 컸다.
브랜든과 같은 이유로 커피 대신 바쿠스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
“아, 맞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는데. 오늘은 좋은 소식부터 들려줄게.”
루미나가 나쁜 소식부터 들으려는 걸 알고 있는 브랜든이 냉큼 말했다.
“에리카가 녹아내린 슬라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학계에 에리카의 이름이 알려졌어. 멸망의 징조라는 주장을 뒤엎었거든.”
전생처럼 슬라임이 단체로 녹아내리고, 멸망론자들이 날뛰는 일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 에리카가 바쿠스 제조에 참여했다고 하니까 판매량이 또 뛰었지!”
“아저씨. 지금 소리 안 들려요?”
“응? 무슨 소리?”
브랜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했다. 루미나에게는 선명하게 들리는데.
땡그랑, 땡그랑.
“돈이 쌓이는 소리요.”
루미나가 낭만적인 어투로 말했다.
근래 들어 제일 행복해 보여 브랜든은 속으로 ‘아직 어린 애가 돈 밝히는 거 맞다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뭐예요?”
“이게 좋다고 보면 좋은 소식인데, 누가 슬라임한테 페테니아 뿌리를 인위적으로 먹인 거 같대.”
“설마…….”
브랜든에게 페테니아 뿌리를 먹인 박사. 누군가 억지로 페테니아를 먹인 수많은 슬라임들.
“그래. 박사가 실험을 했던 거야.”
루미나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니까 에리카한테 도움을 구하면서 나 혼자 조사해보고 있어.”
“조심하세요.”
“너무 걱정 마. 혹시라도 박사의 거취가 밝혀지면 얘기해줄게. 박사는 너도 피해야 하는 인물이니까.”
제 걱정을 하는 루미나가 예뻐서 브랜든이 애쉬에게 하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루미나는 살짝 어색하게 그 손길을 받았다.
“그런데 아저씨. 핵을 제외한 마물의 사체를 싸게 매입할 수 있을까요?”
“사체만 따지면 쓰레기니까 그냥 구할 수 있지.”
“그러면 창고를 사서 그것들을 보관했으면 좋겠어요.”
마물의 사체라니.
악취미 같았지만 본인이 번 돈으로 하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우리 꼬마 마님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한 거야?”
브랜든이 바쿠스를 흔들며 물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필요성이죠.”
“네가?”
“그런 게 있어요.”
루미나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전생을 떠올린 탓이었다.
도박에 미쳐버린 인간들은 본인이 돈을 딸 수 있을 거라는 믿음하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그 시간에 운이 자신을 따라줬다면? 돈을 딸 수 있었을 텐데 고작 수면으로 기회를 놓친 게 아닐까?
강박적인 도박중독 증세였다.
결국 잠자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정체불명의 약을 제조해서 마시는 걸 지켜보게 됐다.
루미나는 깨달았다.
돈이 얼마가 되었든 이런 약을 구매할 사람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또한 하루하루 힘들게 일하는 어른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런 약의 필요성을 확실히 느끼기도 했다.
‘얕은 지식으로 급조한 약보다 맛도 있고 효과도 확실한 데다 안정성도 있으니까.’
어른들은 기력을 얻고, 루미나는 돈을 얻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장사였다.
***
[누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누님이 알려준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는 나날입니다.
저는 성실히 법학을 배우며 저의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있습니다.
법에 대한 지식과 법보다 가까운 힘이 합해지면 훌륭한 어른으로 거듭날 발판이 되어 주겠죠.
큰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엔디미온이 자신의 의도를 곡해한 탓에 루미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됐다.
‘어쨌든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다.’
[(중략)최근에 모르간 발레스 님이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루미나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모르간 발레스는 고모인 테레사 발레스의 아들로 루미나와 엔디미온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아카데미는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울 텐데 어떻게 접근한 거지?’
[그분께서는 아카데미 졸업생이라 은사님을 방문한다는 빌미로 저를 찾은 듯했습니다.
부모님이 흑마법에 연루되어 구속당하고, 막대한 금전적 피해까지 입어서 저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하는 일을 부모가 모두 알 수 없듯, 자식 또한 그렇겠죠.
저는 일개 학생일 뿐이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니 “두고 보자!”라고 하며 떠나더군요.]
흔한 악당 같은 대사였다.
[이 소식을 누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모르간 발레스는 구석에 내몰린 주제에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괜한 정에 휘둘려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번에는 엔디미온이 완고하게 거절했지만, 그들의 사정을 고려하면 언제 또 접근하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하니까.’
루미나는 편지지를 꺼냈다.
앞으로 발레스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 만나러 오면 무시하라는 얘기를 꾹꾹 눌러 썼다.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도 아까운 자들이니.
답장을 쓰고, 편지지를 반듯하게 접은 루미나는 앞으로 발레스 가문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둬도 망할 가문이니까.
***
흑마법 건으로 기소되어 구속당했던 발레스 내외가 드디어 수감 생활을 마치고 바깥 공기를 맡았다.
아들인 모르간이 수척해진 부모를 이끌었다.
저택에 당도한 테레사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몇 달 자리를 비웠다고 집 꼴이 유령이 살 것처럼 으스스해졌구나. 집사는 그간 대체 뭘 한 건지. 안 그래요, 여보?”
“그러게 말입니다.”
남편, 아이작 발레스가 긍정했다.
그리고 테레사의 불만은 저택에 들어가자 더욱 심화됐다.
“조각상이 있어야 할 텐데 어디로 갔지?”
“어머니. 그건 압류당했습니다.”
“꽃병은? 아니, 소파는?!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파인데 어디로 간 거니!”
“그것도 압류…….”
돈이 없어서 이것도 압류, 저것도 압류, 전부 다 압류.
집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이러다 침대도 없다고 하겠구나!”
“네……. 부부 침실에 있던 침대도…….”
모르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베개와 이불은 남아 있을 겁니다.”
속없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테레사는 호흡 곤란을 겪는 사람처럼 헐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