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모르간이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테레사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테레사는 아들에게 고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집안 꼴이 이렇게 되는 동안 대체 너는 무엇을 했니!”
“마냥 손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르간이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가 직접 아카데미까지 찾아갔는데 엔디미온 그 애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했다고?!”
엔디미온이 그들을 꼭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테레사는 엔디미온이 패륜을 저지른 것처럼 분개했다.
“미천한 평민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고분고분하고 순한 아이였지. 그런데 그런 말을 한다는 건…….”
테레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루미나. 그 사특한 것에게 물든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족인 데다 어른인 저한테 바짝 엎드려도 모자랄 엔디미온이 매몰차게 굴 리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를 꼬드겼겠지.’
엔디미온을 아카데미로 쫓아낸 것도 루미나일 터.
테레사는 루미나가 제 어미를 쏙 빼닮아서 천성이 악독한 데다 별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 당장 도와주지 않겠다고 뻐기는데 어떡합니까. 게다가 루미나, 그 계집은 하트 공작의 후광을 입고 있어서 절대 저희를 만나려 하지 않는데.”
어머니를 통해 루미나가 얼마나 못됐는지 전해 들은 모르간 또한 루미나를 혐오했다.
그렇지만 그 악명 높은 공작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갚아야 할 돈이 산더미인데도 직접 루미나에게 찾아가지 않은 이유였다.
당장 그들의 수중에 있는 건 유령이 살 것 같은 꼴이 돼 버린 이 집뿐.
이대로 가다간 몰락밖에 남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근래 눈여겨보던 사업이 하나 있는데…….”
눈치를 보던 아이작 발레스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테레사가 진저리쳤다.
“사업, 사업, 사업! 지겨워요! 그 사업 때문에 지금 이 지경이 된 거 모르겠어요?”
“이제 막 뜨고 있는 사업이니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내실도 단단해서 들어보면 부인도 혹할 겁니다.”
테레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더는 말하지 말라고 막아서지 않았다.
현재 그들의 상황에서 사업 외에 단기간에 돈을 불릴 방법이 없긴 했다.
테레사가 팔짱을 낀 채로 어디 한번 들어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바쿠스라는 물약이 최근 불티나게 팔리는데…….”
그가 이번에 뛰어들려고 하는 사업의 물품은 자양강장제였다.
최근 퀸 메를로라는 이십 대의 젊은 사업가와 에리카 가르티라는 학자가 제조한 물약, ‘바쿠스’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
“바쿠스를 원하는 자는 많지만 공급이 그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는 말은.”
발레스 부부의 시선이 부딪쳤다.
부부는 닮는다고,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당신의 감이 맞는 거 같네요.”
테레사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사업은 적절한 시기에 치고 빠지는 게 중요했다.
철 지난 유행이 되기 전에 한탕 하고 떠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일궈낼 수 있는 때라고 확신했다.
***
한때 카라얀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세상이 환해지며 오직 한 사람에게 신경이 쏠리는 이상 상태를 지랄병이라고 명명했다.
이에 올리비아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드신 게 뭐죠?”
“부정한 액체.”
“아니. 정확한 명칭이요.”
“사랑의 묘약.”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공자님이 겪고 계신 상태는 어떨 때 느낄 수 있는 걸까요?”
언어를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친절한 설명이었다.
머뭇거리던 카라얀이 대답했다.
“……사랑하게 될 때?”
“네! 맞아요. 그런데 제가 묘약은 공자님께 전혀 효과가 없다고 했죠? 그러면 지금 공자님이 느끼는 감정은 진짜라는 얘기가 될 거예요.”
“하지만……!”
“공자님.”
올리비아가 부정하려는 카라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실에 도달하려면 사감은 완전히 배제해야 해요.”
반박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올리비아는 분명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순간 그녀에게 기가 죽고 말았다.
“공자님. 보고 있으면 행복하고, 보이지 않으면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죠? 눈을 감아도 막 어른거릴 겁니다.”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서 뒤집어지려는 카라얀을 보며 올리비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을 때다 싶었다.
“그 사람입니다. 공자님은 바로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요!”
“…….”
“상태를 보니 정말 푹 빠지신 것 같네요.”
남의 연애를 즐겁게 구경하는 올리비아와 달리 카라얀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좋아한다고?
그 하얀 찹쌀빵 같은 애를?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카라얀은 여러 감정의 단계를 거쳤다.
‘그럴 리 없어. 그 애만큼 하찮은 존재를 본 적이 없는걸. 차라리 굴러다니는 감자를 좋아한다고 하지 그래.’
부정하고.
‘아니. 하필 내가 묘약을 마시고 이동하던 그때 딱 거기 있어서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아니. 그 귀여운 감자의 문제는 아니지.’
분노하고.
‘지금이라도 심장 녀석이 느리게 뛰면 봐주도록 하지. 없던 일로 쳐 줄 테니까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협상하고.
‘……하늘이 쓸데없이 맑네.’
우울하고.
‘그래. 좋아해.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우린 부부잖아? 좋아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수용하고.
‘단순히 아라벨과의 혼담을 막기 위한 혼인이어서 성인이 되면 이혼하게 될 예정이라도. 잠시만. 이혼?’
카라얀의 골이 ‘띵-’ 하고 울리며 그의 금빛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 문득 루미나가 언젠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혼은 안 돼요! 절대!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되는 거예요! 다신 이혼 소리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음. 이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 자신도 루미나를 좋아하니 굳이 이혼할 필요 없이 평생 함께 지내다가 죽을 때도 같이 묻히면 되는 거겠지.
‘앞으로 나도 뽀뽀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서로 좋아하니까 뽀뽀도 하고, 뽀뽀 이상도 이것저것 하게 되는……!
카라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타는 듯한 열기는 금세 목까지 번졌다.
만약 옷을 걷어낸다면 온몸이 빨개진 걸 볼 수 있을 듯했다.
이렇듯 카라얀이 성장통과 함께 한여름처럼 열렬한 첫사랑을 앓는 동안 무심하게도 계절은 바뀌고 있었다.
***
루미나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쨍그랑, 쨍그랑’ 하며 쌓이고 있을 돈만 생각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렇다고 정말로 먹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저택이 뒤집어지니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바쿠스를 팔기만 해도 어느 정도 돈을 벌겠지만…….’
살짝 애매했다.
루미나가 욕심쟁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봤다.
‘바쿠스가 하루아침 만에 아무도 사지 않는 제품이 될 리 없으니 앞으로 수익이 꾸준히 들어올 거야.’
하지만 그 금액이 점차 줄어들겠지.
아무리 장사가 잘되는 가게라도 꺾이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바쿠스는 철을 타지 않는 제품이야. 그래도 영원히 지금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없지.’
현재의 성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건 오늘내일까지만 살 하루살이나 하는 짓이었다.
루미나는 미래를 길게 봤다.
‘난 아직 어린 데다 십 년 뒤의 미래 같은 건 모르니까. 갑자기 쫄딱 망할 수 있잖아.’
이혼한 시점부터 죽을 때까지 쓸 자금이 필요했다.
‘집을 매입한다 해도 집에서 살다 보면 관리비가 들지. 매년, 꾸준하게. 그리고 사람이 그냥 사나? 매일 식사를 하는데. 또 몇 끼 굶는다 쳐도 씻고는 살아야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셈이었다.
들숨에 1실버.
날숨에 1실버.
엔디미온에게 가문을 완전히 넘겨주고, 카라얀과 이혼하면 루미나는 그냥 루미나가 된다.
십 년도 안 남은 미래에서 루미나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내 목표는 소박해. 교외에 있는 집 한 채를 사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사는 거지. 그런데 노후까지 생각하면…….’
역시 부족했다.
루미나는 자신이 욕망과 절제의 경계선에서 절제 쪽으로 딱 붙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당장 그 사람과 접촉하는 편이 낫겠지. 음,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브랜든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콧노래를 부를 것 같은 루미나와 달리 브랜든은 심각했다.
요즘 바빠서 그러나?
의아해하고 있는데 곧 의문이 풀렸다.
“매출이 줄었네요.”
“그게 말이야. 문제가 생겼어.”
“네? 무슨 문제요?”
브랜든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 봐.”
갈색 병이었다.
누가 봐도 바쿠스였다.
제품에 문제가 생겼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제품 자체가 바쿠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케슈.
병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