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89)화 (89/152)

으웩.

루미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속이 역해졌다.

“손수건이라도 줄까?”

“아뇨. 이런 일로 손수건을 더럽힐 수 없죠.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릴 테니까 괜찮아요.”

루미나를 호위하는 암월 기사단 소속 기사인 척 변장한 브랜든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낯이 살짝 창백해진 루미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라일리는 포기하죠.”

현재 바쿠스는 야근이 잦은 공업 지구에서만 입소문을 탄 제품이었다.

루미나는 바쿠스의 공급을 늘리는 데 발맞춰 대대적인 홍보를 할 예정이었다.

‘라일리 같은 유명 여배우를 미리 잡아놔서 홍보하게끔 만들면 판매 범위를 좀 더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일리가 모르간과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라일리의 성공은 예정돼 있어. 내가 죽기 전까지 라일리만 한 여배우가 나오지 않았지.’

오페라에 관심 없는 이들조차 그 이름을 알게 되는 명성.

그야말로 오페라의 유일한 별이라 불리게 될 라일리.

이만한 파급력을 가진 배우는 앞으로 없을 예정이기 때문에 그녀를 놓친다는 건 속이 쓰렸다.

하지만 모르간과 연인 사이이니, 그녀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무조건 발레스 일가를 택할 터였다.

‘이제 와서 내가 접촉해 봤자 언제라도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이야.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라일리가 모르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루미나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 어떤 짓도 불사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네 사촌과 연애 중인 걸 알았던 거야?”

“딱히 알고 싶지 않았어요…….”

“알겠어. 그 여자 이야기는 그만할게.”

루미나의 얼굴이 당장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종이뭉치처럼 사정없이 구겨졌다.

브랜든은 추궁을 그만뒀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사태에 대처할 수 있겠네.’

테레사가 이 사실을 알면 베케슈를 홍보하는 데 라일리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테레사는 라일리를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굴러 들어온 기회를 걷어찰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케이크 사러 가요.”

테레사가 베케슈를 공격적으로 홍보한다면 루미나 또한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면 되는 법이었다.

‘철저하게 무너뜨려 줘야지.’

다시금 다짐한 루미나는 케이크를 사러 갔다.

오늘은 유명 제과점에 케이크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외출을 나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안 바빠요?”

“또 지지부진해져서 말이야. 추적 도중에 실마리가 끊겼어.”

밖이라서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박사’에 관한 얘기였다.

“항상 이런 식이라서 괜찮아. 쉽게 잡힐 작자였다면 이미 예전에 잡았지.”

“…….”

“그래도 덕분에 공업 지구에 가서 네가 부탁한 물건을 의뢰할 여유가 있었어. 특허도 제출했고.”

루미나는 이 시대의 성실한 노동자인 브랜든의 등을 두드려줬다.

“케이크 먹고 힘내요. 제가 살게요.”

“힘이 나네.”

언제 축 처졌냐는 듯이 발랄하게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주변이 웅성거리더니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마, 마물이야!”

뭐?

루미나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제도 중심인데 마물이 있을 리가…… 어. 있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개구리처럼 생긴 커다란 마물이 도시 한복판에 덩그러니 있었다.

‘저 정도 크기면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중간에 잡혔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의문은 잠깐이었다.

개굴-.

낮은 울음소리를 낸 마물이 움직였다.

심지어 덩치가 웬만한 저택만 해서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수 있었다.

“으악!”

“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느라 바빴다.

이 와중에 케이크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아저씨. 어떻게 안 돼요?”

브랜든 또한 레기온이었다.

마물을 잡을 수 있는 레기온.

물론 루미나 같은 예외의 경우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몰랐다.

무고한 사람이 위험에 처한 이 난장판을 계속 지켜볼 수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보는 거다.

“마침 기사의 모습으로 나왔으니 멋진 모습을 제대로 보여줘야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브랜든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처럼 브랜든이 믿음직했던 적이 없었다.

개굴.

개굴개굴-.

브랜든이 검을 뽑아드는 동안 개구리 마물이 급격하게 루미나와 가까워졌다.

마물과 거리가 좁혀지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미나가 다급히 브랜든의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왜?”

“이 마물…….”

사람으로 가득 찼던 넓은 거리는 모두 재빠르게 피신하며 텅텅 비었다.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브랜든과 루미나뿐이었다.

루미나가 팔을 뻗어서 정확히 마물의 머리 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이었다.

퐁-.

시야가 완전히 차단될 정도로 연기가 났다.

주변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브랜든이 루미나를 끌어안아서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그리고 연기가 걷혔을 때는…….

“개굴?”

마물이 아까보다 훨씬 작아진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크기가 거의 손바닥만큼 줄어들어서 언뜻 평범한 개구리 같았다.

“……머리 위에 관이 쓰여 있어요.”

황금빛 관만 쓰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보다 원래 마물의 크기가 이렇게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마물은 몸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어.”

브랜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는 루미나를 제 뒤로 밀어내고서는 개구리 마물이 쓴 황금 관을 잡았다.

마물에게서 그걸 빼내려고 하니 마치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 개구리 마물까지 허공을 버둥거리게 됐다.

유심히 살펴보던 브랜든이 개구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황금 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황금 관이 반응하듯 번쩍였다.

“흑마법이야.”

그 순간 브랜든과 루미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가 있었다.

박사.

“마물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도 크기를 조절할 정도의 실력이면 한 명밖에 없지.”

“마물은 어떻게 할 거예요? 죽일 거예요?”

“깨꿀!”

루미나의 말을 듣자마자 개구리가 펄쩍 뛰었다.

브랜든이 한 손으로 황금 관을 잡고 있어서 높이 도약하지는 못했다.

루미나가 어리둥절하게 그것을 쳐다봤다.

“설마 말을 알아듣는 거야?”

“개굴!”

개구리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마물 얘기는 처음 듣는데. 아저씨는 어때요?”

“나도 마찬가지야.”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의사소통이 되는 데다 박사와 관련이 있었다. 이대로 놓아줄 수 없었다.

케이크는 이미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브랜든과 시선을 교환한 루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 마물의 정체를 파악해서 박사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브랜든이 조심스럽게 개구리 마물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돌아가려던 그때.

누군가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얀색 제복과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붉은 망토.

황실 소속 기사가 분명했다.

“아저씨! 저한테 주세요! 어서요!”

일순 브랜든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기사 복장을 한 브랜든에게 따로 주머니가 없는 터라 마물을 숨기기 여의치 않았다.

브랜든에게 개구리 마물을 넘겨받은 루미나는 다급히 그것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개구리가 버둥거렸다.

“쉿! 나쁜 사람들한테 잡혀가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 해!”

다행히 말 잘 듣는 개구리는 얌전히 가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때마침 황실 기사가 그들 앞에 섰다.

“분명 이 근처에 마물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상하네요. 주변에 있는 인간이 그쪽들밖에 없어서 그런데, 마물 못 봤나요?”

황실 기사는 루미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깊은 검은색 눈동자.

온화한 인상의 소년은 아직 어른이 아니었기에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때문에 제복이 부모님의 옷을 빼앗아 입은 것처럼 보일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루미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레기온이야.’

저 어린 소년이 장정 몇 명이 상대해야 겨우 잡을까 말까 한 마물을 해치우러 왔다.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레기온일 수밖에 없었다.

루미나는 개구리 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어쩐지 저 레기온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은데. 설마 눈치챘나? 내 가방 안에 마물이 있는 걸.’

루미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했다.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물이 분명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 사라졌습니다.”

브랜든이 나서서 대답했다.

하지만 황실 레기온의 시선은 오직 루미나만을 향했다.

“저희 어디서 마주친 적 없나요?”

“네, 네? 아뇨, 전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네요.”

그렇겠지. 한때 신문만 펼치면 보이던 얼굴이니까.

루미나는 자신이 하트 공자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정체를 밝히면 왠지 귀찮아질 것 같았다.

‘레기온이랑 엮어서 좋지 않아.’

“저와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는 거겠죠. 그러면 기사님.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바빠서요.”

“그렇다면 카라얀과 아는 사이인가요?”

“……네?”

루미나가 당황한 사이 소년이 거리를 훅 좁히더니 루미나의 목덜미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냄새가 나는데.”

오소소-.

솜털이 쭈뼛 서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브랜든이 곧바로 루미나를 감쌌다. 그리고 진짜 기사인 것처럼 말했다.

“무례하다. 이분이 누군 줄 알고.”

“누구길래?”

“이분은 바로…….”

“개굴!”

“개굴?”

소년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가방 속에 있는 게 답답한지 개구리 마물이 소리를 냈다.

망했다.

루미나는 다급히 대치 중인 두 남자 사이에 쏙 끼어들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백성들의 치안과 안전을 위해 오늘도 힘내십시오! 그러면 안녕히!”

본인 할 말만 줄줄 늘어놓고 브랜든과 함께 쌩하니 사라졌다.

소년이 눈 깜짝할 사이 루미나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음.”

만약 따라잡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뭔가 숨기는 기색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이없다는 듯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소년이 루미나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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