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제스퍼 님!”
소년, 제스퍼와 같은 복장을 한 황실 기사가 달려왔다.
그는 제스퍼보다 나이가 훌쩍 많았지만 깍듯이 존대했다.
“역시 레기온인 제스퍼 님이십니다. 마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던데 사체는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네?”
“마물 같은 거 내가 왔을 때 없었다고요.”
“그럴 리가.”
기사가 당황했다.
“마물을 저도 봤고, 제스퍼 님도 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도망친 사람들을 인솔하면서 일관된 증언도 받았는데…….”
하지만 제스퍼의 관심은 이미 마물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얼굴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름 모를 소녀.
머릿속에 오직 그뿐이었다.
“평범한 귀족 아가씨 같던데. 어째서 카라얀의 냄새가 난 거지?”
한두 번 스친다고 해서 묻어나오는 냄새가 아니었다.
같은 생활 반경에 오래 있었던 것처럼 진한 냄새가 불쾌하게도 코끝을 맴돌았다.
“네? 카라얀이라면 하트 가의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사는 갑자기 사라진 마물에 대해 보고하다가 제스퍼가 엉뚱한 말을 중얼거리는 걸 듣고 되물었다.
제스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트 공자님이라면 현재 자택에 머물러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라얀 폰 하트.
잦은 폭주로 인해 위험성이 매우 높은 레기온.
황실 기사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설마 아까 그 마물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냄새가 나서요.”
“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공자님께서는 요즘 죽고 못 사는 아내가 생겨서 더는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한…….”
기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홱-.
고개를 돌린 제스퍼가 그를 노려보듯이 쳐다봤기 때문이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거대한 마물 앞에 선 기분이었다. 간이 쪼그라들었다.
“결혼했어요?”
“예?”
“그 녀석이 결혼했냐고요.”
“네, 네.”
저번에 같이 신문도 보지 않았던가.
처음 듣는 소식이라는 것처럼 반응하는 제스퍼가 의아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레기온이라는 족속들은 원래 기억도 선택적으로 하지.’
경비가 삼엄한 제도는 평화로웠다. 때문에 굳이 레기온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단 한 명의 레기온을 배치했는데, 그게 바로 제스퍼였다.
평범한 인간인 기사는 저보다 어리지만 강대한 힘으로 상사가 된 제스퍼가 불편했다.
레기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은 결코 함께 일하기 편한 부류가 아니었다.
‘최전방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오늘도 강렬한 염원을 담아 빌었다.
바로 옆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는 제스퍼는 뒤늦게나마 루미나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빠르게 추적을 포기했다.
그새 또 흥미가 식은 탓이었다.
‘카라얀과 연관이 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잔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카라얀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냄새 끝에 설탕처럼 달콤한 냄새가 어렴풋이.
그 하얗고 말랑한 얼굴과 어울리는 냄새였다.
***
루미나와 브랜든은 무사히 제스퍼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루미나가 물었다.
“누구예요?”
“레기온.”
“아니, 그건 저도 알고요. 그 레기온이 카라얀 님을 알고 있었잖아요.”
“보통 카라얀이 폭주할 때 암월 기사단이 가서 제압해.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가끔 다른 레기온의 도움을 받아.”
“…….”
“황실 입장에서는 카라얀이 걸어 다니는 폭탄이나 마찬가지니까. 치안 활동 중 하나로 생각하는 거지.”
“거의 마물 취급이네요.”
“비슷하지. 솔직히 그동안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폭주하지 않았다면 황실에서 카라얀의 거취를 더 엄중하게 다뤘을걸.”
언제, 어떻게 사람을 해칠지 모르는 재앙 같은 존재였다.
그의 취급에 대해 더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까 그 레기온과 카라얀은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닐 거야.”
“하지만 하트 공자라고 하지 않고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던걸요.”
“보통 레기온들은 예절 교육을 배우다가 말아서 이름으로 턱턱 부르는 애들이 많아.”
아…….
루미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그 레기온. 카라얀 님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렇겠지. 폭주할 때마다 불려가야 하는 데다 카라얀은 등록된 레기온인데도 징집되지 않았잖아.”
“하트 공자라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레기온은 마물 토벌의 의무를 가졌다.
그러나 카라얀도, 루키우스도 마물을 처리하러 불려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공작가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능력이 불완전하니까 넘어가 준 거지. 그쪽도 감당이 안 된대.”
“그러면 아버님은요?”
“미치광이잖아. 한때 레기온을 학살한 사람한테 어떻게 다른 레기온이랑 지내라고 하겠어.”
같은 레기온도 꺼리는 레기온이었던 것이다.
괜히 그 오만방자한 아라벨이 루키우스를 언급만 해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한창때는 레기온 중 레기온이라고 불릴 만큼 혁혁한 업적을 쌓았는데, 그 뒤로는 잠정 은퇴한 상황이야.”
제정신이 아니라는 레기온 중에서도 가장 미친놈이어야 국가의 의무를 피할 수 있구나 싶어졌다.
‘역시 내가 레기온인 걸 황실에 알리지 않는 게 옳았어.’
냄새가 난다며 다짜고짜 목덜미에 코를 박는 자와 지내는 건 루미나도 사양이었다.
“개굴!”
잠깐 잊고 있었던 개구리 마물이 가방 밖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얘는 마물이 맞을까요?”
“고르프라고 불리는 하급 마물이야. 그 어떤 고르프도 황금 관을 쓰진 않고, 얘처럼 크기가 엄청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지만. 사람 말을 알아듣지도 않고 말이야.”
루미나는 개구리를 손등 위에 올린 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제도 한복판에서 마물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도 아니면 금세 작아졌기 때문에 신문 기사로도 언급되지 않았던 걸까.
‘작아져도 마물은 마물이야. 사람을 해치지. 그런데 얘는 크기가 컸을 때도 사람을 해치려고 한 것 같지 않았어.’
그냥 몸이 커서 움직일 때마다 피해가 늘어났을 뿐이지.
“정 의심되면 가슴을 갈라서 마석의 여부를 확인해 보자.”
“깨꾸우울!”
루미나가 개구리 마물을 의심스럽다는 듯 살펴보는 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브랜든이 농담조로 말했다.
진담으로 받아들인 개구리가 안쓰럽게 울었다.
그 와중에 도망치지는 않았다.
“아저씨. 그만 놀려요.”
브랜든을 툭툭 친 루미나는 그새 개구리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안 죽일 거야.”
“개구우울…….”
죽이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힘이 없었다. 브랜든이 개구리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피부가 말랐네. 물이 필요한 것 같은데 빨리 이동하자.”
근처에 우물이 없었다.
조금 전 소동으로 주변에 사람도 없었고.
루미나와 브랜든은 뛰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개구리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박사를 잡을 수 있는 실마리가 돼 줄 거야. 여기서 허무하게 죽으면 안 돼.’
마물에게도 능력이 통할까?
사람과 레기온에게도 통한 능력이었다. 루미나는 더 고민할 것 없이 말했다.
“개구리야. 잠깐 눈 감아 볼래?”
“개굴.”
“꼬마 마님. 너 설마.”
루미나가 무슨 일을 할지 눈치챈 브랜든이 루미나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루미나가 더 빨랐다.
빛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나비 한 마리가 개구리의 머리 위에 앉았다.
루미나는 순간 갈증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한테는 비밀로…….”
루미나가 말하던 중이었다.
퐁-.
또다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아니, 아픈 곳은?”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개구리가 보이지 않아요.”
손바닥이 허전했다.
개구리가 사라진 것이다.
곧이어 연기가 걷혔다. 루미나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봤다.
그런데 이질적인 물체가 앞에 있었다.
바로.
“허억!”
사람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여자가 개구리 대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혹시 개구리이신가요?”
허무맹랑한 질문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정황이 개구리 마물이 사람이 됐다는 걸 가리켰으니까.
심지어 여자의 옆에는 자그마한 황금 관이 놓여 있었다.
“뭐, 뭔가 제가 개굴거리던 기억이 드문드문 나요. 끔찍한 느낌이었어요!”
여자가 치를 떨었다.
개구리 마물이 사람이 됐다.
아니, 원래 사람이었다.
사람이 마물이 된 것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하나요?”
“제 이름은 셀렌이에요. 길을 가던 도중에 어떤 노인이 제게 몸이 불편하니 도와달라고 해서 다가갔더니 갑자기 이 관을 씌웠어요.”
“…….”
“마지막으로 저를 보면서 실패작이라고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나요.”
황금 관을 회수한 브랜든이 경계의 눈빛을 했다. 루미나 또한 긴장하게 됐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직 박사뿐이었다.
게다가 노인이라고 했으니 그자가 직접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금기라 불리는 흑마법을 이용해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사람을 마물로 변모시키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키고 말았다.
‘실패작이라고 한 걸 보면 본인이 의도했던 것과 달랐던 모양이지.’
개구리 마물이 커졌다가 작아진 것만 봐도 불완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박사는 흑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를 부숴버리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제정신이 아니야. 제대로 돌았어.’
어째서 브랜든과 루키우스가 박사를 마주하면 도망가라고 했는지 확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죠? 설마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니겠지?”
셀렌은 정신을 잃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걸 알고 안도했다.
“급한 약속이라도 있나요?”
“내일 오디션을 볼 예정이라서요.”
“오디션이라면 혹시 ‘백조와 흑조’를 말하는 거예요?”
“네. 맞아요. 꼬마 아가씨께서 오페라에 관심이 많나 봐요.”
본인의 전문 분야가 나오자 열성적으로 대답한 셀렌이 웃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백조와 흑조>
라일리 킨즈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 줄 운명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