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91)화 (91/152)

“와. 저 오페라 배우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된 건 처음이에요!”

눈 깜빡할 시간 동안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결정을 마친 루미나가 순진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렇게 거창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직 무명이고, 오디션도 번번이 떨어져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있어요.”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셀렌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보다 제가 왜 그런 이상한 일을 당했는지 아시는 게 있나요? 도움을 주신 것 같은데 감사하다는 말을 아직도 못 했네요!”

일부러 씩씩한 척하려는 티가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개구리 마물이었던 걸 고려하면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기억이 드문드문 남은 것도 오히려 도움이 된 듯했다.

“그게…….”

루미나는 브랜든과 눈빛을 교환했다. 요즘 죽이 착착 잘 맞는 브랜든이 나섰다.

“저는 하트 공작가 소속, 암월 기사단의 기사입니다. 살펴본 결과, 아가씨께서는 흑마법과 연루됐습니다.”

“네, 네? 제가요?”

쿵.

셀렌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서 썩어가는 미래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황실에서 이 사실을 알면 아가씨는 큰일이 나겠죠. 사정을 들어보니 운 나쁘게 엮인 것 같은데, 오늘 일을 함구하기로 약속하면 저희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흑마법이었다니! 어쩐지 끔찍한 기분이었어요.”

셀렌이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런데 이쪽이 암월의 기사님이라면 설마…….”

셀렌이 루미나를 쳐다봤다.

경황이 없는 데다 ‘설마’ 하는 마음에 그냥 넘겨짚던 정체가 확실시된 것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그 이름이 맞아요. 그보다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 사인이요?”

“네! 무려 오페라 여배우라고 하니까 사인을 받아두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가치가 없는걸요.”

“지금 그렇다고 해도 나중에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제가 사인도 못 받을 만큼 멋진 배우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 잠깐만요.”

퍽 순진한 루미나의 말을 듣고 얼굴을 빨갛게 붉힌 셀렌이 종이와 펜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 댔다.

“죄송해요. 저도 사인을 해 드리고 싶은데 종이와 펜이 없어요.”

회복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감정이 극한에 다다랐는지 셀렌이 울먹거렸다.

흑마법에 연루된 것보다 사인을 할 수 없는 게 더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정말 안 풀리는 날이에요. 노인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흑마법에 당하고, 처음으로 사인을 할 기회가 왔는데 종이도 펜도 없다니……!”

셀렌은 훌쩍이며 절망했다.

그녀로서는 지지리도 운수 나쁜 하루라고 할 법했다.

“셀렌. 사인을 할 수 없다면 제게 연기를 한번 보여줄 수 있어요?”

“네?”

“오디션을 위해 준비했을 거 아녜요. 궁금해요!”

루미나의 사랑스러운 눈빛과 마주한 셀렌은 잠깐 고민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

셀렌이 노래를 부르며 백조가 된 여자 주인공을 연기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노래를 잘 부를 줄 아는 배우.

무대 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배우가 많은 만큼 이만한 실력자들 또한 많았다.

‘유명 배우가 초코 쿠키라면 셀렌은 초코 칩 없는 쿠키 같은 거지.’

루미나는 냉정한 속내를 감추고는 박수를 치며 꿈 많은 젊은 아가씨를 격려했다.

“다른 분들도 듣더니 폭 빠질 만한 울림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도 좋아해줘서 감사해요.”

셀렌은 부족한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코 칩 없는 쿠키에 초코 칩이 생긴다면?’

진정한 초코 칩 쿠키로 거듭나게 되는 거다.

“제가 오페라를 잘 모르지만, ‘백조와 흑조’는 사람이 동물이 된 이야기잖아요.”

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리가 됐을 때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죠? 물론 다르긴 하지만, 기억을 토대로 연기하면 어떨까요?”

“개구리가 됐을 때 불쾌했을 뿐인데 과연 그게 같을까요?”

“똑같죠! 두 손과 다리는 자유롭지 않고, 말하고 싶어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잖아요.”

백조가 개구리보다 덜 호불호가 갈리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해도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

“불쾌하고, 두렵고, 끔찍하고. 백조가 될 때마다 그런 기분이겠죠.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루미나의 말을 듣고 셀렌은 뭔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했다.

그렇지만 영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셀렌. 하루 종일 나쁜 일만 있다고 했죠.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말아요.”

“…….”

“어쩌면 오늘의 불행이 내일을 위한 행운의 디딤대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불행을 짓밟고 올라가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거군요. 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하트 공자비님이에요!”

셀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러면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좋은 의미로 한 격려가 살짝 왜곡되었지만, 루미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인은 다음에 받을게요! 오페라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캐스팅되길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셀렌이 엄청나게 감동받은 표정을 했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루미나는 브랜든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꼬마 마님은 저 여자가 주연으로 캐스팅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브랜든은 영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언제는 확신하더니 오늘은 그러지 않네.”

“제가 신은 아니잖아요.”

성공이 확정된 라일리 킨즈.

박사의 계략에 휘말려서 어쩌면 오늘 죽을 운명이었던 셀렌.

셀렌이 우연히 목숨을 건졌다고 해도 라일리 대신 그녀를 지지하는 건 미련하기 짝이 선택이었다.

‘확정된 돈주머니를 걷어차고, 너덜너덜한 천 쪼가리를 택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루미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미래는 바뀌는 것이니까.

“오늘 네가 능력을 쓴 건 대장한테 보고할 거야.”

“우우. 배신자.”

“하지만 네 능력 덕에 흑마법이 약화된 것처럼 보였는걸. 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대장도 수상쩍게 여길 거야.”

“으음, 알겠어요.”

박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목적이 있을 거 아녜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나 싶을 때가 많거든.”

“…….”

“특히 레기온을.”

박사는 레기온을 납치하고, 실험했다. 그리고 레기온인 루키우스는 그를 원수처럼 대했다.

“혹시 아버님께서 그자한테 큰일을 당했던 건가요?”

“그, 대장은 아니고.”

무언가 말하려던 브랜든이 뇌에 힘을 팍 줬다.

“아니. 이 얘기는 개인사니까 대장한테 듣는 게 맞아.”

“네. 그럴게요.”

“아니. 그래도 일단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대장의 아픈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거니까. 단 한 번만! 간단하게 말할게.”

‘아저씨, 지금 자아가 분열하고 있어요…….’

루미나가 브랜든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예전에 카라얀이 박사한테 납치당한 적 있어. 공작부인과 함께.”

루미나는 작게 탄식했다.

“알겠지? 대장에게 좋지 못한 화제라는 걸.”

“아저씨.”

“응?”

“혹시 그날 비가 왔었나요?”

“루미나.”

브랜든이 경고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비가 내린 날 어머니와 납치당한 어린 카라얀.

비가 내리면 어머니가 죽었던 날이 떠오른다며 힘들어했던 카라얀.

그녀의 어머니, 아이리스와 함께 레기온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날에는 비가 내렸다.

‘박사는 레기온에게 집착한다고 했지. 납치한 전적도 있고.’

제정신이 아닌 박사가 과연 한두 명의 레기온만 납치했을까?

‘그렇다면 대학살날 죽은 레기온들은…….’

박사에게 납치당하고 실험당한 이들일 터.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생각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박사는 레기온뿐만 아니라 평범한 인간조차 실험체로 쓰는 걸 서슴지 않아.’

어쩌면 박사가 공작부인에게조차 손을 대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라면.

루키우스가 사랑하는 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면.

루미나의 상념은 그 이상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브랜든이 분위기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자의 낌새가 심상치 않으니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자. 바쿠스 건은 내가 앞장서서 처리할게.”

“아저씨 바쁠 거잖아요.”

황금 관을 수거했으니 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사를 추적할 터.

그런데 브랜든이 이상할 정도로 당당했다.

“난 유부남이야.”

“……저도 유부녀예요.”

루미나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그 노인네를 추적하는 건은 유능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기까지 한 내 아내와 함께한다는 거지.”

“올리비아한테 떠맡긴다는 거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것 같잖아.”

흑흑. 브랜든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부탁할게요. 제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저씨뿐인 거 알죠?”

“애가 어른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니까.”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는지.

브랜든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루미나를 바라봤다.

***

테레사는 높고 거대한 금화 더미에 앉아서 화려한 부채를 살랑이며 ‘호호’ 웃는 꿈을 꿨다.

그녀는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꿈에서 깼다.

하지만 전혀 허무하지 않았다.

꿈이 현실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 그녀에게 들려온 소식은 꿈과 완전히 달랐다.

“망했어요!”

아이작이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테레사는 남편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판매량을 듣고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역작, 베케슈의 요 근래 판매량은 0.

제로였다.

최근 제조 물량을 늘리기 시작한 걸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엄청난 마이너스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왜 그런 거예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이게.”

아이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말로 설명해선 바로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같이 밖으로 나가서 확인하죠.”

테레사는 아이작을 따라서 나갔다.

곧이어 어째서 그들이 망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목격하고 어이없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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