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93)화 (93/152)

루키우스의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맨 마지막 페이지를 보며 말하고 있긴 한데, 정말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 가는 행보였다.

탁-.

그가 매정하게 책을 덮었다.

그리고 옆에 쌓인 다른 동화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첫 번째 동화책 낭독이 끝난 것이다.

뒤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올리비아가 “감수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레기온…….”이라고 중얼거렸다.

루미나는 속으로만 공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자, 침묵하는 자가 있다면 진실의 입을 나불대는 자가 또 따로 있었으니.

거칠 것 없는 카라얀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성의 있겠네.”

카라얀과 루키우스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루키우스가 손을 움직였다.

‘설마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근래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보다는 많이 호전됐다고 하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경직된 분위기가 흐르던 그때였다.

쓰윽-.

루키우스는 카라얀 쪽으로 동화책을 내밀었다.

“읽어라.”

루미나 또한 차라리 카라얀이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 기세면 아버님이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학살당한 얘기만 들을 것 같은걸.’

차라리 딱 한 권 제대로 낭독을 끝내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편이 이득이었다.

“저도 카라얀 님이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고 싶어요!”

그래서 루키우스 의견에 가세했다.

“윽.”

어이가 없어서 그냥 해 본 말이었다.

그렇지만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한 루미나가 고운 목소리로 조르니 도저히 싫다고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동화책을 펼쳤다.

크흠흠.

목을 가다듬고 루키우스와 달리 제대로 된 시작을 알렸다.

“옛날, 옛날에…….”

그 순간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카라얀은 힐끔 동화책 너머를 봤다.

그리고 루미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간질간질.

가슴께가 간지러워지더니 심장이 팡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아, 안 돼.’

동화책 낭독을 아주 제대로 해서 겸사겸사 멋진 모습을 보여줄 계획이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모든 게 완벽해 보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그런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하고 있는 루미나가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카라얀이 힘겹게 동화책을 이어서 읽었다.

“……다 죽었어.”

동화책이 덮였다.

시작하자마자 끝난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난리가 난 카라얀의 마음을 모르는 루미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멸이야. 완전히 전멸.’

꿈과 희망이 넘치는 동화는 없었다.

‘레기온들한테는 동심도 낭만도 없어! 글러 먹은 거야.’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지.

자신 또한 레기온이지만 이곳의 유일한 정상인이라는 걸 인정한 루미나가 나섰다.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아버님이랑 카라얀 님께 동화책을 읽어드릴게요!”

“어머, 어머. 작은 마님이 낭독해 준다고 하니 너무 기대되네요. 안 그런가요, 공작님?”

작은 마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질 것을 상상하자 올리비아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부자가 같은 핏줄인 걸 인증하듯 답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과장되게 말하는 듯했다.

‘유일한 인간인 올리비아. 힘내……!’

올리비아를 응원한 루미나가 탑처럼 쌓인 동화책의 무덤에서 한 권을 꺼냈다.

마침 오페라 <백조와 흑조>의 원작 동화책이었다.

“옛날, 옛날에…….”

악마의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공주 오데트가 있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가 필요한 그녀를 왕자가 우연히 발견한다.

왕자는 오데트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들에게 고난과 역경이 존재했으니.

바로 악마의 딸 오딜이었다.

왕자가 오딜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 모습을 지켜본 오데트는 슬픔에 빠진다.

그러나 이 책은 어린이용 동화책이었으므로 여차여차해서 왕자는 오데트를 향한 진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왕자에게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받은 오데트는 저주가 풀리고 해피엔딩.

“끝!”

짝짝짝-.

역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올리비아였다.

낭독이 끝나자마자 루미나의 기를 살리기 위해 박수부터 쳤다.

어화둥둥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쉬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루미나는 미소를 흘렸다.

멀뚱히 앉아 있던 하트 부자가 뒤늦게나마 올리비아를 따라서 박수를 쳤다.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곧 이 동화를 기반으로 한 오페라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보고 싶은데…….”

일부러 뒷말을 흐린 루미나가 간절한 눈빛을 하며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안 될까요?”

“그래. 보러 가도 좋다.”

“공작님!”

이성이 남아 있던 올리비아가 다급히 루키우스를 말렸다.

최근 박사의 행보로 루미나 혼자 외출하게 내버려두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챈 루미나가 빠르게 기운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걸요.”

“그렇다면 내가 동행하도록 하지.”

“아버님께서요? 좋아요! 그러면 카라얀 님도 같이 가도록 해요!”

카라얀은 오페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루미나가 저토록 좋아한다면 오늘부터 가장 관심 있는 분야가 될 것이다.

“네가 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고개를 살짝 비스듬하게 돌린 카라얀이 툴툴거리듯이 긍정했다.

***

<백조와 흑조>의 여자 주인공.

원래 오데트 역할의 여배우는 오데트와 오딜을 함께 연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고민 끝에 일인이역이 아닌 일인일역으로 캐스팅을 진행했다.

바로 라일리와 셀렌.

라일리는 흑조를, 셀렌을 백조를 연기하게 됐다.

이 소식은 모르간에게 전해졌고, 모르간은 부모님께 연인을 소개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백조와 흑조>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오페라 극이었다.

‘라일리는 주연 자리를 꿰찼으니 이번 극에서 성공하면 부모님께서도 인정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오페라를 보러 가자고 말했지만, 테레사의 반응은 싸늘했다.

“지금 우리한테 그럴 돈이 어디 있니!”

빚더미에 앉았건만 테레사는 여전히 사치를 일삼았다.

무의식중에 소비를 일삼는 게 습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습관은 발레스 가문의 목을 점점 더 죄어 왔다.

“입장권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것까지요.”

모르간은 분노한 어머니와 지친 아버지의 눈치를 힐끔 보며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기분 전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 연인이 주연으로 나와서 꼭 보러 와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라 배우는 보통 평민이었다. 테레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평민이니?”

“네. 하지만 유명해지면 귀족 못지않은 부와 명성을 얻게 되니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머니. 부탁드릴게요.”

자식을 이길 수 있는 부모는 없었다.

아이작은 빚을 처리하느라 바빠 결국 테레사만이 모르간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다.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하는 극이라더구나.”

“네. 어머니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그들은 일찍 와서 공연 전에 잠깐 라일리를 만났다.

짧은 대화 후, 대기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테레사는 어쩐지 주변이 소란스러운 걸 느꼈다.

웅성웅성-.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테레사가 눈살을 찌푸리던 중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를 듣게 됐다.

“너는 하트 공작님 얼굴 봤어? 심지어 공자님과 공자비님까지 왔다던데!”

“아까 운 좋게도 봤지. 초연인데 이런 거물이 찾아오다니. 역시 소문대로 훌륭한 극인가 봐.”

“배우는 모르는 얼굴이지만, 어차피 카멜라가 몰락한 이후에는 다 비슷비슷하니까.”

테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미나……!’

그 계집이 이곳에 온 것이다.

“모르간, 들었니? 제 어미를 쏙 빼닮아서 정신 나간 계집이 왔다는구나! 악귀 같은 계집이 말이야.”

“어머니를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친척이 힘든 와중에 연락 한번 하지 않는 주제에 유흥을 즐기러 오다니. 뻔뻔하군요.”

“다 제 어미를 닮아서 그렇지. 말도 마라. 네가 그 어미의 기행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테레사는 루미나의 어머니인 클로이의 만행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제 동생을 음습하게 따라다니는 건 물론, 연적이 생기면 악랄하게 괴롭혔다.

클로이가 보낸 연서가 매일 수십 장씩 저택으로 날아왔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헨리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금기를 깨고 흑마법에 손을 댈 것 같은 눈치였지. 그때 정확한 증거를 잡아서 쫓아냈어야 했는데!”

두 사람의 결혼을 막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랑슈스의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됐을 텐데.

“그 세 치 혀로 엔디미온을 어떻게 구슬린 건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어머니. 어른 말을 귓등으로 알아듣는 망할 꼬맹이를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공자비라고 불리게 돼서 눈에 뵈는 게 없을 테지만, 곧 버려질 게 분명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벌써 일 년이 넘게 지났어! 그동안 하트 공작이 루미나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지!”

“소문은 지어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지어낸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목격자가 많았다.

테레사의 얼굴에 불만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 그들은 레기온입니다. 그리고 루미나는 평범한 인간이고요.”

“…….”

“하트 공작의 총애만큼 덧없는 것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한집에 레기온이 둘이나 있으면 결혼 생활이 지옥 같을 테지.”

그제야 테레사는 솔깃해진 듯했다.

“맞습니다. 한두 해 정도는 무던하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하트 공작의 마음입니다.”

이때다 싶어서 모르간이 루미나에 대한 욕설을 섞으며 테레사를 달랬다.

“그 망할 꼬마는 나중에 가서야 레기온과 엮인 걸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저흰 그때 비웃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테레사의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맞은편에서 루미나가 제 몸만 한 꽃다발을 든 채로 쫑쫑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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