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94)화 (94/152)

꽃다발이 원체 큰 탓에 루미나는 테레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 루미나를 알아본 테레사는 사납게 소녀를 노려봤다.

시야가 가려진 탓에 루미나가 휘청거렸다. 곧바로 중심을 잡고 차렷 자세로 서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렇지만 루미나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은 귀여우면 귀엽다고 솔직하게 말해 줄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들, 애쉬였지.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다 못한 애쉬가 호위로서 역할에 임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내가 직접 줘야 의미가 있다니까!”

“그러면 대기실 앞까지만…….”

루키우스와 카라얀이 대신 꽃다발을 들어줄 테니 같이 가겠다고 한 걸 겨우 말리고 애쉬만 동행하고 있었다.

‘아버님과 카라얀 님을 가까이서 보면 셀렌은 오늘 공연을 절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야.’

자신이야 워낙 물렁하게 생겨서 공자비라고 해도 ‘그렇구나’ 할 테지만, 루키우스와 카라얀은 달랐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압감을 주니 긴장한 셀렌이 실수라도 할까 봐 겨우겨우 떼어냈다.

‘이제 꽃다발을 들어주겠다는 핑계로 따라올 아버님도, 카라얀 님도 없으니까 괜찮으려나.’

“알겠어. 그러면 대기실 바로 앞까지만 부탁할게.”

휴우.

애쉬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조마조마했나 보다.

꽃다발을 넘긴 루미나는 뒤늦게 테레사와 모르간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못 본 척하고 지나가려고 할 때였다.

“친척 어른이 바로 앞에 있는데 쌩하니 지나가다니. 아무리 결혼해서 작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니 저를 낳아준 아비를 모욕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거겠지.”

“어머. 안녕하세요.”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루미나가 능청을 떨었다.

“제가 저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사람이랑만 대화를 해서요. 거기 계신 줄도 몰랐네요.”

빠득.

이를 간 테레사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따지듯이 말했다.

“저번에 엔디미온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더니 모든 권한이 네게 있다고 하더구나.”

“도움이요? 어떤 도움을 청하셨는데요?”

“……돈 말이다.”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보다 잘 먹고, 잘 사실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요즘 사정이 좋지 않다. 결국 지나갈 일일 테지만,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음. 돈 문제라면 제가 장녀니까 엔디미온이 당연한 대답을 했네요.”

현재 랑슈스의 재산은 전문가한테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루키우스가 실질적인 대리인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저를 찾아오지 그러셨어요.”

“거절당하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겠니.”

“그건 몰랐네요. 전 또 고모님께서 저보다 잘 먹고, 잘 사실 거니까 잘 지내고 계시는 줄 알았죠.”

“혈육의 정도 없는 무심한 것.”

동생이면 몰라도 저보다 훨씬 어린 애한테 구걸하듯 돈을 빌리는 건 영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상대가 저를 놀리고 있는 게 뻔히 보이면 더더욱.

보다 못한 모르간이 나섰다.

“네가 어머니와의 앙금이 남아 있는 건 알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면 친척이 어려울 때 작은 도움의 손길 정도는 내밀어 줄 수 있겠지.”

“…….”

“가진 것도 분에 넘칠 정도로 많지 않느냐.”

“모르간!”

“어머니. 지금 사람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벼랑 끝에 서 있긴 한가 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 보면.

‘문제는 전혀 도움을 청하는 사람 같지 않은 말투라는 거지.’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모자는 루미나에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저들끼리 난리였다.

보다 못한 루미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정말 같은 피가 흐르는 친척이라고 생각했다면.”

신파를 찍던 모자가 루미나를 돌아봤다.

“제 욕을 하고 다니면 안 되죠.”

“내가 언제 네 욕을 했다고……!”

“망할 꼬마.”

“…….”

“곧 버려질 것.”

루미나의 분홍 눈동자가 싸늘했다.

“복도에서 얼마나 크게 떠드셨는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듣겠더라고요.”

“아, 아니. 나는.”

“내 도움 없이 어떻게 잘 사나 보자.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무릎을 꿇고 빌어도 도와주지 않을 거다!”

루미나가 대본을 읊듯, 갑자기 과장된 어조로 외쳤다.

모르간과 테레사가 당황했다.

본인이 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테레사를 마주 보며 루미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부모님의 장례식 날 고모님이 제게 하신 말씀이죠. 지금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더는 들을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그들을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만약 검은 형체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모르간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윽!”

“모르간! 이게 무슨…….”

테레사가 당황했다.

모르간의 목을 졸라 죽일 듯이 구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미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카라얀 님.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잖아요.”

“꽃다발 들어주려고 왔지.”

카라얀은 불안하게 걸어가던 루미나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뒤늦게 따라왔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랑 뭐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나 해서 두고 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깜짝 등장으로 ‘으악!’ 하고 놀랄 루미나의 귀여운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다.

뺨까지 살짝 붉어질 정도로.

만약 그 좋은 청력으로 테레사와 루미나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루미나의 깜찍한 표정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너와 만나기 전에 찢어 죽였지.”

금빛 눈동자가 살기를 담고 있었다.

“카라얀 님!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네 험담이나 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뭐? 돈까지 빌려달라고?”

“그래서 안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걸로 될 리 없잖아!”

넌 왜 그렇게 착해?!

카라얀의 눈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한동안 ‘퀸 메를로’로서 발레스 가문을 쫄딱 망하게 했던 루미나는 속이 답답해졌다.

어차피 망할 사람이에요!

그리 소리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카라얀 님의 고운 손에 살생은 어울리지 않아요!”

다소 비장한 외침이 되었다.

“……그래.”

맞는 말이 하나도 없었지만, 루미나가 한 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긴장이 탁 풀렸다.

동시에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고, 루미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꺼져.”

카라얀이 모르간을 거칠게 놓아줬다. 그리고 경고했다.

“다시 한번 내 눈에 보이면 그때는 정말로 피를 보게 될 줄 알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모르간과 테레사가 도망쳤다.

***

테레사가 다녀간 이후 라일리는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곧 극이 시작되는데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악역이라니. 난 또 주연이라길래 여주인공 배역을 맡은 줄 알았더니 악역이었구나.”

“어머니.”

“얘도 참. 내가 해선 안 될 말을 했니? 같은 주연이라도 악역보다 주인공이 주목을 받는 게 당연해서 한 말인데.”

‘백조는 나야! 나였다고!’

셀렌만 없었어도 흑조뿐만 아니라 백조 역할까지 차지하는 건 라일리, 그녀가 됐을 거다.

고작 그런 역할 하나 맡았다고 자신을 불렀냐는 듯, 냉담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테레사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라일리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

결국 카라얀과 함께 대기실로 향하던 루미나는 수상한 장면을 발견했다.

복도에서 어떤 여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이다.

그녀는 가루가 든 봉투를 다급히 주머니 속에 숨겼다.

‘뭐지?’

의문은 그녀가 루미나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풀렸다. 그녀는 컵을 두 개 들고 있었다.

‘뭘 넣었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가 대기실로 들어가는 걸 루미나는 그보다 늦게 대기실로 갔다.

“셀렌 양. 긴장 때문에 목이 마르지? 이거 마시도록 해.”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드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 것도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여자는 셀렌에게 가루를 탄 음료를 건넸다.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그 장면을 발견한 루미나가 쪼르르 달려갔다.

“셀렌!”

“하트 공자비님!”

“하트 공자비?”

셀렌의 심신 건강을 위해 카라얀은 밖에 세워두고 온 루미나가 거대한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선물이에요. 결국 제 말대로 오페라 극장에서 다시 만나게 됐네요.”

“그러게요. 그날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인해 줘요!”

“자, 잠깐만요. 이 근처에 종이와 펜을 뒀는데. 어디 갔더라. 정말 어디 있지.”

셀렌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루미나는 멀뚱히 서 있는 다른 여자를 쳐다봤다.

“누구세요?”

“라일리 킨즈예요.”

라일리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을 바로 알아보지 않자 열등감을 느낀 듯했다.

“아! 흑조 역할! 라일리도 사인해 줄래요?”

“네. 그러죠.”

언제 딱딱하게 굴었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라일리가 근처에 있던 펜과 종이를 쉽게 찾아냈다.

그동안 루미나는 화장대 위에 있던 컵 두 개를 슬쩍 바꿔치기 했다.

“사인은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러면 곧 극이 시작될 테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공자비님. 꽃 선물 감사해요.”

감사해야 할 일이 그뿐만이 아닐 거다.

속마음을 삼킨 루미나가 사라지고, 라일리는 재차 음료를 권했다.

‘변비약을 잔뜩 넣었으니 극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겠지.’

그동안 라일리가 백조 역을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모르간 님과 결혼을…….’

낯부끄러운 상상을 하던 라일리는 셀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같이 음료를 마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꾸르륵-.

아랫배에서 북을 두드리듯 엄청난 반응이 왔다.

라일리는 무슨 말을 할 여유도 없이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라일리?”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셀렌은 곧이어 쏙 하고 나타난 루미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셀렌. 이 말을 깜빡해서 돌아왔어요.”

루미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싱글벙글 건 채로 말했다.

“불행을 짓밟고 일어나 봐요. 성공은 준비된 자를 위해 기다리고 있으니까.”

셀렌은 이미 어제의 불행을 딛고 일어났다.

그런데 의미 모를 말을 남긴 루미나가 떠나고, 잠시 후 셀렌에게 감독이 찾아왔다.

“셀렌, 잠깐만.”

“네, 감독님.”

“흑조 역할도 같이 연습했었지? 셀렌 네가 흑조도 같이 연기하도록 해.”

“하지만 그건 라일리 양이,”

“라일리가 사라져서 말이야.”

“사라졌다고요?”

“그래. 말도 없이 사라졌어! 이제 극이 시작되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

감독이 분노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셀렌은 문득 루미나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해낼게요.”

***

짝짝짝-.

무수한 환성과 박수가 관객석에서 쏟아졌다.

루미나 또한 성공적으로 초연을 마친 백조이자 또 흑조이기도 한 셀렌을 향해 박수쳤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무대였다.

마치 처음부터 백조뿐만 아니라 흑조 역할까지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루미나는 셀렌이 이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을 걸 확신했다.

‘그러게. 욕심 부리다가 망한다니까.’

커튼이 올라가고, 커튼콜을 받은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과욕을 경계하는 루미나는 하얀 빛 아래에서 환히 웃는 백조를 쳐다봤다.

발레스 가문이 재기할 기회가 모조리 박살 났음을 알리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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