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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95)화 (95/152)

***

당연하게도 라일리는 퇴출당했다. 영영 오페라 하우스 근처도 기웃거리지 못할 거다.

원래라면 그녀가 카멜라의 뒤를 이을 여배우가 될 예정이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안타깝지 않은 방향으로 진전됐다.

‘오페라의 유일한 별’이라는 수식어를 라일리가 아닌 셀렌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보물 같은 여배우를 얻은 오페라계는 한창 들떠 있었다.

반면 유령의 집 같은 꼴이 된 발레스 저택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모르간. 내가 여기저기 괜찮은 혼처를 알아봤다.”

테레사가 아들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무대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라일리에게 분노한 테레사는 두 사람이 헤어지길 종용했다.

결국 모르간과 라일리의 연애는 <백조와 흑조>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 중에서 한번 골라봐라. 우리 힘으로 빚을 갚는 게 힘들다면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돈이 없다 못해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 이런 저와 그 어떤 여자가 결혼해 주겠습니까.”

“결혼은 본디 퍼즐처럼 부족한 부분을 끼워 넣는 것이지. 우리가 돈은 없어도 작위는 있으니 결혼을 바라는 여자가 이 넓은 제국에 한 명쯤은 있겠지.”

예전의 테레사였다면 평민 며느리는 절대 들이지 않으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현재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굽히기로 했다.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형태로 저와 작위를 돈 주고 팔겠다는 겁니까?”

“말을 왜 그리 모질게 하는 거니. 네 아버지도 지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로 턱없이 부족하니 짐을 나눠 갖자는 의미지.”

미우나 고우나 테레사는 모르간의 어머니였다. 그들은 가족이었고.

한배를 탄 것이다.

거센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의 난파를 막으려면 제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간이 어쩔 수 없이 명단을 살펴봤다.

“……퀸 메를로?”

“어디 시골에 있는 가문의 딸인 줄 알았더니 그냥 평민이더구나. 그래도 돈은 많으니 아쉽지 않겠지.”

퀸 메를로의 상품을 베껴놓고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그 이름을 알아본 모르간이 머뭇거렸다.

그런데 테레사는 그런 아들의 행동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돈만 많으면 미녀든, 추녀든 생긴 게 무슨 상관이겠니. 불을 끄고 밤에 보면 다 똑같은 여자란다.”

“…….”

“정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면 모두에게 구혼장을 보내보도록 하자꾸나. 어차피 후보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한 번에 여러 인물에게 구혼장을 보내다니.

예전 같으면 천박하다고 학을 뗐을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여유가 없으니 그녀는 스스로가 경멸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번 방법마저 통하지 않으면 추락하는 벼랑 끝이었다.

***

“미친 거 아녜요?”

평범한 하인인 척 변장한 브랜든을 통해 구혼장을 전달받은 루미나가 질색했다.

한 입 먹은 샌드위치 안에서 바퀴벌레의 반쪽짜리 사체를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할까? 지독한 저주가 담긴 답신을 보낼까? 나 그런 거 잘 적어.”

“…….”

“이 편지는 룬멜드 제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불행을 주었고…….”

“아뇨. 그러지 마세요.”

팔짱을 척 끼고 곰곰이 생각하던 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아예 흑마법을 걸어버릴까?”

브랜든 또한 어지간히 어처구니가 없는지 골탕 먹일 방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대장이 흑마법에 대해서 좀 빠삭하거든. 나도 곁눈질로 배워서 좀 해.”

루미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전달해 주세요. 약속 장소는 대충 아무 카페나 하면 될 것 같고, 시간은 최대한 이른 시각으로.”

“꼬마 마님! 넌 꼬마 마님이야! 유부녀라고!”

브랜든이 펄쩍 뛰었다. 깜짝 놀란 루미나가 같이 펄쩍 뛰며 대꾸했다.

“알아요! 제가 설마 진짜로 마음이 있어서 그러겠어요?”

“마음이 없으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지금 내 마음을 갖고 노는 거야?”

브랜든이 배신을 당한 것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모르간을 갖고 놀면 갖고 놀았지, 아저씨를 왜 갖고 놀겠어요…….’

일일이 정정하기도 귀찮아서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던 중이었다.

“루미나? 거기서 뭐 해?”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목소리였다.

루미나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루미나가 환히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카라얀 님!”

루미나는 첩보요원처럼 은밀히 브랜든에게 구혼장을 넘겼다.

그리고 카라얀의 앞에 섰다.

인생 2회 차답게 능글맞은 처세술이었다.

“수업 듣는 시간 아니에요? 또 땡땡이치셨죠!”

브랜든과 밀담을 나누던 현장이 발각됐지만 아닌 척,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건 뭐야?”

하지만 카라얀은 날카로웠다.

브랜든이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있는 구혼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뭐가요?”

뜨끔하지도 않고 루미나가 잡아뗐다.

지켜보던 브랜든마저 속으로 감탄하게 되는 능청스러움이었다.

그러는 동안 카라얀의 시선은 구혼장이 꾸깃꾸깃 들어간 브랜든의 주머니에 고정돼 있었다.

시력이 원체 좋은 터라 찰나의 순간에 ‘구혼’이라는 단어를 읽어냈다.

평범한 하인이 ‘구혼’이라고 적힌 종이를 공자비한테 건넸다?

구혼 받은 상대가 저 하인일 거라고 부득부득 우겨봤자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걸 루미나가 읽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수신인은 루미나라는 의미인데.

‘당장 그놈의 낯짝을 봐야겠어.’

감히 자신의 아내한테 구혼할 배짱이 있는 놈이라면 제 손에 죽을 배짱도 있을 거다.

겉으로는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리고, 속으로 활화산처럼 분노했다.

그때, 카라얀의 마음속 소리가 울렸다.

‘유부녀한테 구혼장은 그냥 쓰레기지. 그런데 못난이 감자는 그걸 버리지 않고 읽고 있었잖아.’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이혼할 때를 대비한 거 아니야?’

카라얀은 제 마음속 악마한테 반박했다.

‘본인이 먼저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뭐? 이혼? 그럴 리가 없잖아!’

‘얼굴을 보고 좋아한다고 했으니 아름다움이 시들면 마음도 떠나는 게 당연하지. 어차피 이혼을 깔아두고 한 위장 결혼이잖아.’

마음속 악마는 그의 질투심을 부추겼다.

“루미나.”

“네?”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던 카라얀이 낮은 목소리로 루미나를 불렀다.

하지만 땡글땡글한 분홍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내 얼굴 마음에 안 들어?’

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만큼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루미나가 더 이상 카라얀과의 심적 거리를 좁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카라얀은 갑자기 루미나의 마음이 살짝 식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악마의 속삭임에 반쯤 넘어간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마음이 식은 걸지도.’

여전히 콩알만 한 루미나와 달리 카라얀은 근래 성장통을 겪었다.

매일매일 쑥쑥 자라났으니 외적인 변화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카라얀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할 수 있다면 뼈를 부숴서 성장하기 전으로 되돌려놨을 거다.

“카라얀 님? 카라얀 님? 안 들려요? 안 들리네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카라얀의 속내는 마치 재난 상황인 것처럼 요동치고 있건만, 현실은 침묵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라얀의 눈치를 보던 루미나가 이때다 싶어서 살금살금 퇴장했다.

브랜든 또한 그러려고 했다.

“거기 너.”

브랜든이 붙잡혔다.

“그거 구혼장 맞지? 루미나한테 온 거고. 어떤 미친놈이 유부녀한테 구혼장을 보낸 거지? 빨리 말해. 말하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강탈할 테니까.”

“어…….”

“아니. 그 전에 루미나의 반응은 어땠지? 혹시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하던가? 내 얼굴이 질려서 새롭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싶다든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숨은 쉬고 얘기하나 싶었다.

루미나 앞에서는 수줍은 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루미나가 없으니 말이 홍수처럼 넘쳐흘렀다.

‘그래. 뒷수습은 내 몫이지.’

때아닌 연애 상담을 하게 된 브랜든이 진지하게 어른의 모습을 보였다.

“작은 마님께서는 공자님의 얼굴을 아직 좋아하십니다.”

카라얀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지만 공자님. 외모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가꾸십시오.”

조언까지 곁들인 브랜든이 사랑에 푹 빠진 소년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2차 도주도 불발됐다.

“그 자식. 흑발이야?”

“네?”

“구혼장 보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 말이야.”

역시 이 주제를 회피할 수 없구나…….

카라얀의 살벌한 눈동자와 마주한 브랜든은 어쩔 수 없는 운명임을 받아들였다.

***

모르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 여인에게 구혼장을 보냈는데 유일하게 긍정적인 답을 준 사람은 퀸 메를로뿐이었다.

긍정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애매한 답장이긴 했다.

일단 만나보고 싶다는 얘기만 적혀 있었으니까.

모르간은 이름만 아는 여자에게 바로 청혼할 각오로 꽃다발과 함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를 가져갔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났다.

퀸 메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섯 시간이 지났다.

멍청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했다는 걸.

여덟 시간이 지났다.

모르간은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열두 시간이 지났다.

약속 장소였던 카페의 사장은 가게 문을 닫을 시각이 됐다며 모르간을 내보냈다.

연인에게 차였다고 착각한 건지 카페 사장의 눈빛에는 측은함이 가득했다.

꽃다발과 반지를 들고 있으니 오해를 받을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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