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지.’
모르간은 약속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났을 때쯤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돈이라면.’
가문이 재기할 수 있었다.
결국 미련하게 하루를 날린 사람이 됐지만.
거리를 걷는 행인마저 없는 늦은 밤.
모르간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과연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부모님의 잘못이건만 모르간은 오직 퀸 메를로라는 여인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불평과 불만을 곱씹으며 걸어갔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그를 막아섰다.
모르간은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깊게 눌러쓴 검은 후드를 벗었다.
“다시 한번 내 눈에 띄면 피를 보게 될 거라고 했지?”
카라얀이었다.
본인이 먼저 가던 길을 가로막아놓고 경고를 어겼다고 하다니.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좋은 일 하나 없었던 모르간은 억울했다.
“네가 결혼하는데 그걸 왜 루미나한테 알리는 거야. 아주 온 제국에 소문을 내면서 구혼하지 그래?”
“그게 무슨…….”
테레사는 목록에 있던 모든 여인에게 구혼장을 보냈다.
그중 루미나와 관련된 여성은 없었다.
유일하게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드러낸 메를로. 루미나에게 구혼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는 하트 공자.
‘설마…….’
메를로가 루미나와 아는 사이였던 것인가.
하지만 루미나의 인간관계가 좁다는 건 어머니인 테레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메를로가 루미나인 건…….’
이 또한 루미나의 나이를 떠올리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을 이어가던 차였다.
“모르는 척 발뺌한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퍽-.
카라얀이 길쭉한 다리로 시원하게 모르간의 오금을 쳐서 무릎을 꿇게 했다.
그리고 저보다 눈높이가 낮아진 모르간의 어깨를 잡았다.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지만 모르간에게는 달랐다. 어깨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으윽…….”
“그 애의 마음을 들쑤셔놓지 마.”
카라얀은 구혼장을 들고 있던 하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루미나한테 온 구혼장이 아니라고?”
“네. 작은 마님의 사촌분께서 다른 여인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근데 그걸 왜 여기로 보낸 거야?”
불쾌하게.
카라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름을 보면 아시겠지만, 구혼장을 받은 여자 쪽은 귀족이 아닙니다. 돈 많은 평민이죠.”
“그게 왜?”
“평민에게 구혼장을 보낼 만큼 발레스 가문의 사정이 악화됐다는 사실을 작은 마님께 꼭 알려 달라고 부탁받았습니다.”
‘그 말랑한 감자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실제로 구혼장을 확인해 보니 루미나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발신인 모르간 발레스.
수신인 루미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나니 기억도 나지 않는 어쩌고.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카라얀은 모르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
“미, 미쳤어.”
“맞아. 나 미치광이야.”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너 미쳤어?’라고 되물은 결과, 카라얀은 스스로가 미쳤다는 걸 인정했다.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르간이 경악했다.
카라얀은 그 재수 없는 낯짝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넌 금발이어서 안 돼.”
모르간이 이해 못 할 말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모르간에게 이해란 필요 없었으니까.
곧바로 경고를 무시한 죄로 응징이 내려졌으니.
***
발레스 가문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 거액을 빌려준 사람들은 단체로 소송을 걸었고, 갚을 능력이 없는 그들은 결국 사기죄로 잡혀가게 됐다.
자잘한 식기뿐만 아니라 저택까지 압류당했다.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털린 그들은 말 그대로 알거지였다.
“앗, 고모님!”
감옥으로 끌려가는 테레사를 배웅하기 위해 루미나가 친히 나왔다.
어쩐 일인지 얼굴에 멍을 달고 있는 모르간과 이십 년은 더 늙은 듯한 발레스 부부가 황실 기사단에게 끌려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루미나가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 놓은 터라 루미나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고모님. 일이 이렇게 돼서 참 안타까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고모님의 잘못이니 응당 고모님이 감당해야 할 몫이죠.”
“…….”
“그래도 고모님께는 가족이 있잖아요. 혼자가 아니라서 위안이 되겠네요.”
루미나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제가 꼭 고모님과 가족분들이 무병장수하시길 바랄게요.”
덕담이 아닌 악담이었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에 허덕이면서 살라는.
루미나가 호위로 한 명만 덜렁 데려왔다고 생각한 테레사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하트 공작은 제 아비를 죽였었지. 네 운명도 다를 바 없을 거다.”
저를 비웃는 루미나를 마주 본 채 비웃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루미나의 뒤에서 검은 형체가 쓰윽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아이리스와 내 얘기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오페라도 그렇고, 나에 대한 얘기가 자꾸 와전되는군.”
“고, 공작님…….”
“거슬린다는 이유로 죽였다면 당장 네 목부터 쳤겠지.”
루키우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도 무병장수라. 나쁘지 않군.”
“그렇죠?”
루미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응수했다.
테레사는 오한을 느꼈다.
루미나의 바람이 현실이 되도록 그가 손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테레사는 황실 기사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못 이겨 끌려갔다.
“저는 고모님보다 잘 먹고, 잘 살게요! 그러니까 고모님! 힘내세요!”
루미나는 그들의 비루한 뒷모습을 보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더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루키우스가 루미나에게 말했다.
“잠깐 걷겠나?”
“네!”
루미나는 그가 제게 하고픈 얘기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가문은 공작 위인 것치고 내실이 형편없었지.”
루키우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루미나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했다.
“내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말아먹었는지.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빚더미에 앉아서 네 친척 같은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현재 하트 공작가의 권위와 위상 그리고 재력까지 고려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얘기였다.
“내가 수완이 좋았으니까.”
이 당당함. 어쩐지 자기애마저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가 레기온으로 태어난 것에 기뻐했지. 마물을 잡고, 마석을 빼돌려서 팔고. 그러는 것만으로도 벌이가 쏠쏠했으니까.”
“…….”
“다만 한 가지는 못마땅해했다.”
루키우스가 제 눈을 가리켰다.
그가 레기온이라는 진실을 숨기지 못하는 증거.
세로로 찢어진 동공.
“온전한 인간을 흉내 내지 못하는 내게 교정이 필요하다며 사사건건 감시하려고 들었지. 그 인간의 자식으로 사는 건 양육이 아닌 사육이었다.”
말투만 듣는다면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루미나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밖에서는 마물을 상대하고, 집에서는 그 인간의 손아귀에서 마물처럼 다뤄지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평소와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참지 못하겠더군.”
“…….”
“그래서 죽였다.”
루미나는 루키우스가 어째서 아들을 방임하게 됐는지 깨달았다.
루미나는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루미나에게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키우스 또한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제 아비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의 길을 걷게 됐다.
부스럭, 부스럭.
조용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루미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다가 사탕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좋아하시잖아요.”
“금연하느라 먹는 거다.”
“네, 네.”
루키우스는 사탕을 받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루미나에게 굳이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루미나가 저를 두려워한 적 없는데, 그게 걱정돼서 먼저 말하는 꼴이라니.
루키우스는 문득 저를 두려워한 적 없었던 아이리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네가 하트 공자야?”
“넌 뭐지?”
“난 아이리스야.”
당시 소년 루키우스는 아이리스를 보며 겁을 상실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죽고 싶어서 저러는 거군.’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한 것이, 종종 죽고 싶어서 제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를 돋보일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루키우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학대의 흔적을 발견했다.
제 인생을 비관해서 새로운 방법으로 자살하려나 보군.
그런 생각으로 적당히 무시하고 있는데 곧이어 꽃잎을 닮은 분홍빛 머리칼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때까지도 루키우스는 저 연약한 인간이 제게 뭘 하겠나 싶어서 내버려뒀다.
하지만 이 인간은 당돌했다.
루키우스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빼앗아갔다.
어린 루키우스가 당황하는 사이 아이리스는 황금빛 눈동자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빤히 쳐다봤다.
“그게 네 불행의 증거구나.”
처음이었다.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방긋 웃는 사람은.
괴물이라며 역겨워하지도, 피하지도, 하다못해 잘못됐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행동이 생경해 어린 루키우스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마.”
“싫어!”
그녀를 피해 다니다가 위협하기도 했고, 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졸졸 따라왔다.
소년, 루키우스가 제 아비의 피를 손에 묻힌 이후에도.
모두가 아버지를 죽인 그를 비난했지만, 오직 아이리스만은 활짝 웃었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을 부정하려 했던 아이리스는 빈말로도 착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일까. 인간들에게도, 레기온들에게도 꺼려지는 루키우스를 사랑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알았던 아이리스.
그 독선적인 태도가 오히려 루키우스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렇게 ‘나’만을 알던 둘은 결혼했다.
아이가 태어나며 두 사람은 ‘너’를 알게 됐다.
그리고 ‘우리’가 됐다.
“루크, 나는 네 불행을 사랑했어.”
까득.
턱에 힘이 들어가면서 입 안의 사탕이 산산조각 났다.
그와 함께 루키우스는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분홍빛 머리칼에 황금 같은 눈동자를 한,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없었다.
다만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분홍빛 눈동자가 있었다.
“아버님. 하나 더 드릴까요?”
루키우스는 루미나가 건넨 딸기 맛 사탕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두 사람은 다디단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며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그들의 계약 종료가 하루가 다르게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