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97)화 (97/152)

***

[이번 학기 수석입니다. 성적표를 함께 동봉합니다. -엔디미온]

[와, 축하해! 하지만 성적보다 건강이 우선인 거 알지? 학창 시절은 한순간이니까 쉬엄쉬엄해!

-학업보다는 건강을 우선으로 여기는 루미나]

[학년 전체 수석입니다. 성적표를 함께 동봉합니다. -엔디미온]

[책보다 창문 밖 풍경 속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은 성적표가 아닌 친구들과의 추억인 걸 잊지 마.

-오늘 날씨가 좋아서 기분 좋은 루미나]

[누님. 꼭 저희 교수님처럼 말씀하십니다. -엔디미온]

[학생들한테 인기 많은 교수님인가 봐! -루미나]

[인기는 모르겠지만,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불가항력인 것처럼 수업 중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엔디미온]

[교수님께 예의 바르게 구는 학생이 많네.

그러고 보니 곧 졸업이지? 내 동생이 유급 한 번 하지 않고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다니.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

졸업식 날 꼭 찾아갈게! -루미나]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 큰 성취는 아니니 누님께서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공작저로 따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염려됐던 점이 많은 터라.(문장을 더 쓰려다가 잉크를 떨어뜨린 척 지운 흔적이 남아 있다.)

곧 아카데미에서 치를 수 있는 마지막 시험 기간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엔디미온]

***

당연하게도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루미나를 태운 마차가 신이 난 루미나의 마음처럼 빠른 속도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카라얀 님까지 동행하겠다고 할 줄 몰랐어요.”

“네가 동생 자랑을 했잖아. 얼마나 좋은 동생인가 싶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뭐가요?”

카라얀은 순진하게 되묻는 루미나를 쳐다봤다.

시간이 흘러서 내년이면 법적으로 성인이 될 나이건만 루미나는 여전히 동글동글했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아기 사슴 같은 눈망울 탓인지 살짝만 밀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인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하얗고, 티 없이 맑은 눈동자가 그대로인 귀여운 루미나였다.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팔과 다리는 길쭉길쭉 자라났고 소녀보다는 여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성장했다.

그런 루미나와 마주할 때마다 카라얀은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자주 깜짝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예쁜데 하루하루 더 예뻐지는 게 눈에 보여서.

제 눈에 이렇게 예뻐 보이는데, 남의 눈에는 어떻겠는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놈들은 맨날 비슷비슷한 사람만 봤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루미나처럼 반짝거리는 예쁜 여자애를 마주하면…….

‘눈이 돌아버리는 놈이 한 명쯤 나와도 이상할 것 없지.’

카라얀은 분명 그런 놈이 한 명쯤 나올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날파리가 꼬일까 봐 부득부득 따라왔다.

이 얘기를 루미나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솔직하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게 있어.”

카라얀이 대충 얼버무렸다.

걱정돼서 따라왔나 싶어서 루미나도 추궁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을 만나보면 카라얀 님도 애가 참 착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계모가 루미나에게 모질 게 군 걸 알고 있는데, 그 친자식인 엔디미온이 착하다고?

순진한 루미나가 속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카라얀은 검은 속내를 낱낱이 파헤칠 각오로 지금 아카데미로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라얀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루미나가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 하나로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카라얀은 그 얼굴을 닳을까 걱정될 만큼 빤히 쳐다봤다.

두근두근-.

루미나의 웃는 얼굴을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볼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카라얀은 여전히 엔디미온이 속 좁고 못생기고 멍청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로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 루미나의 어깨가 축 늘어지면서 미소가 아닌 슬픔이 가득해질 테니까.

‘명확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 아닌 척해야지.’

카라얀은 루미나의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

졸업을 맞이한 네쥬로 아카데미는 어수선했다.

드디어 졸업한다는 뿌듯함, 혹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채 졸업만 하게 됐다는 좌절감.

그도 아니면 유급하게 돼서 졸업생 명단에 오르지 못한 탓에 보내는 시샘 어린 시선.

물론 졸업생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른들의 세계로 가기엔 어리고 순수해서 마냥 즐거운 사람도 있었다.

그토록 다양한 감정을 가득 채운 아카데미에 한 가지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그거 들었어? 황족이 수석 졸업을 축하하러 왔대! 무려 둘이나!”

“둘? 설마 황제 폐하께서 오신 거야?”

“아니.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어.”

“그런데 대단하긴 하다. 웬만한 성적으로는 황족이 오지 않을 텐데.”

엔디미온과 동급생인 소년이 작게 감탄했다.

“너네, 엔디미온이 일등을 놓친 거 본 적 있어?”

“하지만 한 학기를 아예 날리고 편입했는데, 황족이 올 만한 성적이 되는 게 가능한 일이야?”

“방학 때도 집으로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독종인데 뭐가 안 되겠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엔디미온이라면 같은 학년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내 유명 인물이었다.

최연소 편입이라는 수식어.

단 한 번도 일등 자리를 내어준 적 없는 전설.

게다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구니 기계로 만든 사람이 있다면 딱 엔디미온일 거라는 농담이 나올 지경이었다.

“엔디미온이랑 같은 학년이지만, 참 징글징글하다니까. 그레고리만 불쌍하게 됐지.”

“맞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차석이잖아.”

수석으로 당당하게 입학했던 그레고리는 졸업할 때까지 자존심이 짓밟혔다.

엔디미온을 괴롭히려다가 번번이 역으로 당하며 체면을 구긴 것도 여러 번.

성미가 빠그라진 그레고리를 좋아하는 동급생은 없었다.

하지만 육 년 동안 지는 꼴만 보니 살짝 측은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나쁜 놈이지만.

“아, 그래! 엔디미온의 누나가 하트 공자비래. 혹시 하트 공작이 비리를 저지른 게 아닐까?”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 엔디미온이 누나랑 사이가 좋네, 나쁘네 말이 많은 거.”

그레고리가 둘 사이가 나쁘다는 식으로 떠벌린 탓에 한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진실은 방학 중에 한 번도 만나러 가지 않은 것만으로 끝난 거 아니었어?”

진실은 엔디미온만 알고 있었다.

졸업하는 마당에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웃겨서 더는 그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트 공작가의 며느리가 되려면 얼마나 독종이어야 하냐.”

독종 집안이라면서 질색하고 있는데 마침 엔디미온이 지나갔다.

조잘조잘 떠들던 동급생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엔디미온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나쳤다.

엔디미온의 머리칼 위에 한낮의 햇살 조각이 내려앉았다.

금빛 머리칼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10살 꼬꼬마일 때 엔디미온은 아카데미에 왔다.

그리고 15살이 된 그는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수려한 외모의 청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엔디미온, 엔디미온!”

호세가 엔디미온을 부르며 달려왔다.

“들었어? 황족이 왔대! 네 졸업을 축하하러 온 거야!”

“알고 있습니다.”

흥분한 호세와 달리 엔디미온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호세는 불안한 듯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설마 황족 앞에서 그 부탁을 할 건 아니겠지?”

“…….”

“안 돼! 그러다가 너 잡혀가!”

호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너희 누님께서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어? 이 사실을 알면 놀라서 기절할 거야.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누님은 오지 않을 겁니다.”

루미나를 언급한 순간 엔디미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루미나에 대해 얘기할 때만 엔디미온에게 생기가 느껴졌다.

“아, 그래? 아니, 그래가 아니지. 엔디미온. 내가 한 말 꼭 생각해 봐.”

호세가 빌듯이 엔디미온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네쥬로 아카데미에 도착한 루미나는 커다란 꽃다발을 든 채 카라얀과 나란히 섰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학부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대부분 아는 사이인지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중 빠지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었으니.

“엔디미온이라는 애가 공부를 그렇게 잘한대요.”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다는데. 제 아들도 어울려서 같이 공부했으면 좋겠건만. 죽어도 싫다잖아요.”

여기저기서 엔디미온의 칭찬이 쏟아졌다.

귀를 쫑긋거리던 루미나는 우쭐해졌다.

‘그 애가 바로 제 동생입니다.’

본인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었지만, 덩달아 어깨가 으쓱여지고 콧대가 높아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루미나의 이런 들뜬 기분은 졸업식이 시작되자마자 폭삭 가라앉았다.

아카데미 학장에 이어서 의외의 인물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절뚝, 절뚝-.

2황자 엘리엇이었다.

평소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2황자의 등장으로 장내가 술렁였다.

하지만 루미나가 주목한 인물은 그가 아니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올라오는 그를 보좌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라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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