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좋은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곱게 자란 고양이처럼 새침하고 도도한 아라벨이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엘리엇 오라버니. 조심해.”
이곳의 사람들을 저와 동류로 취급하지 않는 듯한 그녀의 냉담한 보랏빛 눈동자는 엘리엇을 볼 때만은 풀어졌다.
그 짧은 변화를 목격한 졸업생들 중 대다수가 아름다운 황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저분이 레기온인 막내 황녀님.”
“세상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아름다우셔…….”
그 성격 탓에 카라얀이나 루미나가 학을 떼서 그렇지 아라벨은 객관적으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성년식을 앞둔 그녀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앗아갈 만큼 화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아라벨의 성격을 모르는 이들이 입을 벌린 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라벨을 보자마자 다른 의미로 헛숨을 들이켠 사람이 있었으니.
“헉.”
루미나였다.
“카, 아니, 저쪽으로 가요. 빨리, 빨리.”
레기온들은 귀가 좋았다.
혹여나 레기온인 아라벨이 ‘카라얀’을 부르는 제 목소리를 듣고 반응할까 봐 루미나가 말머리를 돌렸다.
다급한 속삭임과 함께 카라얀은 루미나의 손에 붙들려 구석으로 질질 끌려가게 됐다.
“허리 좀 숙여보세요. 지금부터 꽃다발인 척하는 거예요.”
꽃다발인 척?
그게 무슨 소리지?
제 눈에는 이미 루미나가 꽃보다 예쁜데.
어떻게 꽃다발인 척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의문을 가진 와중에도 카라얀은 루미나의 명령대로 착실히 허리를 숙였다.
곧이어 루미나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살짝 높게 들어서 자신과 카라얀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카라얀과 한쪽 팔짱을 꼈다.
조금이라도 더 밀착해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기 위함이었다.
루미나의 의도대로 두 사람은 빈틈없이 꼭 붙어 있게 됐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빠르게 뛰기 시작한 카라얀의 심장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카라얀은 심장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까 봐 조심하며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꽃 이리 줘. 내가 들게.”
“그러실래요? 사실 높게 드니까 팔이 조금 아팠어요.”
헤헤.
루미나가 냉큼 꽃다발을 넘겼다.
꽃다발을 넘겨받은 카라얀은 그것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야 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꼼질거리는 루미나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네쥬로 아카데미의 174기 학생들은 모두 총명하고 영민하여 앞으로 룬멜드 제국의 미래를 빛낼 재목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학장의 연설이 끝나고, 고대한 순간이 다가왔다.
“그중 174기를 대표할 수석 졸업자 엔디미온 랑슈스 군. 단상 위로 올라오도록.”
부름을 받은 엔디미온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소리를 듣고 루미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저 모습을 꼭 앞쪽에서 보고 싶었는데!’
현실은 구석 중 구석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꽃 사이로 얼핏 드러난 사람들의 뒤통수만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졸업식에 왔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소리뿐이었다.
‘아라벨 황녀가 이런 행사에 참여한 적은 없잖아! 아카데미 졸업식 같은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면서! 무릎을 꿇으면서 초청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사람이 갑자기 왜?’
다리가 불편한 엘리엇 때문인가?
엘리엇과 아라벨은 남매 사이가 퍽 화기애애해 보이긴 했다.
루미나가 한창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남들의 뒤통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아라벨은 익숙한 성을 곱씹었다.
“랑슈스, 랑슈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씨인데.
그것도 굉장히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지나가는 송사리 가문이 아니었다.
송사리 가문 따위가 제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엘리엇이 나서서 엔디미온을 치하하는 동안에도 고민에 빠져 있던 아라벨이 깨달음을 얻었다.
곧장 엔디미온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네가 루미나의 동생이야?”
“네. 그렇습니다.”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동요하지 않았다.
“전혀 안 닮았는데?”
“아라벨.”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수들이 지켜보고 있는 공개적인 자리였다.
엘리엇은 서슴없이 사적인 얘기를 하는 아라벨을 말렸다.
“잠시만. 그러면 루미나가 여기 왔을 수도 있다는 의미잖아.”
아라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중을 훑어봤다.
“……지금 황녀님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거 맞죠?”
“나도 들었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카라얀과 딱 달라붙었다.
그 순간 카라얀은 숨 쉬는 법마저도 의식하게 됐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꽃을 조금 더 높이 들어 봐요.”
혹여나 아라벨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눈을 굴리면서 바들거리는 루미나가 안쓰러운 한편 귀여웠다.
“도망칠까?”
“그러면 졸업식은요?”
고양이 앞 생쥐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막상 피하자고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박한다.
그 동그란 눈을 본 순간 카라얀은 상황에 맞지 않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졸업식을 구경할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야?”
“당연하죠!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졸업식인데 어떻게 도망가요.”
당차게 말했지만, 루미나의 마음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아라벨과 엮이면 웬만큼 귀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진짜 도망가 버릴까.’
‘안 돼! 누나인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연히 루미나의 마음속 루미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나뿐인 동생의 단 한 번뿐인 졸업식인데! 심지어 수석 졸업이잖아!’
루미나와 루미나가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이 상황은 엔디미온의 한마디로 종식됐다.
“누님께서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왜?”
“제가 괜한 걸음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그래?”
곧바로 흥미를 잃은 아라벨이 루미나를 찾는 걸 그만뒀다.
다시 평화롭게 꽃다발인 척하게 된 루미나는 카라얀과 함께 풍경에 녹아들었다.
엘리엇이 엔디미온의 지난 학업 성취에 찬사를 보내며 졸업식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엔디미온이 돌발 발언을 했다.
“황자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예고 없는 상황이건만 엘리엇은 불쾌해하기는커녕 흥미로운 듯한 시선으로 엔디미온을 쳐다봤다.
반면 엔디미온이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있던 호세는 앞자리에 선 채 안절부절못했다.
엔디미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황궁에 있는 금지된 서고에 출입하고 싶습니다.”
“금지된 서고?”
온갖 금서를 취급하는 서고.
아무리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라 하지만 그런 위험한 곳에 출입 허가를 내려 줄 리 없었다.
그러나 대답은 엘리엇이 아닌 아라벨 쪽에서 나왔다.
“그래. 그렇게 해. 대신 루미나도 같이.”
아라벨은 루미나와 관련되면 야생마에 올라탄 것처럼 질주했다.
엘리엇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라벨, 이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아. 황제인 아버지나 황태자쯤 돼야 출입을 허가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왜?’라는 듯이 아라벨이 되물었다.
“아버지는 아직 마르셀 오라버니를 황태자로 임명하지 않았어.”
“…….”
“그건 우리 셋 중 누구도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야. 그러니 내게도 허락할 권한이 있지 않겠어?”
막무가내인 아라벨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엘리엇이 상황을 수습했다.
“이 얘기는 여기서 할 게 아닌 것 같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랑슈스 군. 다시 한번 축하하네. 현명한 그대의 앞길에 빛이 깃들길 바라지.”
상냥하게 말한 엘리엇은 관중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핏 그들 모두를 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정확히 루미나가 숨어 있는 쪽을 직시하고 있었다.
***
“엔디미온!”
조마조마했던 졸업식이 끝나고, 엘리엇과 아라벨이 보이지 않자 루미나는 곧장 엔디미온에게 달려갔다.
“누님? 어째서…….”
깜짝 놀란 엔디미온이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졸업 축하해!”
치맛자락이 날리도록 달려간 루미나가 활기차게 외치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얼결에 꽃다발을 받은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실감나지 않는 듯, 엔디미온은 아직도 살짝 넋을 놓았다.
그 얼굴을 보니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만류에도 아카데미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부모님이 왔는데 엔디미온만 혼자였다면 얼마나 슬펐겠어.’
아닌 척하지만 은연중 가슴에 남는 그런 슬픔이 있는 거다.
루미나가 못 본 새 다 큰 것 같은 엔디미온을 뿌듯하게 쳐다봤다.
“루미나.”
카라얀이 루미나의 뒤에서 삐딱하게 섰다.
카라얀의 존재감이 엄청난 터라 엔디미온은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두 남자의 눈이 딱 마주쳤다.
통성명은 아직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서로를 알아봤다.
불꽃이 이는 듯했다.
“아, 맞아! 엔디미온, 이쪽은 내 남편인 카라얀 님. 카라얀 님, 이쪽은 제 동생인 엔디미온이에요!”
그들에게 루미나의 목소리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이미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제대로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루미나를 속이는 게 분명할 여우. 딱 이름처럼 재수 없게 생겼잖아.’
카라얀은 여전히 엔디미온의 이름마저 탐탁지 않았다.
‘성격 나쁜 레기온. 주변인의 주장에 따르면 좋은 남편감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
엔디미온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애쉬의 증언을 정확히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