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99)화 (99/152)

두 남자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뭐 해?”

그들 사이에서 루미나가 위기감 없이 있었다.

대체 왜 입을 꾹 다문 채로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대신 소개했으니 인사해야지, 인사! 카라얀 님도 얼른요.”

루미나의 등쌀에 못 이겨서 억지로 악수했다.

콱.

두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치한 기 싸움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가 순진하게 외쳤다.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

진심으로 기뻐하는 귀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힘이 쫙 빠졌다.

그들은 기 싸움을 그만두고 손을 놓았다.

‘아휴, 힘들다.’

루미나가 여전히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일찍이 눈치챘다.

‘서로 반대되는 성향이니까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적극적으로 상대의 장점을 말하기보다는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정말로 루미나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착각한 두 남자는 억지로 루미나를 따라서 웃었다.

‘분위기 깨고 싶지 않으면 웃어.’

그리 말하듯이 상대를 쳐다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작위적으로 형성됐다.

한편, 그 장면을 목격한 졸업생들 사이에서 지난 논란이 종결됐다.

“뭐야. 엔디미온, 누나랑 사이가 좋잖아.”

“엄청 화목해 보이는데 대체 누가 나쁘다고 그랬어.”

만년 이등.

졸업 성적마저도 차석인 그레고리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인상을 팍 구겼다.

그리고 패배자처럼 사라졌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갈까?”

이런 뒷사정을 모르는 루미나가 그들을 재촉했다.

엔디미온과 함께 교정을 돌아다니며 대화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황녀님이 나를 끌어당길 것만 같은 이 기분.’

고양이 앞에서 방울을 단 채 돌아다니는 생쥐가 된 느낌인 터라 카라얀과 엔디미온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서 하지 못한 얘기를 하자.”

“알겠습니다.”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라얀을 쓱 본 엔디미온이 루미나를 따라가려던 그때였다.

웅성웅성-.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쩐지 오한을 느낀 루미나가 짧게 몸을 떨었다.

“왜 그래? 추워?”

때는 바야흐로 한여름이었다.

아무리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도 추울 수가 없는 계절.

하지만 카라얀은 루미나가 여름이 춥다면 추운 것이고, 겨울이 덥다면 덥다고 믿을 수 있었다.

때문에 루미나를 슬쩍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감싸 안았다.

엔디미온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며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목격하던 중, 루미나의 뒤에서 그림자가 쓰윽 나타났다.

“너. 여기 있었구나.”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화들짝 놀란 루미나가 카라얀의 품에서 벗어나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라벨이 잔뜩 심술이 난 고양이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로 있었다.

“그동안 내 연락을 잘도 피했구나.”

“피하다니요. 제가 어떻게 황녀님을 피하겠어요. 한동안 바빠서 뵙지 못한 것뿐이에요.”

“너 때문에 내가 전속 시녀 없이 다니는 것도 몇 년째인지. 불편해 죽겠어, 아주.”

‘그러면 아무나 들이면 되잖아요…….’

루미나는 속마음을 꿀꺽 삼켰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내가 언제 너한테 내 시녀가 되라고 빌었니? 너 같은 부스러기가 뭐가 대단하다고 무려 나! 아라벨이 부탁하는 처지가 되겠어?”

“…….”

“너만 한 부스러기조차 주변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거잖아!”

라고 하거나.

“흥, 나중에 내 전속 시녀가 되고 싶다고 알랑방귀를 뀌어도 내가 받아주나 봐라.”

라는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루미나가 괜히 아라벨을 피해 다녔던 게 아니었다.

‘예전에 티파티 때 잘 보인 덕에 쓸데없는 소문이 붙거나 얕보는 영애들은 없어졌지.’

하지만 아라벨에게 이상한 방향으로 잘 보인 듯했다.

틈만 나면 황궁으로 오라고 수작을 부리거나 전속 시녀 제안을 했다.

레기온답게 끈질겼다.

“아라벨 황녀. 그만하지 그래?”

카라얀이 차갑게 말하며 루미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뭘 그만하라는 거지? 도통 의미를 알 수가 없군.”

아라벨이 코웃음을 치며 루미나의 반대편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두 사람 사이에서 오뚝이처럼 흔들리게 된 루미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네가 내 부인을 괴롭히고 있잖아.”

카라얀이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말했다.

아라벨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함이었으나 그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네 부인?”

건수를 잡은 아라벨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네 부인이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 이 말인가?”

“그래.”

“내가 왜? 네 부인이라고 해서 꼭 내가 건드리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혹시 이 애가 소중해?”

아라벨이 어릴 적에 했던 물음을 그대로 했다.

‘이거 네 약점 맞지?’ 하고 대놓고 물어보는 격이었다.

당시 카라얀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올 대답이 사뭇 다르리라는 걸 아라벨도, 카라얀도, 하물며 루미나마저도 알고 있었다.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는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그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루미나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

“제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보는 눈도 많은데 사랑싸움을 하면 어떡해요!”

“뭐?”

아라벨이 어이없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루미나는 뻔뻔했다.

촉촉한 눈망울로 아라벨을 쳐다봤다.

“황녀님의 마음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결혼한 몸. 황녀님의 마음을 받아드릴 수 없…….”

“이 부스러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미나의 얘기만 들으면 다소 위험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벨이 격노하며 루미나를 놓아줬다.

카라얀 또한 루미나가 팔목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자 손을 뗐다.

“하트 공자, 공작한테 전해. 애도 있는데 유해 도서 반입하지 말라고.”

“…….”

“한때 공작이 며느리를 위해 책을 잔뜩 들였다는 소문이 돌던데, 장르는 가려서 받은 거야? 대체 뭘 읽고 다니면 이런 맹랑한 생각을 하는지! 하!”

‘저도 곧 성인이에요. 황녀님.’

전생까지 합치면 이미 아라벨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저를 꼬꼬마 취급하는 아라벨에게 루미나가 웃으며 말했다.

“저를 두고 펼치는 치열한 사랑싸움 아니었어요?”

“아니야!”

목소리를 높인 아라벨은 ‘후!’ 하고 거칠게 숨을 내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아까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나름 중요한 대화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아라벨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벨. 잠깐 새 사라졌다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등이 살짝 굽은 엘리엇이 절뚝이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근처에는 황실 기사들이 지키듯이 서 있었다.

“오라버니! 바쁜 일이 있었어.”

아라벨이 활짝 웃었다.

주변인의 속을 썩였지만 본인이 좋다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라 엘리엇은 말괄량이 동생을 못 말린다는 듯이 쳐다봤다.

“랑슈스 군도 있군. 그리고…….”

“제국의 별을 뵙겠습니다. 루미나 폰 하트라고 합니다.”

눈치 빠른 루미나가 엘리엇과 처음 본 것처럼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하트 공자비의 이전 성이 랑슈스라고 했었지. 가족 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군.”

인자하게 미소 지은 엘리엇이 엔디미온을 돌아봤다.

“랑슈스 군.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이니 물어보지. 어째서 서고 출입을 원한 거지?”

엔디미온은 머뭇거렸다.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자신이 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게. 그래야 폐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 세상의 진실을 모두 알고 싶습니다.”

“학구열이라는 의미인가?”

“네.”

좋게 포장하면 학구열이 맞았다.

엔디미온의 두루뭉술한 말에 거짓이 없음을 눈치챈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와 상의한 후 랑슈스 저택으로 연락을 넣도록 하지.”

그러자 아라벨이 끼어들었다.

“공작저에도.”

“아라벨.”

“공작저에도!”

엘리엇이라고 해도 아라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가 그러겠다고 하잖아!”

루미나는 아라벨의 진짜 목적을 바로 간파했다.

‘그냥 어떤 이유라도 좋으니 황궁으로 날 부르고 싶은 거겠지.’

루미나가 황궁에 있으면 아라벨을 피할 수 없었다.

굳이 루미나에게 그러는 건, 살아 있는 쥐를 앞발로 갖고 노는 고양이 같은 행동이었다.

한입에 꿀꺽 집어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역시 내가 아는 레기온 중 두 번째로 레기온다운 레기온.’

루미나가 아는 사람 중 두 번째로 성격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부동의 일 위는 역시 하트 공작이었다.

“그래. 그러도록 할게.”

엘리엇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긍정했다.

결국 루미나를 제 손아귀에서 갖고 놀겠다는 의미인 터라 카라얀이 아라벨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못마땅하면 너도 오든가. 서고까지 출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호호.

아라벨이 얄밉게 웃으며 약 올렸다.

아니꼬우면 너도 황족으로 태어나든가.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면 다음번 만남을 기대하지.”

카라얀이 아라벨의 도발에 넘어가서 아카데미가 초토화되기 전에 엘리엇이 빠르게 대화를 종결지었다.

목적을 이룬 아라벨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루미나는 지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살짝 놀랐다.

“방금…….”

“왜 그래?”

“황자님의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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