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이야?”
카라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엔디미온을 살펴보니 그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변화를 목격한 사람은 루미나뿐인 듯했다.
“그러니까, 아녜요. 제가 피곤했나 봐요. 헛것을 보게 되네요.”
엘리엇의 그림자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그렇게 말하려던 루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기온인 카라얀이 보지 못했다면 자신이 잘못 본 거겠지.
게다가 정말 살짝만 움직였던 터라 충분히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루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
단지 아라벨을 만났을 뿐인데 데친 풀떼기처럼 흐물흐물해진 루미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도련님. 오셨습니까.”
랑슈스 저택의 집사 해럴드가 루미나를 맞이했다.
루미나는 결혼했기 때문에 더는 아가씨라고 불릴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본가에 왔으니 친근감을 주기 위함인지 해럴드는 일부러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 세심함이 루미나를 빙긋 웃게 했다.
“공자님께서도 오셨군요. 저는 랑슈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해럴드입니다.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앞뒤로 두 사람씩 나란히 서서 저택으로 들어섰다.
앞에는 루미나와 집사.
그 뒤에는 카라얀과 엔디미온.
뒤의 두 사람은 마차 안에서도 무언의 신경전을 펼쳤었다.
마차를 벗어났다고 하여 그 미묘한 신경전이 끝이 날 리 없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자연스럽게 둘을 붙여놓은 루미나는 집사와 함께 앞장서서 걸었다.
“아가씨의 연락을 받고 난 후 조금 더 신경 써서 저택을 손봤습니다. 도련님이 지내시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내가 한 번쯤은 와 봤어야 했는데 부재가 길었지?”
“아닙니다. 이곳을 관리하는 건 전적으로 저희의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교과서 같은 대답.
역시 하트 공작이 소개한 인재다웠다.
“아, 맞아. 미리 말하지 못했는데 며칠간 이곳에 머무르려고 해.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습니다. 이곳은 아가씨의 집이지 않습니까. 언제든 준비돼 있습니다.”
미리 얘기된 부분이 아닌데 집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간 보이는 부분만 정리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백 점 만점 중 이백 점을 주고 싶은 행보였다.
루미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자니 귀가 밝은 카라얀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엔디미온과는 방학 기간에도 만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된 김에 며칠 머무르고 싶어서요!”
루미나의 활기찬 대꾸를 듣고 카라얀이 거칠 것 없이 말했다.
“그러면 나도 있을래.”
“좋아요! 해럴드. 공작님께 연락을 넣어줘.”
“알겠습니다. 두 분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침실을 정리해 두라고 하겠습니다.”
랑슈스 저택은 바뀐 게 없었다.
루미나가 공작저로 떠난 날,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날로부터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네.’
전생에서 카라얀은 레기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폭주했다.
원래라면 지금을 기점으로 일 년 뒤쯤 카라얀은 죽을 운명이니 상태가 심각했을 거다.
‘인간과 괴물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본인의 힘에 잡아먹혔겠지.’
하지만 현재 루미나의 곁을 지키는 카라얀은 그러지 않았다.
루미나가 따로 능력을 쓴 적도 없건만 카라얀은 멀쩡했다.
심지어 그간 몇 번의 우기를 겪었는데도 말이다.
‘비가 올 때면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주긴 했지만.’
만약 오 년 전, 루미나가 빗속에서 폭주하기 직전인 카라얀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도 아니면 전생에서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만큼 별다른 일이 없었다.
‘큰일을 벌일 것 같았던 박사도 잠잠했고.’
나름 평화롭고 순탄한 나날이었다.
이 안온함이 좋았던 루미나는 계약이 끝날 때까지 평화가 유지되길 바랐다.
***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 이후.
루미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왔으니 주변을 둘러보며 사색에 잠기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나서 정원을 홀로 배회했다.
그리고 기다렸던 한 인물과 마주쳤다.
“꼬마 마님. 여기야, 여기.”
“아저씨!”
평범한 하인인 척 변장한 브랜든이었다.
“오랜만에 동생도 만나고, 집에도 오니까 기분이 좋나 봐.”
“네! 정말 좋아요.”
루미나가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왠지 얄미웠다.
브랜든이 하얗고 말랑한 뺨을 쭉 잡아당겼다.
“모예용. 이거 노으세영.”
루미나의 외박 얘기를 듣고 올리비아는 눈물을 살짝 훔쳤고, 대장은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이런 뒷사정을 모르는 루미나가 너무 밝게 웃으니 충동적으로 말랑말랑한 뺨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일이야 매일 있지.”
루미나가 그다지 아프지 않은 뺨을 문지르며 “하긴 그렇죠.” 하고 긍정했다.
바쿠스의 성공 이후 사업 규모를 늘린 루미나는 상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상단이 건드리는 일마다 무조건 대박이 터지니 순식간에 돈이란 돈은 모두 쓸어 담게 됐다.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던 마물의 사체는 에리카가 쓰임을 알아내면서 값이 배로 뛰었지.’
그리고 거의 공짜로 마물의 사체를 대량으로 매입했던 루미나는 많은 이득을 봤다.
이 일로 상단의 이름이 대다수의 제국민들에게 각인됐다.
퀸 상단.
그 이름 탓에 상인들 사이에 ‘룬멜드 제국에는 여왕이 있다’라는 농담이 떠돌 지경이었다.
사업적 감각이 뛰어나 돈 되는 곳을 무서울 정도로 찾아내니 여왕이라는 농담이 마냥 과장은 아니었다.
“칼바도스 사업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야? 술을 계속 묵혀두기만 하고 있잖아.”
루미나는 남부에 위치한 칼바도스라는 지역의 사과밭과 함께 증류소를 매입했다.
사과를 증류해서 만든 브랜디인 칼바도스를 판매하기 위함이었다.
‘열세 살부터 야금야금 땅을 매입해서 땅 부자가 된 나!’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는 지역명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칼바도스는 사과로 유명했다.
그곳 사과밭이 전부 자신의 것이라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아직 때가 아니에요. 어차피 숙성시켜야 하니까 조금 더 내버려두세요.”
당장 그거 팔지 않는다고 해서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브랜디 장사를 하고 싶으면 포도밭을 매입하지 굳이 사과밭을 매입한 건 대장 때문이야?”
포도 브랜디가 주류가 되는 귀족 사회에서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는 귀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받는 술이었다.
돈 없는 평민들이나 마신다는 인식이 강한 탓에 장사를 해도 이윤이 크게 남지 않았다.
만약 본격적으로 칼바도스를 판매한다고 해도 퀸 상단의 영업 이익을 고려한다면 가벼운 취미 생활 수준인 것이다.
같은 브랜디라도 포도 브랜디를 파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루미나 또한 알고 있을 텐데.
왜 꼭 사과밭을 매입한 거지?
일단 루미나가 하라고 하니까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매입하긴 했는데.
브랜든의 사소한 의문이었다.
“으음. 비밀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어차피 당장 팔지도 못하는 거, 마셔 보기라도 하자.”
브랜든이 자연스럽게 칼바도스 한 병과 술잔을 꺼냈다.
저 작은 가방에 아공간이 있는 듯했다.
“아저씨. 저 아직 미성년자인데요.”
“곧 성인이잖아. 한 모금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앞으로 네가 판매할 술의 맛 정도는 알아야지.”
능구렁이처럼 말한 브랜든이 술을 따라서 루미나한테 권했다.
“달고 맛있어.”
사과로 만들었으니 달 수밖에.
브랜든이 자꾸 부추기자 결국 루미나가 못 이기는 척 한 모금을 마셨다.
너무 달아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브랜든은 이런 반응을 기대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하하 웃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브랜든 아저씨도 레기온이었지.’
성격 나쁜 레기온.
레기온들은 왜 이렇게 다 못돼먹었는지. 자신 외에는 전부 구제불능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루미나는 브랜든과 진행 중인 사업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한창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브랜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는 행동을 보면 아직도 신혼이야. 우리 꼬마 마님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봐. 카라얀이 오니까 이 아저씨는 가볼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꼬마 마님도 푹 쉬고,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브랜든이 자취를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라얀이 성큼 다가왔다.
“카라얀 님!”
눈 깜짝할 새 카라얀이 코앞에 있었다.
카라얀이 근처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까워진 탓에 연기가 아닌 진짜로 놀란 루미나가 그를 반갑게 불렀다.
브랜든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벌써 깊은 밤이었다.
때문에 카라얀의 황금빛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
“뭐야. 술 마셨어?”
“……좋은 술이 있다고 해서 조금이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거.”
카라얀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방금 마신 술병이 떡하니 있었다.
브랜든이 챙겨 가지 않은 것이다.
그 와중에 술잔은 야무지게 챙겨 간 탓에 루미나는 졸지에 남들 몰래 브랜디로 병나발을 분 사람이 돼 버렸다.
제 이마를 팍팍 치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냄새가 났어.”
카라얀이 고개를 숙여서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입가의 냄새를 맡았다.
“사과네. 그것도 엄청나게 단.”
그의 코끝이 루미나의 입가에 닿을 듯이 가까웠다.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그의 숨결을 의식한 루미나는 솜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