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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01)화 (101/152)

눈을 감으면서 시각적 정보가 차단됐다.

오히려 바로 코앞에 카라얀이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입을 맞춘다면 사과 맛이…….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나!’

술 한 모금 마셨다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혼자서 토마토 수프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니!

변태가 따로 없었다.

이러면 카라얀이 자신을 엉큼한 감자라고 불러도 속마음으로조차 반박하지 못할 듯했다.

“……어쩐 일이세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외면한 루미나가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그제야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 걸 인식한 카라얀도 황급히 거리를 뒀다.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나왔지.”

“이제 막 들어가려고 했어요!”

“술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그냥 호기심으로 딱 한 모금만 마셨어요.”

카라얀의 눈빛에 불신이 가득했다.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루미나가 자신만만하게 팔을 휘적거리며 위풍당당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삐끗.

루미나의 자세가 흐트러지자마자 카라얀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진짜 안 취했어요…….”

억울했다.

살짝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서 삐끗한 것뿐인데.

루미나가 어깨를 축 내려뜨리며 한껏 억울함을 호소하자 카라얀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아.”

알면서 왜 안아든담?

대록대록.

루미나가 눈을 굴리자 카라얀이 말했다.

“그냥 내가 널 안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이렇게 답삭 안겨 있는데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루미나는 문득 그 모든 것이 의식됐다.

오직 달빛과 별빛에 의지하는 늦은 밤이었다.

은밀히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

선선하게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자신을 단단히 붙잡은 그의 손길.

여름밤의 분위기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듯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방도 따로 쓰는데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잘 준비를 하지 그랬어요.”

“무,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같은 방을 써야지.”

어찌나 당황하고 흥분했는지 카라얀이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에게 안겨 있던 루미나는 높아진 그의 언성과 함께 손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합방할 거라 생각하고서, 준비까지 다 마친 모양이었다.

‘내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으니 해럴드도 당연히 한방을 쓸 거라 생각한 것 같고.’

서로가 자신의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넘어간 탓에 생긴 문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까지 굳이 같은 방을 쓸 필요는 없잖아요. 카라얀 님도 불편해할 거고.”

“……내가?”

“네. 제가 침대를 엄청나게 차지하니까요.”

공작저에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지금껏 합방을 했다.

하지만 며칠 가볍게 묵을 랑슈스 저택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자는 걸 불편해하는 것도 맞잖아.’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몸이 커졌기 때문일까.

루미나는 카라얀이 침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구겨 넣듯이 자는 모습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지하게 각방을 쓸 필요성을 느꼈다.

혹은 침대를 지금보다 큰 것으로 바꾸든가.

‘그래서 작년이었나, 침대를 바꿨었지.’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카라얀을 보며 루미나는 자신의 잠버릇을 되짚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콩알만 한데 침대를 차지해 봤자 얼마나 차지한다고 엄청나다는 건지.”

카라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불편하다고 했어?”

“그렇게 보였어요.”

“네가 그렇게 본 거지 내가 불편하다고 말한 적 없잖아. 술을 마시더니 혹시 네가 열 배로 불어났다는 귀여운 착각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거 아녜요!”

자신의 잠버릇이 지독할 정도로 나쁜가 싶어서 꺼낸 얘기였다.

술기운은 전혀 없었다.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카라얀의 행동에 루미나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 모습이 카라얀의 눈에는 대책 없이 귀여워 보였다.

큰일이었다.

남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안 되는데.

칠칠맞게 귀여움을 흘리고 다닐 루미나가 뻔히 보여서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나한테서 멀어질 생각 하지 마.”

더 더할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는 오롯한 진심을 뱉어낸 카라얀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루미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주정뱅이는 얼른 자.”

“네에, 네.”

브랜든과 어찌나 열심히 떠들었는지 루미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껌뻑, 껌뻑.

그대로 곯아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루미나가 몽롱한 눈빛을 했다.

그 잘락 말락 한 표정이 웃겨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 카라얀이 침대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당차게 각방은 안 된다고 외치긴 했지만, 막상 같은 방을 쓴다 해서 루미나와 나란히 누울 순 없었다.

또다시 구석행이었다.

코끝에 사과 향이 맴돌았다.

‘달아.’

사과향이 나는 술이라면 아버지가 자주 마시는 터라 끔찍하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루미나의 체향과 섞여서 그런가.

싫기는커녕 다시 한번 그 향을 가까이서 맡고 싶다는 생각이…….

‘이미 미친놈이지만 당사자 앞에서는 티 내지 마!’

퍽-!

카라얀이 냉정하게 제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렸다.

소리가 살짝 컸지만 벌써 꿈나라로 간 루미나는 듣지 못했다.

힐끔.

루미나가 깼는지부터 확인한 카라얀이 슬금슬금 침대 끄트머리로 갔다.

루미나한테 고약한 잠버릇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더는 꼬꼬마가 아니다 보니 같은 침대에 눕는다는 행위 자체의 무게가 심적으로 크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각방을 쓰는 건 또 싫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루미나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인데 그걸 빼앗기는 거니까.

카라얀은 눈을 감았다.

꿈에서도 사과가 나올 것처럼 사과 향이 떠나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자가 사과가 되어 돌아온 건에 대해서 밤새 진지한 고찰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평소대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루미나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군침이 도는 냄새가 폴폴 풍긴다 했더니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엔디미온, 일찍 일어났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던 습관이 아직 남아 있는 터라. 그런데 하트 공자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까? 보이지 않는군요.”

엔디미온이 다소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성격이 나쁜 것도 모자라서 게으름까지 부리다니.

탯줄을 잘 잡아서 작위만 번드르르하지 한량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엔디미온은 카라얀이 못마땅했다.

“몸을 움직여야겠다면서 잠깐 나갔어. 자주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엔디미온의 속내를 모르는 루미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익숙함이 느껴졌다.

엔디미온은 모를 두 사람만의 추억이 담긴 세월이 사소한 대화 속에서 와 닿았다.

“……그렇군요.”

따지자면 엔디미온도 루미나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했다.

서로가 진짜 가족이라고 인지하며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 건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치면 루미나가 카라얀과 지낸 시간보다 저와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적었다.

생각보다 카라얀이 게으르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새삼 깨달은 진실로 다소 기운 없어진 엔디미온이 힘없이 포크질을 했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엔디미온. 잠깐 정원 산책이나 할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원으로 나갔다.

한참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루미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성적표는 잘 받았어.”

“약속드린 대로 편입 시험 결과보다 완벽한 성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반듯하고 성실한 엔디미온의 대답은 그의 필체와 닮아 있었다.

루미나는 그런 성과를 기대한 적 없다고 말하기보다 변치 않은 소년에게서 안도감을 느꼈다.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지 생각해 봤어?”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께서는 제가 가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죠.”

“응.”

“그렇게 돼도 누님은 괜찮은 겁니까?”

“그럼. 나는 상관없어.”

‘난 이미 돈이 많거든!’

겉으로는 점잔을 떨고 있지만 속으로는 방정맞게 외쳤다.

당장 이혼해도 걱정 없을 만큼 금고가 든든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가득 짊어진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누님께서는 하트 공자비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까.”

“그렇겠지?”

곧 이혼하겠지만.

“차후 하트 공작부인이 되는 거고요.”

“그렇지?”

그 전에 이혼해서 안 되겠지만.

루미나는 뒷말을 삼켰다.

“이상합니다. 이 가문을 지킨 사람은 누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제게 모든 걸 넘겨주다니요.”

루미나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 가문이 친척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겼을 거다.

아마 이 저택 또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팔렸으리라.

‘누님이 가문의 재산을 취하려 했으면 충분히 가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어.’

언젠가 절제와 청렴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더니 정말 본인의 것에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엔디미온이 듣기에는 너무나 이타적인 발언이었다.

제 이복누이는 답답할 정도로 착했다.

“누님께서는 지금 행복합니까?”

“응?”

“결혼 생활에 정말로 만족하고 있는 건지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응! 난 이미 행복해. 그러니까 날 너무 의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랑슈스 백작’이라는 작위와 돈은 하나뿐인 가족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이었으니까.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뒤로 빼는 거라면 그러지 않길 바랐다.

환히 웃는 루미나의 얼굴에서는 어떤 거짓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주 직은 제가 정식으로 이어받도록 하겠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엉망이 됐었는데 차근차근 다시 끼워서 모두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루미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엔디미온. 네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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