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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02)화 (102/152)

“말씀하십시오. 제가 모르는 것이라도 알아내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별건 아니고……. 부모님의 장례식 날.”

그날을 언급하자 엔디미온이 움찔했다.

“만약 내가 널 도와주지 않고, 숙부님과 한편을 먹었다고 가정해 봐. 그리고 성인이 되자마자 내가 숙부님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거야.”

“그분께서 아직도 치근거리는 겁니까?”

루미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디미온이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아니야. 아버님이 신경 써 주신 덕에 결혼한 이후로 그런 일은 없었어.”

조제프가 진짜 친척은 자신뿐이라며 몇 번이나 루키우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루키우스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 없었다.

루미나는 조제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어떻게든 나와 연락해 보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딸의 교육을 핑계로 휴양지에 내려갔다고 했던가.’

그 뒤로 제법 조용히 산다고 알고 있었다.

“이건 일어나지 않은 만약의 경우야.”

“알겠습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엔디미온이 나이답지 않은 진중함을 보이며 루미나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넌 날 도와줄 거야?”

드디어 이 질문을 하게 됐다.

루미나는 죽음의 끝에서 하지 못했던 물음을 시간을 뛰어넘어서 해 보였다.

완전히 다른 대답이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오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전생과 완벽히 다른 성장 과정을 겪은 엔디미온이었으니.

어떤 대답을 듣게 돼도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

“어째서?”

루미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네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째서 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한 대답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님도 아시다시피 부모님의 사고 당시 오직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

“하지만 제가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어.”

“아닙니다. 당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죠. 이치대로라면 저는 부모님과 같이 생을 마감했어야 합니다.”

당시를 회상하듯, 엔디미온의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누님의 어머니와 닮은 분이 나타나 저를 도와줬습니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

“그 기억 때문에라도 저는 누님이 위기에 처했다면 기꺼이 살리러 갔을 겁니다.”

“날 도와주면 네가 죽게 돼도?”

“네. 원래라면 저는 그날 죽었어야 했으니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은 루미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날 제가 봤던 그 사람은 환시가 아니었습니다.”

엔디미온의 말을 듣고 비슷한 얘기를 떠올린 루미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님께서는 혹시 짚이는 일이 따로 있습니까?”

있었다.

루미나를 꼭 닮은 여인이 대학살날 도와줬다고 했던 카라얀이 곧바로 떠올랐다.

‘만약 카라얀 님과 엔디미온을 도와준 사람이 엄마라고 한다면 말이 안 돼. 마차 사고 당시 엄마는 죽은 지 오래였는걸.’

“설마 엄마가 살아있는 건.”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루미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루미나는 그녀의 죽음을 목격했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몸체.

따라서 흩날리던 하얀 원피스 자락.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의자.

그녀는 저를 경멸하는 남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그 남자를 갖게 되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나 몸은 가져도 마음은 갖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던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다른 방식으로라도 사랑하는 이의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무르겠다는 선택을.

그녀는 남편에게 죄책감이라는 흉터를 남기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상처 받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사랑했었던 딸만이 평생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모르겠어. 어떻게 된 일인지.”

루미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

“만약 엄마가 살아있다고 해도 너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결코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는 루미나에게서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한 게 아니었다.

“저는 그 진실을 알기 위해 황실의 금지된 서고에 출입하길 원했던 겁니다.”

“흑마법.”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맞습니다.”

의문이 들긴 했다.

왜 그런 위험한 요청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했는지.

루미나가 아는 엔디미온은 대책 없이 위험한 호기심을 가지는 아이가 아니었다.

무작정 부딪치고 보는 아이도 아니었고.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섣불리 묻기 힘들어서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으니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아라벨 황녀님이 내게도 서고 출입을 허가해 준다고 하셨지. 만약 동행하게 되면 나도 널 도울게.”

루미나가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엔디미온에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엔디미온이 면목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으응? 왜?!”

갑자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누님께서는 항상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데 정작 저는 누님께 도움이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서의 공부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엔디미온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루미나는 생각했다.

‘아냐, 엔디미온. 내가 봤을 때 거기서 더 공부했으면 넌 교수님한테 잡혀갔어…….’

***

“우리 아라벨. 졸업식 구경은 잘했느냐?”

“그럼요.”

아카데미 졸업식 이후 황궁으로 돌아온 아라벨은 황제와 티타임을 가졌다.

“마르셀을 보내면 되는 일이었는데 엘리엇뿐만 아니라 너까지 간다고 하다니. 우리 막내딸이 어른이 다 됐구나.”

황제가 허허 웃자 아라벨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마르셀 오라버니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항상 바쁘잖아요.”

마르셀은 술과 놀이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한량 같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꼭 황자로서의 일정이 없더라도 바삐 놀러 다녔다.

“그리고 엘리엇 오라버니가 오랜만에 외출하고 싶다고 하는데 당연히 제가 따라가야죠.”

“…….”

“둘째 오라버니를 첫째 오라버니와 같이 보낼 수 없잖아요.”

“아라벨.”

황제가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는 듯 아라벨을 불렀다.

하지만 아라벨은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엇 오라버니가 다리를 절게 된 건 다 첫째 놈 탓이야.’

어릴 적, 마르셀은 엘리엇을 억지로 사냥터에 데려갔다.

심약한 엘리엇이 사냥 같은 걸 꺼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일 그날.

마르셀이 형의 마음으로 동생에게 사냥을 알려주다가 토끼라도 잡아왔으면 다들 웃으며 얘기하는 일화가 됐을 거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안전해야 마땅할 사냥터에서 마물이 나타난 것이다.

마르셀은 재빨리 도망쳤다.

하지만 제때 도망치지 못한 엘리엇은 마물 앞에서 홀로 남게 됐다.

목숨은 겨우 부지했으나 다리를 절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마르셀 오라버니는 그저 엘리엇 오라버니와 놀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했지만.’

이곳은 황실이었다.

다음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면 제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히는 일도 불사하는.

마르셀이 이런 결과를 바란 적 없다고 해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달리 해석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마르셀이 황제가 되고 싶어 동생을 죽이기 위해 꾀를 낸 게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소문은 금세 잠잠해졌지만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니 형제를 함께 둘 수 없다는 아라벨의 말을 듣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버지. 그 당돌한 아카데미 졸업생에게 금지된 서고 출입을 허락해 줬으면 해요.”

“안 그래도 엘리엇에게 들었다. 원칙대로라면 아무리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라 해도 금지된 서고를 드나들 순 없지.”

“…….”

“하지만 엘리엇이 강하게 밀어붙이더구나. 엔디미온 랑슈스 정도 되는 인재라면 많은 지식을 쌓을수록 더 크게 발전하지 않겠냐고.”

사고 이후 궁에서 나오지 않던 엘리엇이 목소리를 내다니.

다리 불구가 된 자식을 부정하다가 황후가 미쳐서 세상을 뜬 이후 엘리엇은 황제에게 황실의 치부이자 아픈 손가락이 됐다.

그 탓에 엘리엇의 부탁이라면 한 번쯤은 절대적으로 믿고, 들어주고 싶었다.

“그가 작성한 졸업 논문까지 읽어봤다며 제국을 발전시킬 명석한 인재라고 호언장담했지.”

“…….”

“그런 인재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 황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열심히 날 설득하기에 특별히 허락해 주기로 했다.”

더불어 하트 공자비의 동생이니 이 일로 공작에게 빚을 달아둘 수도 있을 거다.

황제는 정치적으로 판단했다.

아라벨과 달리.

“하트 공자비도 같이요.”

“아라벨.”

“출입을 허락해주는 척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된다고 하세요.”

아라벨은 루미나가 동생을 아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동생이 엮이면 걱정돼서라도 마지못해 황궁으로 오겠지.

“……그래, 알겠다.”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락하자 원하는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아라벨의 뺨에 생기가 돌았다.

황제는 막무가내인 딸아이의 청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레기온인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부리는 투정은 결코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앙, 그 자체였다.

제 딸에게는 웬만한 건물 몇 채를 날려버릴 힘이 있었다.

“대신 아라벨. 네 성년식 날, 마르셀의 신부도 같이 구하도록 하자꾸나.”

“으!”

사이가 나쁜 혈육이 결혼할 거라니.

그보다 제 성년식 날 신부를 찾겠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속이 메스꺼워지는 얘기인 터라 아라벨이 대놓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성년식이니까 제도로 올라온 혼인 적령기의 영애들이 그날 많긴 하겠지.’

겸사겸사 신붓감을 구하겠다는 의도일 거다.

하지만 영 비위가 좋지 않았다.

“슬슬 황태자를 임명할 생각이다.”

황태자는 마르셀이 될 것이다.

별일이 없다면 순탄하게 다음 대 황제가 되겠지.

의심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마르셀이 연애라도 했으면 기껍게 결혼을 추진했을 텐데 통 여자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붙여 줘야겠지.”

“…….”

“그러니 너도 제국의 안녕을 위해 오라비를 응원해 주렴.”

“……알았어요. 다만 아버지도 꼭 약속을 지켜야 해요.”

레기온으로 태어난 아라벨은 처음부터 마르셀과 황위로 다툴 마음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내가 그런 귀찮은 일까지 해야 해?

굳이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다 내 것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벨은 루미나를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오라비의 신붓감을 찾아준다.

그런 식으로 거래하게 됐다고 인지했다.

하지만 황제는 제멋대로인 막내딸의 협조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방해만 하지 않길 기도할 뿐이었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어렵군.’

남색이 취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를 만나지 않는 마르셀.

사고 이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한 엘리엇.

제멋대로인 아라벨까지.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후가 살아있었으면 함께 의논했을 터인데.

오랜만에 직면한 자식 문제를 홀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아라벨이 나가자마자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유모에게로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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