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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03)화 (103/152)

***

루미나가 본가에 머무는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간 얼굴을 못 본 엔디미온과 편지로는 하지 못한 얘기를 잔뜩 나눴다.

아직 루키우스와의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내일이면 공작저로 돌아가야지, 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고작 하루 이틀 얼굴 봤다고 엔디미온을 매정하게 두고 가는 것도 좋은 누나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작저로 돌아가는 일정이 자꾸 미뤄졌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별다른 일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루미나와 카라얀이 같은 방을 쓴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엔디미온이 격노했다.

“어째서 한방을 쓰는 겁니까?!”

“내가 남편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하지 않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이제 막 성인이라지만 누님께서는 일 년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한방을 쓰다니 야만적이군요.”

“뭐? 야만?”

“레기온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더니. 덕분에 그것이 소문이 아닌 사실임을 알게 됐습니다.”

“허!”

얼떨결에 짐승 취급당한 카라얀은 어이없어했다.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마음껏 해 봤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볼 뽀뽀만 해본 데다 침대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그에게는 너무 가혹한 표현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엔디미온,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분노한 엔디미온.

억울한 카라얀.

둘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루미나가 나서서 해명해야 했다.

혼인한 이후부터 줄곧 같은 방을 쓴다.

현재 공작가에 레기온이 둘이나 있긴 하지만 야만적이진 않다.

밤에 아무 일도 없다.

손도 안 잡고 잔다는 등의 해명 시간을 갖고 나서야 엔디미온이 진정했다.

루미나는 어린아이한테 ‘동생은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은 부모의 심경이 됐다.

몰래 진땀을 뺐다.

그런 사소한 사건 이후 엔디미온이 각방을 쓰라고 주장하는 사소한 사건이 또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루미나는 카라얀과 함께 다시 공작저로 돌아갔다.

“자주 찾아올게. 어차피 황실 서고 일로 근 시일 안에 만나게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누님.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바로 오면 됩니다.”

엔디미온이 아직 애티가 나는 얼굴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나도 따로 찾아볼게.”

마차 사고 날. 엔디미온이 목격한 클로이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해서.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엔디미온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루미나와 엔디미온이 인사를 나눈 후 카라얀과 엔디미온의 시선이 교차했다.

파직-.

그들은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여우 같은 자식. 검은 속셈을 잘도 숨기는군.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지켜봤을 때는 나뿐만 아니라 하인들 앞에서까지 정중하게 굴고 있어.’

보통 모두에게 친절하면 그냥 친절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러나 카라얀은 결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엔디미온 또한 마찬가지였다.

‘짐승 같은 레기온.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지.’

엔디미온이 살짝 못마땅함을 담아 카라얀을 쳐다봤다.

‘방랑벽이 있는 남자는 남편으로 최악이지. 근래 얌전히 후계 수업을 듣는다고 하지만 방랑벽은 절대 못 고치니 언제 누님의 눈에서 눈물을 뽑게 할지 모르는 일.’

카라얀은 누님한테 굉장히 잘해 줬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가 언제 어떻게 변심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레기온이었으니까.

보통 아내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굴면 그냥 다정한 남편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결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고집을 굽히지 않으니 한집에서 지내는 동안 서로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감시했다.

당연히 소득은 없었다.

어떻게든 제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꼬투리 하나 잡아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은 헤어지는 오늘까지도 지속됐다.

지독한 신경전이었다.

루미나는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방실방실 웃었다.

‘둘 다 제발 그만 싸워…….’

실제로는 무지하기는커녕 서로 눈빛으로 욕하는 게 너무 잘 보였다.

차라리 눈치가 없고 싶을 지경이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도 친하게 지내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꾸준히 잘 지냈으면 좋겠어.”

‘앞으로 셋이서 만나면 안 되겠다.’

겉과 속으로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또 거짓된 화목함을 연기했다.

“크흠. 맞아. 잘 지내지.”

“네. 그렇습니다.”

‘거짓말쟁이들.’

거짓과 연기가 판치는 와중이었다.

“아참, 누님. 선물입니다.”

엔디미온이 떠나는 루미나에게 싱그러운 꽃다발을 건넸다.

“웬 꽃다발이야?”

“제게도 선물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건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미였는데.”

졸업식 날 많은 학부모들이 그렇듯 루미나 또한 꽃다발을 건넸던 것뿐이었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저었다.

“누님께서는 제 사람에게는 아끼지 않는다고 하셨죠. 저 또한 그런 겁니다.”

루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엔디미온이 자신을 가족으로 완벽히 인정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엔디미온이라면 마차 사고 날 겪은 괴현상이 없었어도 가족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위험에 빠진 저를 구하러 올 것 같았다.

이 꽃다발은 그런 의미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내가 엔디미온에게 선물한 건 정원의 풍경이었지.’

루미나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커다란 정원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그 어떤 정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때 카라얀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누님의 하나뿐인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왜 하나뿐인…….”

카라얀은 제가 루미나의 남편이니 ‘하나뿐’이라는 표현은 틀렸다며 정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꽃다발을 안은 채로 꽃보다 어여쁘게 미소 짓는 루미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 정말로.”

장밋빛으로 발갛게 물들인 뺨을 한 루미나가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그들은 랑슈스 저택을 떠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

그 시각.

하트 공작저.

거대한 저택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인데도.

“작은 마님께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했지?”

“오늘 돌아오신다고 했어.”

“하지만 엊그제도 온다고 하셨는데 미루셨잖아! 설마 여기서 일주일을 더 외박하시는 건…….”

하녀, 리나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른 하녀들 또한 마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례식 분위기였다.

“작은 마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셔야 하는데.”

“맞아. 공자님은 모르겠고, 작은 마님…….”

한 하녀가 다소 불경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다들 그녀를 책하지 않고 조용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루미나의 부재가 길었다.

좀처럼 집을 떠나는 일 없는 루미나가 외박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루미나가 잠깐 본가에서 머무르다 돌아가겠다고 통보한 첫 하루는 다들 충격받았지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넘어가자 저택은 눈에 띄는 변화를 맞이했다.

비가 내리는 날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이다. 실제로는 해가 쨍쨍한데.

재난 상황이었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루미나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던 중이었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지?”

집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작은 마님께서 지금 돌아오신다고 하신다. 어서 자리로 돌아가거라.”

“세상에, 집사님!”

“오늘처럼 집사님이 멋져 보이긴 처음이에요!”

하녀들이 구명줄을 잡은 것처럼 반겼다.

순간 집사는 그녀들이 이토록 밝은 성격이었나 하고 제 기억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마님이 돌아오신다고?”

마침 헉슬리가 지나가다가 대화를 엿듣게 됐다.

반색하며 그들 사이에 끼었다.

“그렇대요!”

이제껏 조그맣게 이야기하던 하녀 중 하나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녀와 마주 본 채로 헉슬리가 씨익 웃었다.

“그러면 작은 마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

루미나를 태운 마차가 멈춰 섰다.

다들 긴장된 시선으로 문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카라얀이 나왔다.

‘뭐야.’

‘작은 마님 어디 가셨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보내는 언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실망하고 있었다.

카라얀만 어리둥절해졌다.

곧이어 카라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루미나가 꽃다발을 품에 한가득 안은 채로 내렸다.

그 순간 아기 천사들이 팡파르를 울리며 저택 위로 무지개가 활짝 뜬 듯했다.

그리고 일렬로 선 기사들이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오셨습니까! 작은 마님!”

“오셨습니까!”

“…….”

루미나는 할 말을 잃었다.

기사들의 복장이 검은색인 데다 그들 대다수가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기 때문에 엄청난 위압감을 줬다.

어쩐지 불법 조직에게 거창하게 인사를 받는 사모님이 된 기분이었다.

‘아버님한테도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잖아…….’

평소 그들이 하지 않는 행동인 걸 고려하면 누군가의 장난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유리가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람.

그자가 범인이다.

카라얀도 눈치챘는지 유리와 똑 닮은 시선으로 헉슬리를 쳐다봤다.

루미나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헉슬리의 의견에 동의한 다른 기사들도 문제였다.

생긴 것만 덩치 크고 무서웠지 속내는 순박한 어른들이었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까 내가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덩치에 맞지 않는, 기사 아저씨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본 루미나가 활짝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가에 하나같이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나름 훈훈한 분위기가 된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험악한 기사들 사이를 가로질러왔다.

“작은 마님!”

“올리비아!”

처음 만났을 때 외모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는 올리비아가 팔을 활짝 벌렸다.

루미나가 올리비아의 품에 쏙 안겼다.

무럭무럭 자라서 클 대로 다 큰 루미나였지만, 올리비아가 장신에 속하는 터라 폭 안길 수 있었다.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보고 싶었지! 지금도 올리비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허겁지겁 돌아왔는걸.”

헤헤.

루미나가 선의의 거짓말로 올리비아의 마음을 간단하게 훔쳐갔다.

올리비아는 모든 이의 부러움을 받으며 당당하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이 조금 넘게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이러다가 한 달 넘게 본가에 있다가 돌아왔다가는 축제라도 벌이는 거 아냐?’

짧은 부재치고 거창한 환영식이었다.

루미나는 부담스러운 한편 몹시 기뻤다.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웃은 루미나가 이만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올라가려고 하니 올리비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했다.

“작은 마님! 제발 공작님의 얼굴부터 먼저 보고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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