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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04)화 (104/152)

“아버님을?”

루미나는 자신이 없는 동안 저택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했는지 몰랐다.

때문에 루키우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지레짐작했다.

알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카라얀이 선수를 쳤다.

“그 사람 얼굴은 왜 억지로 보라는 거야.”

“억지라니요. 공자님께서 그동안 작은 마님을 독점해서 제가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독점은 무슨.

검은 속내를 철저하게 감추는 엔디미온을 감시하느라 혼이 났는데.

그 치열한 신경전을 모르니 독점 운운할 수 있는 거다.

루미나를 제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시간은 오히려 공작저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피곤하시면 나중에라도 괜찮아요. 오늘 중으로만 꼭 만나주세요.”

올리비아가 거듭 청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구나.

루미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지금 당장 아버님께 갔다 올게.”

루미나가 집무실 쪽으로 쫑쫑 발걸음을 옮기니 카라얀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나도 같이 가.”

“좋아요!”

카라얀이 들으면 안 될 얘기를 해야 한다면 아버님이 알아서 내쫓겠지.

그런 생각으로 루미나는 굳이 카라얀을 밀어내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선물한 꽃다발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카라얀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문손잡이가 닳도록 오가던 곳이었다. 루미나가 습관처럼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런데-.

‘어두워.’

실내의 분위기마저 유령이 나올 것처럼 스산했다.

‘……대체 분위기가 왜 이런담?’

문을 두고 공간과 공간이 다른 세계로 나뉜 것 같았다.

집무실만 아예 다른 차원인 것 같은 느낌이다.

루미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아, 아녜요.”

카라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무실 내부가 어두침침한 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사실 카라얀은 루미나의 동그란 뒤통수만 바라보느라 안이 밝은지, 어두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령이 여럿 나올 분위기인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당장 눈앞에 있는 루미나의 뒤통수가 몇 년을 봐도 매번 새롭게 귀여운 게 더 중요하지.

이 사실을 모르는 루미나는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이상하다.

분명 뒤쪽은 밝은데.

다시 정면을 바라보니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없애버린 것처럼 깜깜했다.

‘아버님이 여기 있는 거 맞아? 아무도 없는데 올리비아가 착각한 거 아냐?’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실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게 됐다.

뒤꿈치를 살짝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루미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성큼성큼 거침없이 실내를 가로지르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카라얀이었다.

“왜 이렇게 어두워. 불부터…….”

“카라얀 님! 자, 잠깐만요.”

루미나가 목소리를 낮춘 채 황급히 카라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카라얀의 시선이 루미나를 따라갔다.

커튼이 단단히 쳐져 있어서 어두컴컴했던 실내.

루미나와 카라얀이 들어올 때 제대로 닫지 않은 문 틈새로 빛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그들의 맞은편에 있는 커다랗고 검은 형체가 얼핏 보였다.

두 사람은 ‘그것’에게로 다가갔다.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동안에도 ‘그것’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가?

꿀꺽.

그것, 루키우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킨 루미나는 선글라스를 벗겨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해야 할지 갈등했다.

다행히도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이 안정적으로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흉악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 단순히 자고 있는 것이었다.

“주무시나 봐요.”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 저러다가 허리가 나가 봐야 침대에서 눕지.”

카라얀이 툴툴댔다.

나쁜 말을 하는 듯해도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게요. 편하게 주무시면 좋을 텐데.”

아무리 목소리를 낮췄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만큼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는데도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던 루미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들고 있던 꽃다발을 뒤적거리더니 분홍 장미 한 송이를 꺼내 그의 귀 뒤에 꽂았다.

“큭.”

루미나의 돌발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카라얀이 소리 내어 웃었다.

확실히 장미 한 송이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느낌상 실내도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움찔-.

그 소리를 듣고 루키우스가 일어나는 기색을 보였다.

화들짝 놀란 루미나는 곧바로 카라얀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뭐지? 방금…….”

“일어나셨어요?”

루키우스가 위화감을 느끼기 전에 루미나가 선수 쳤다.

“저희가 방금 왔는데 딱 맞춰서 일어나셨네요. 그렇죠, 카라얀 님?”

“큼. 그렇지.”

카라얀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느라 괴기한 표정이 됐다.

하지만 원래도 아버지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고는 했던 불효자였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어둠을 몰아낼 정도로 생글생글 웃는 루미나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카라얀을 쳐다봤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방금 왔다고 했나?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그런데 웬 꽃이지?”

“제 동생이 헤어질 때 선물로 줬어요.”

일순 귀에 꽂힌 꽃을 말하는 줄 알고 뜨끔한 루미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한 송이 드릴까요?”

“됐다. 그보다 어째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날 찾아온 것 같은 행색이지?”

“올리비아가 꼭 아버님께 얼굴을 보이라고 해서요.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일은 무슨. 올리비아가 네게 괜한 말을 했나 보군.”

“그런가요?”

딱히 급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심각한 일이 있나 싶었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보다 아버님!”

루미나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침대에 가서 주무세요! 침대가 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편하게 자라고 있는 거죠.”

“…….”

“침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루미나의 다소 황당한 발언을 듣고 루키우스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침실로 가야겠군.”

“좋은 선택이에요. 침대가 웃고 있겠어요. 혹시라도 아버님이 딴 길로 샐 수 있으니 제가 호위할게요!”

콧김을 훙 뿜어대며 루미나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톡톡 쳤다.

제가 새끼손가락으로 상대해도 이길 수 있는 아이가 호위를 하겠다는 모습이 퍽 당돌해 루키우스가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보는 것과 실제 루미나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이렇게 곧바로 일어날 줄 알았으면 그냥 깨우는 건데!’

루미나는 자신의 장난이 들킬까 봐 일부러 루키우스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눈치챌 것 같아서.

세 사람은 어두운 집무실을 나왔다. 카라얀도 덤으로 루키우스의 호위를 맡게 됐다.

“많이 피곤하세요?”

루미나가 걱정을 담아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분명 엔디미온의 졸업식을 보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잠든 레기온이라니.

사뭇 불안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냥 깊은 잠을 자고 싶어서 노력했을 뿐이다. 노력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지.”

루키우스는 일부러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지난 나날은 무감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그런데도 내일이면 오겠지 했던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두 아이가 잠깐 외박한 것뿐인데 루키우스는 이 저택이 지나치게 넓고 휑하다고 느꼈다.

아이리스의 죽음 이후 카라얀은 집에 있지 않은 날이 많았다.

루미나는 원래부터 이 집에 있던 아이가 아니었고.

항상 제 곁에 있어 주던 아이도 아니었고, 앞으로 계속 있을 아이도 아니니 그들의 부재를 못 견뎌서는 안 됐다.

하지만 오 년에 가까운 시간은 철옹성 같은 그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어딜 가나 두 아이가 웃고 떠들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막상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들이 없는 며칠간 이상한 감정에 휩쓸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한때 브랜든에게 루미나와 같이 다니더니 인간성이 옮았냐고 한마디 했던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없는 동안 일부러 밤을 새우다가 오늘 몰아서 자려고 했다.

그마저도 레기온인 탓에 녹록지 않았지만.

‘한 시간쯤 잔 것 같군.’

아이들이 없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서 일부러 잠을 청하려 했다는 속내를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루미나와 카라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속한 것처럼 어떤 장난을 쳤는지 결코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루키우스는 자신의 귀에 어여쁜 장미가 꽂혀 있는 줄 몰랐다.

그 상태로 세 사람은 저택을 돌아다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목격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봐.”

“어머. 작은 마님이 돌아오셨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작은 마님이 없었으면 지금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었겠지.”

평소와 같이 정갈하고 무서운 모습이었지만 귀에 꽃을 꽂은 하트 공작.

저를 닮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발랄하게 걸음을 옮기는 루미나.

한 발짝 뒤에서 웃고 있는 카라얀.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누가 그 대단한 공작님의 귀에 꽃을 꽂았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더 예뻐지는 사랑스러운 작은 마님밖에 없었다.

하녀들이 멀리서 그들을 훈훈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그렇게 하트 공작저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 범죄란 없었다.

“이게 뭐지?”

잠시 후, 루미나와 카라얀이 못 말리는 악동처럼 불려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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