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05)화 (105/152)

***

루키우스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올 때만 하더라도 루미나에게는 위대한 계획이 있었다.

딱 봐도 그가 피곤해 보이니 몇 시간 지나면 또 곯아떨어질 터.

그때를 노려 그의 침실로 은밀히 잠입하는 거다.

그리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가가서 증거를 인멸하면 끝.

이보다 완벽한 계획은 없었다.

‘카라얀 님도 도와주겠다고 해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려 공범자도 있었다.

실패란 없다는 생각으로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자연스럽게 하녀들에게 둘러싸였다.

“작은 마님! 이것도 입어 보세요!”

“이것도요! 작은 마님이 본가로 가 계시는 동안 새로 들인 옷이 많아요!”

“맞아요! 얼마나 많이 밀렸는데요. 하나씩 입어보도록 해요.”

평소 루미나가 주변 고용인들에게 살갑게 대한 덕에 그들은 루미나를 좋아했다.

원래도 작은 마님께 깍듯이 대해야 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고 착하며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빵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은 게 그녀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런 과한 사랑으로 인해 다름 아닌 카라얀이 조금 울적해졌다.

자신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루미나는 여전히 하녀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서도 작은 감자를 독점해 본 적이 없을지도.’

카라얀의 머릿속에 이런 슬픈 생각이 차오르는 동안, 루미나는 이를 모른 채 정신없이 지냈다.

한껏 여유를 부린 것이 실수였을까.

루미나가 하녀들의 손에서 한창 인형놀이를 당하던 중 루키우스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카라얀과 함께.

힐끔힐끔.

루미나는 책상 위에 놓인 활짝 핀 장미와 선글라스 탓인지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루키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미묘하게 어색한 침묵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들을 불러놓고 루키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네 죄를 네가 스스로 고해라, 라고 말하듯.

대록대록 눈을 굴리던 루미나는 배시시 웃었다.

한번 뻔뻔하게 가기로 한 거.

끝까지 뻔뻔하게 행동하는 거다.

“주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한숨 자려고 했는데 누군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더니 내게 잠자는 숲속의 마왕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해 주더군. 그 어이없는 소문을 나 빼고 전부 알고 있다면서 말이야.”

브랜든 아저씨!

루미나가 속으로 입이 가벼운 브랜든을 원망했다.

“아무리 내가 미쳤다고 하지만 잠결에 귀에 꽃을 꽂았을 리는 없고.”

루키우스가 농담기라고는 귀를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이런 대담할 짓을 할 사람이 내가 알기로는 없단 말이지.”

있었으면 죽였을 테니까.

어쩐지 그런 말이 환청으로 들리는 듯했다.

진짜 죽이겠나 싶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어조였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하지만 루미나는 당당했다.

전혀 기죽지 않고 상황을 설명하려던 그때.

“제가 했습니다.”

카라얀이 선수 쳤다.

“네가? 어째서?”

“……어울려서.”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

선글라스로 가린 루키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카라얀이 이런 장난을 칠 성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루미나가 혼이 날까 봐 미리 나서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처음부터 혼낼 생각도 없건만.

두 사람을 부른 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하는 게 퍽 귀여웠기 때문이다.

몸은 다 큰 듯한데 제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또한 장난을 눈치챘다는 걸 알리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루키우스는 가만히 있어도 흉흉한 분위기가 됐다.

전혀 살가운 이유로 부른 것 같지 않았다.

“앞으로 선물을 전할 때는 목적지를 제대로 정하고 줘라.”

“알겠습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많이 유해진 편이었다.

“루미나.”

“네? 네!”

“황궁에서 이게 왔더구나.”

루키우스가 황실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루미나에게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니 금지된 서고의 출입 허가증이었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듣자 하니 황녀가 억지를 부렸다던데 부담스러우면 말해라. 내 선에서 처리해 주마.”

“아뇨, 아뇨.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저도 서고에 가보고 싶었는걸요.”

“필요한 자료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호기심이죠.”

루미나가 시치미를 뚝 뗐다.

“그리고 혼자서 그 많은 자료를 하루 만에 모두 훑어볼 수 없잖아요. 동생이 곰발이라도 필요해 보여서 빌려주려고요.”

“…….”

“제가 봐서 뭘 알겠어요.”

어쩐지 루키우스의 질문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루미나는 그에게 해를 끼칠 만한 어떤 작당모의도 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무해한 말투로 말했다.

‘흑마법이 관련됐다 해도 내가 이 목걸이를 강제로 벗길 방법을 찾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문득 루미나는 카라얀과 언약을 한 이후로 한 번도 벗은 적 없는 목걸이의 무게감을 느꼈다.

“그래. 네 의견이 그렇다면 갔다 오도록 해라.”

루키우스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카라얀이 끼어들었다.

“나도 갈게.”

“네?”

“나도 따라서 가겠다고.”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루미나가 선뜻 가겠다고 하니 도저히 불안해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널 혼자 보내?”

비슷한 이유로 졸업식도 따라왔던 거 같은데…….

“그리고 곰발이라도 빌리겠다며. 나도 빌려줄게. 내 손.”

카라얀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루미나는 심오한 표정으로 그 손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순간 카라얀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흘러넘쳤다.

‘내가 너무 잡아달라는 것처럼 굴었나?’

그런데 막상 또 손을 내밀고 보니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저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방금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은데.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으니 이제 와서 잡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난 결혼했잖아.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거지! 그런데 갑자기 잡았다고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둘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어서 카라얀의 자아가 다양한 의견을 냈다.

반박의 반박의 반박의 반박이 계속됐다.

결국 하고 싶은 행동은 하나였다.

루미나의 손을 잡는 것.

잡을까, 말까.

잡을까, 말까.

거듭된 고민 끝에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거리다가 손을 치워서 목을 감쌌다.

열이 올라 붉어진 목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루미나가 이래도 괜찮냐는 듯이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금지된 서고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졸업 논문이 2황자의 마음에 들 만큼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루미나는 아라벨의 생떼로.

각기 다른 합리적인 사유가 있어서 가게 됐는데 카라얀에게는 그런 사유가 부족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루키우스가 말했다.

“어디에서나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기사들이 호위로 따라간다 해도 서고 내부로는 출입이 불가능할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본인이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카라얀이 불편해할 게 뻔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가늠하던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해놓으마. 같이 가도록 해라.”

근 오 년간 엔디미온이 매일 밤낮을 지새운 끝에 얻은 출입증이라는 걸 고려하면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으음.’

루키우스가 카라얀을 막아주길 바랐던 루미나는 애매한 감정을 삼켜야 했다.

‘명목상 학구열 때문이니까 조금만 조심하면 별일 없겠지. 그리고 거기에서까지 싸우겠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미나는 애써 불길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루미나와 카라얀은 황궁으로 향했다.

서고로 가는 길에 아라벨을 마주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굳게 닫혀 있는 서고의 문 앞까지 오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엔디미온을 만날 수 있었다.

“엔디미온!”

“누님. 잘 지내셨습니까.”

“응. 너는?”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트 공자님은 어째서 여기까지 와 계시는지.”

“아. 카라얀 님도 같이 들어가기로 했어. 폐하의 인가도 받았고.”

“그렇군요.”

카라얀과 엔디미온이 서로를 쳐다봤다.

반전은 없었다.

신경전은 여전했다.

“서고에서는 정숙해야 합니다.”

“왜 날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모르실까 봐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엔디미온에게 이제 카라얀은 짐승이었다.

착하고 나름 순진한 제 누이와 매일 밤 한방에서 지내는 짐승!

“너야말로…….”

카라얀이 엔디미온을 샅샅이 훑어봤다.

하지만 모범생의 정석인 엔디미온에게는 흠잡을 점이 없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어쩐지 연약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미안하네. 몸이 이래서 조금 늦었군.”

절뚝, 절뚝.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가까워졌다.

“그간 다들 잘 지냈는가?”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엘리엇이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