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별을 뵙겠습니다.”
루미나와 엔디미온이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다.
카라얀은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목을 빳빳이 세우고 삐딱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미나가 정중한 어조로 엘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 있겠지만, 어째서 황자님께서 이곳에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부황께 오늘 금지된 서고의 안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찾아왔네.”
“…….”
“금서의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따로 사서를 두지 않아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한마디로 감시 역할이라는 의미였다.
“황자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공자비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지.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여건상 긴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아쉬웠으니.”
엘리엇이 루미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병약한 그의 얼굴에 일순 생기가 돌 만큼 기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루미나는 속으로 흠칫하게 됐다.
나한테 딴 마음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기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필요 이상으로 호감을 보였었지.’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일로 엮이지 않도록 루미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수작 그만 부리고 문부터 열지.”
다행히 카라얀이 루미나를 보호하듯 제 뒤에 두며 재촉했기에 모르는 척은 쉬웠다.
“공자는 여전히 혈기가 넘치는군.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엘리엇이 하하 웃으며 날이 따뜻한데도 장갑을 낀 손으로 열쇠를 꺼냈다.
“황족만이 이 열쇠를 쥘 수 있으며 그중 폐하의 인가를 받은 자만이 열쇠로 서고를 열 수 있지.”
“…….”
“무엇도 아닌 자가 섣불리 열쇠를 쥐면 온몸이 타들어 가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지팡이를 짚으며 문 앞으로 간 엘리엇이 언뜻 봤을 땐 평범한 열쇠를 꽂아 넣어 문을 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금지된 서고라는 흉흉한 명칭과는 달리 서고는 밝고, 넓으며 쾌적했다.
웬만한 도서관만큼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터라 언뜻 봤을 땐 평범한 도서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라벨 황녀님께서 보이지 않네요.”
모두 들어오자 문이 굳게 닫히고, 엘리엇의 옆에 선 루미나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황궁에 오자마자 아라벨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벨은 어젯밤에 공자비와 만날 날을 고대하다가 밤을 새웠는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더군.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지.”
엘리엇의 말투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하트 공자비를 많이 보고 싶어 하던데. 지금이라도 벨을 깨우라는 지시를 내릴까?”
“아뇨,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과잉 친절이었다.
루미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슬쩍 엘리엇과 거리를 뒀다.
인간의 발치에 있는 도토리를 쏙 들고 도망치는, 겁 많은 다람쥐를 발견한 것처럼 엘리엇이 웃었다.
카라얀이 그 모습을 잔뜩 경계한 채로 지켜봤다.
‘황자 놈이 은발이긴 하지만.’
엘리엇의 시선에는 사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러니 요주의 인물 취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엔디미온보다 더 위험했다.
카라얀이 털을 잔뜩 세우고 발톱을 드러낸 짐승처럼 굴자 엘리엇이 재롱을 부리는 아이를 보듯 조용히 웃었다.
그게 또 카라얀의 신경을 긁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아 봤자 얼마나 많다고 저런 늙은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지.
카라얀이 못마땅한 듯 쳐다보든 말든 엘리엇의 신경은 이미 엔디미온에게 옮겨가 있었다.
엔디미온은 생각보다 방대한 양의 장서를 복잡한 눈빛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졸업식 이후 자네의 졸업 논문을 읽었네. 굉장히 흥미로웠어.”
“감사합니다. 황자님.”
“에테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히 분석하고, 다양한 가설을 세우며 현대 마도공학의 에테르 사용법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
“사람들에게 에테르란 그저 동력이고 에너지일 뿐인데 그 기원을 찾으려 하는 접근이 새롭고 재미있더군.”
엔디미온은 황자가 제게 알맹이 없는 공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논문을 읽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글라스 무어가 집필한 사변적 실재론은 배웠나?”
“네.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교수? 누구의?”
“마크 에반스입니다.”
“흐음.”
엘리엇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좋다기보다는 나쁘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최근에 에리카 가르티라는 약초학자가 마물의 쓰임에 대해 전파하고 있던데.”
“그분이 낸 논문은 이미 전부 읽었습니다.”
“좋군.”
이번에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인 엘리엇이 본론을 훅 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자네는 이곳에서 무슨 책을 찾고 싶어 하는 거지?”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지식의 보고인 만큼 다양하게 읽고 싶습니다.”
“랑슈스 군. 오늘 자네가 열람한 도서가 무엇인지 지켜보고, 폐하께 보고할 예정이야.”
“…….”
“허락된 시간은 오늘뿐이지. 혼자서는 결코 원하는 자료를 얻지 못할뿐더러 괜히 불온 종자로 의심될 만한 서적을 뒤적거렸다가는 폐하의 분노만 사겠지.”
엘리엇은 지금 엔디미온에게 곧이곧대로 말하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내가 다리는 이렇지만 눈은 멀쩡하다는 걸 잊지 말게.”
“……흑마법에 관한 서적을 찾고 있습니다.”
“흑마법이라. 확실히 관련된 서적은 이곳에 있지. 소문에 따르면 하트 공작도 흑마법에 관한 연구를 한다던데…….”
엘리엇이 말끝을 흐리며 루미나를 쳐다봤다.
왜 카라얀도 아닌 자신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어수룩한 척해야 했다.
“네?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흑마법이란 공개적으로 연구할 수 없는 분야니 모를 수도 있지. 아니면 공작의 악명 탓에 생긴 헛소문일 수도 있고.”
엘리엇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엔디미온에게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이곳에 있는 도서는 다양한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지. 구체적으로 찾는 분야라도 있나?”
엔디미온은 2황자가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까 저건 아카데미 교수님에게서 자주 봤던 시선이었다.
보통 연구밖에 모르는 교수들은 제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면 미련 없이 떠났다.
도와줄 수 있는 분야라면 아는 걸 열정적으로 떠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루미나는 상관없지만, 카라얀이 신경 쓰였다.
눈치 빠른 엘리엇이 루미나와 카라얀에게 말했다.
“잠깐 서고를 구경하고 있겠나?”
“그러면 저는 저쪽에서 둘러보고 있을게요.”
엔디미온에게는 열람한 서적을 모두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협박했던 그였다.
그러나 루미나나 카라얀이 어떤 서적을 읽든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멀어지고, 한참 침묵하던 엔디미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엘리엇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식상하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이 세상은 삶만큼이나 죽음이 만연하지. 하지만 상실에 파묻힌 인간은 그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해.”
“…….”
“어리석은 일이야.”
“누군가를 되살리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순간 엘리엇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엔디미온을 훑어봤다.
진실을 꿰뚫는 듯한 시선이었다.
“직접 봤나 보군. 죽은 자를.”
“…….”
“자네처럼 똑똑한 자가 유령 같은 환시 때문에 금서 열람을 바랐을 리는 없고.”
“이 이상은 사적인 얘기입니다.”
깊은 사정까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다는 듯 엘리엇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으로부터 해답을 찾으려고 한 건 좋은 선택이야. 현재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니까.”
엔디미온의 예상대로 엘리엇은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가능성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건 흑마법이라도 불가능하지. 기껏 해 봤자 시체로 인형놀이를 하는 정도.”
“……그렇군요.”
“과거와 현재는 모두 연결돼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지.”
“…….”
“흑마법으로 ‘죽음’이라는 상황을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흑마법을 그 정도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현존하지 않지.”
엔디미온은 자꾸만 아카데미 교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경청했다.
“상황 자체의 원인을 찾는 거라면 누군가 인형놀이를 했거나.”
“…….”
“사람을 착각했을 수도 있겠군.”
“그런 생각 또한 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랑슈스 군.”
엘리엇이 인자하게 소년을 불렀다.
“답이 없을 것 같은 문제와 직면했을 때는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 무지의 상태로 하나씩 되짚어 봐야지.”
“…….”
“진리처럼 맹신하고 있는 모든 관념을 지우는 거야. 당시 느꼈던 오감까지도.”
엔디미온이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엘리엇의 말을 새겨들었다.
“제아무리 똑똑해도 정신은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어쩌면 해답은 자네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네.”
엔디미온은 순간 ‘알겠습니다. 교수님.’이라고 대답할 뻔해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한편 그 시각.
루미나는 뽈뽈대며 서고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엘리엇이 어째서 순순히 주변을 둘러보라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대체 어느 나라 언어지. 공용어가 자리 잡은 게 대략 백 년 전쯤이니까 그때 쓰인 책들인가 보네.’
읽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관리가 잘 돼 있지만, 오래된 티가 나는 책들이 서고를 가득 채웠는데 모두 낯선 언어로 기록돼 있었다.
어디 가서 멍청이 취급당한 적이 없건만.
곰발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은 루미나가 좌절했다.
‘도와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엔디미온은 이걸 읽을 줄 아니까 금서를 읽겠다고 한 거겠지?
아무나 아카데미 수석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이 기쁜 한편 슬펐다.
도움이 돼 주지 못한다는 의미니까.
다소 울적한 눈빛으로 카라얀과 함께 서고를 돌아다니던 루미나는 문득 눈을 반짝였다.
그림 동화책이 있었다.
‘이건 그림책이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겠지.’
아예 처음 보는 문자는 읽을 수 없지만 그림은 만국 공통 언어였다.
자신감을 되찾은 루미나가 처음부터 찬찬히 그림책을 읽어봤다.
금서답게 익히 알고 있는 동화가 아닌 난생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마물이 잔뜩 등장하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다양한 마물이 사실적인 그림체로 그려져 있어서 작게 감탄하며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이 애벌레가 주인공인 건가? 이런 마물은 또 처음 보네.’
대충 느낌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애벌레 마물이 완전변태를 위해 고치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기니 고치를 탈피한 ‘그것’은 거대한 나비 모양 날개를 단 인간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