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흑백이었지만 오색찬란한 그림 못지않게 화려한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보게 됐다.
그만큼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거 너 아니야?”
같이 동화책을 보고 있던 카라얀이 목소리를 낮춘 채 귓가에 속삭였다.
솜털이 쭈뼛 설 만큼 낮게 울리는 카라얀의 목소리 탓에 루미나가 움찔했다.
큰소리로 떠들 얘기가 아니니 당연한 행동이긴 했다.
그런데 괜히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귓가가 간지럽고 몸을 배배 꼬고 싶어졌다.
루미나는 일부러 동화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예 딴 말을 했다.
카라얀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았지만 일순 너무 당황한 탓에 헛말이 나온 것이다.
“이 여자가 더 예쁘잖아요.”
“무슨 소리야!”
즉답이 나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너무 컸던 터라 깜짝 놀란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봤다.
“미안. 이렇게 크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 젠장.”
카라얀이 안절부절못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장된 반응인 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한편, 루미나의 귀가 걱정됐다.
“많이 아파?”
“아뇨, 아프지 않아요! 그냥 놀란 것뿐이에요.”
카라얀이 하고팠던 말은 제 눈에는 루미나를 제외하면 전부 못생겼다는 거였다.
삽화 속 여인의 인상이 얼마나 흐리멍덩한지 방금 봤는데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제라도 그 얘기를 하려는데 황급히 그림책으로 눈길을 옮긴 루미나가 먼저 말했다.
“그런데 카라얀 님의 말대로 전체적인 모양새가 비슷하긴 하네요.”
주인공은 레기온인 건가?
하지만 나비 날개를 달기 전에는 인간의 형체를 찾을 수 없는 마물이었다.
레기온이라 해도 능력을 쓸 때 어느 정도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는데 말이다.
‘마물이 고치에서 나오니까 레기온, 그러니까 인간이 된 건가? 하지만 말도 안 돼.’
식물이 동물이 됐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비로운 인상의 여인.
아니, 마물이었던 나비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마물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그녀가 마물에게 하트 모양의 보석을 건네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갑자기 이유 없이 보석을 줬을 리는 없고. 동화가 으레 그렇듯,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보통 하트 모양은 심장이나 사랑을 의미하니까 비슷한 거겠지.’
어린아이들한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동화책과 비교하면 이 수상한 그림책은 내용부터 이상했다.
루미나는 그중 확연히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나비 여인이 보석을 건넨 이후부터 이 동화에서 인간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물이 인간이 된 거야.’
각기 다른 모양새의 마물은 각기 다른 얼굴의 인간이 됐다.
길쭉한 팔과 다리.
털 없이 매끈한 피부와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얼굴.
저와 같은 인간을 마주하게 된 나비 여인은 꽃을 뱉어냈다.
그리고 긴 여정 끝에 수많은 인간 친구를 만든 나비 여인은 만발하는 수많은 꽃 속에서 눈을 감았다.
분위기상 죽음을 맞이한 듯했다.
그리고 동화는 끝이었다.
동화책을 덮은 루미나의 감상은…….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잔혹한 장면은 없었지만 마음이 심란해지는 내용이었다.
불온사상을 이유로 금서로 지정될 만도 했다.
카라얀 또한 동화책 내용이 심상치 않은 탓에 덩달아 혼란스러운 눈빛을 했다.
책을 쥔 채로 당혹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데 어느새 엔디미온과 대화를 마친 엘리엇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 서고의 유일한 그림 동화책이지.”
“황자님께서는 잘 아시나 봐요.”
“다리가 이런 탓에 마땅한 취미 생활이 없는 날 위해 부황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셨지.”
“…….”
“이곳의 모든 서적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였어.”
엘리엇이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동화책을 바라봤다.
“저자인 미미르는 오직 이 동화만을 남겼지.”
‘이걸 미미르라고 읽는구나.’
동화책은 다른 금서처럼 백 년 전쯤 집필된 듯했다.
제국식 이름이 아닌 데다 성씨 또한 없는 걸 보니 ‘미미르’는 필명 같았다.
“읽고 난 소감이 어떻지?”
“네? 네……. 그림이 예뻤어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한 엘리엇은 루미나의 대답을 듣고 본인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이라는 종족이 존재하지 않았던 마물의 시대. 그곳에서 인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동화로 표현한 서적이지.”
“…….”
“다만 인간의 근원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순했기 때문에 금서로 지정됐어. 많은 이들이 이걸 볼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럽지.”
“하지만 불온사상 서적이라면 많은 이들이 보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옛 기록이나 소수의 유랑 민족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전승되는 얘기니 마냥 불온하다고 입막음하기는 과하지.”
엘리엇은 황족이니 제국민이 불온한 서적을 읽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입장이 모호했다.
루미나가 다소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 순간.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치유의 레기온. 그런 식으로도 부른다지.”
“네? 치유요?”
“동화 속 주인공이자 최초의 인간인 그녀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없앨 수 있다고 하더군.”
어쩌면 동화 속 나비 여인과 자신이 단순히 외형적 특징만 닮은 게 아니라면…….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해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실존할지도 몰라.”
“농담이 뛰어나시네요.”
“아니, 이걸 봐.”
엘리엇이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흰 꽃이었다.
“마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석만큼이나 에테르를 가득 담고 있는 꽃이네. 우연히 얻게 됐지.”
모양새가 눈에 익숙한 터라 카라얀이 루미나를 힐끔 쳐다봤다.
한때 루미나가 뱉어냈던 꽃 중 하나였다.
‘암거래 시장에 판매한 이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2황자의 손에도 들어갔을 줄이야.’
심지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까지 하다니.
루미나는 카라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만 쏴 보냈다.
“신기하지 않은가? 마물의 근원인 마석과 같은 성질인데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니. 그래서인지 어떤 보존 처리를 하지 않아도 생기를 유지하고 있지.”
“그러네요. 신기하네요.”
사실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자꾸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라 빨리 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화에서도 주인공은 이와 같은 꽃을 토해냈지. 그런데 어찌 그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까.”
“하하.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엘리엇이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듯이 흰 꽃을 소중히 여기며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루미나의 반응을 면밀히 살핀 이후였다.
***
마땅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그들은 서고를 나와야 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엘리엇이 부드러운 어조로 엔디미온에게 말을 걸었다.
“랑슈스 군이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
“열다섯입니다.”
“열다섯에 이만한 성취라니. 미래가 기대되는군.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엔디미온은 형식상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엘리엇의 행동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엘리엇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뭐라 귓속말했다.
“줄 것이 있으니 잠깐 기다려주게.”
잠시 후, 시종이 곱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왔다.
그것을 엔디미온에게 건네자 소년은 얼떨결에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내 성의이니 챙겨 가도록.”
“실례되는 질문이 아니라면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바다 건너 동방에서 들어온 진상품인데 팥을 우려 만든 차라고 하더군. 내 입맛에는 맞았는데 랑슈스 군도 그랬으면 좋겠군.”
엘리엇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나중에 더 마시고 싶어지면 나를 찾아와도 되네. 자네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혈색이 도는 엘리엇의 얼굴을 보며 루미나는 자신이 자의식 과잉처럼 굴었다고 확신했다.
엘리엇 황자는 자신에게 사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닌 엔디미온이었어……!’
아카데미에서 이런 식으로 호의를 얻은 적이 많았던 엔디미온은 익숙함을 느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생색내는 것 같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귀한 차라서 따로 구하기도 힘들 거야.”
“그렇군요.”
엔디미온의 시큰둥한 태도에도 엘리엇은 마냥 좋은 듯했다.
위기감을 느낀 루미나가 능청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고를 안내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황자님!”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군. 조심해서 들어가도록 하게.”
엔디미온을 챙긴 루미나가 카라얀과 함께 황급히 떠나자 엘리엇이 말했다.
“에메랄드궁으로 가지.”
타계한 황후의 궁으로 간 엘리엇은 시종과 기사들을 물리고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했을 때 장갑을 벗었다.
“이 상처는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리겠어.”
그 잠깐 열쇠를 쥐었다고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고대 마법이 걸린 열쇠인 탓에 그의 능력으로도 상처를 당장 치료할 수 없었다.
상황을 대비해서 흑마법을 건 장갑을 썼는데도 끓는 물에 손을 담근 듯이 뜨거웠으니 아마 장갑이 없었다면 타 죽었으리라.
“한동안 손을 쓰지 못해도 괜찮을 만큼 좋은 만남이었지. 어떻게 단 한 명도 그냥 버릴 것이 없는지.”
조수로 삼을 만한 인재.
희귀한 연구 자료.
그리고 한 번 놓친 연구 자료까지.
“전부 가져야겠어.”
엘리엇의 보랏빛 눈동자가 음울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