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은 현존하는 레기온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제 아비 정도는 훌쩍 뛰어넘는 힘이었다.
때문에 수시로 폭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그가 폭주했다는 보고를 받아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는 루미나가 돌연 공작의 눈에 들어서 카라얀의 신부가 된 때와 맞물렸다.
멋모르는 인간들이야 카라얀의 상태가 잠잠한 걸 보면서 이젠 괜찮아졌구나, 결혼하고 철들어서 그렇구나 하며 웃어넘길 거다.
하지만 엘리엇은 아니었다.
“레기온의 폭주는 우연이나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지.”
오직 최초의 인간이자 레기온이라고 불릴 만한 그 존재의 등장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나비를 박제하면 영원히 내 것이 되겠지.”
아주 근처에 있었다.
엘리엇은 강한 악력으로 지팡이를 붙잡았다.
흥분으로 손이 떨렸다.
세상에서 유일한 그녀가 실존하는 것도 모자라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니.
“아아. 그녀가 내 생애 마지막 실험 재료가 된다 해도 그 힘을 쓸 수만 있다면 충분할 거야.”
엘리엇이 황홀한 표정을 짓자 그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노인의 얼굴 형상을 했다.
“공작, 조심.”
“들어 봐. 그 힘만 얻으면 모든 일이 가능해!”
엘리엇이 잔뜩 흥분한 채로 떠들었다.
“당장 시간을 되돌리는 발명품을 만들어야겠어. 만약 그녀를 사로잡는 데 실패한다 해도 그것이 있다면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겠지.”
“…….”
“물론 이론상, 제대로 가동하려면 그녀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그 공작을 상대하게 될 텐데 대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자료가 소실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녀의 힘을 마지막으로 나 또한 완전해질 수 있겠지. 그토록 염원하던 레기온에 닿을 수 있는 거야.”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초점이 엇나간 눈빛을 하던 엘리엇이 진정하기 위해 깊게 호흡했다.
그리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스러워.”
그는 에테르가 담긴 흰 꽃을 꺼내서 입을 맞췄다.
“일단 손을 치료하는 동안 오랜만에 그림이나 그려볼까.”
화상을 입은 건 한쪽 손뿐이니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엘리엇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동화책을 집필할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
교외에 위치한 어느 별장.
늦은 오후임에도 두터운 커튼이 빈틈없이 드리운 탓에 실내가 밤처럼 어두웠다.
금발의 여인이 커튼을 젖히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탓에 침대에서 곯아떨어졌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머리칼과 같은 밝은 청록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깼어요?”
쪽.
여인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남자는 팔을 뻗어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끌어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가 단호한 손길로 밀어냈다.
“얼른 일어나요. 곧 남편이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쫓아내.”
방금 일어난 탓에 남자가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이 제국의 황제가 될 몸인데 모양새 빠지게 도망칠 수 없잖아.”
그가 눈을 뜨자 렘브라나 황실의 상징인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조금 전 몸을 뒤척인 탓에 반라의 육신이 드러난 그를 훑어보며 여인이 웃음기 서린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실까 봐 일찍 깨웠죠.”
렘브라나 황실의 첫째 아들 마르셀.
강력한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는 그의 여자 취향은 유부녀였다.
좋은 식으로 포장해서 기혼인 여성에게 설렘을 느낀다는 거지, 실상은 그냥 불륜을 즐기는 쓰레기였다.
그렇지만 마르셀은 스스로에게 떳떳했다.
절대자가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리라는 걸 부정한 적 없고, 실제로 곧 황태자가 되어 멀지 않은 미래에 황위 계승을 무사히 마칠 예정이었다.
사소한 스캔들로는 그를 끌어내리지 못했다.
마르셀은 역대 황제들에게 은밀한 취미 생활이 하나쯤 있었으니 자신 또한 그런 것이라며 죄책감 없이 즐겼다.
“일단 옷부터 입으세요.”
“한 시간 뒤에…….”
“한 시간 뒤에는 전하께서 이곳을 떠나야 해요.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요.”
마르셀의 이번 불륜 상대인 빅토리아 로웨인이 냉정한 어조로 옷가지를 던졌다.
그녀는 이혼을 바라고 마르셀과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가벼운 유희.
딱 그 정도의 관계 유지였다.
“하아. 부인께서는 참 매정하군.”
마르셀이 투정을 부리듯 말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옷가지를 걸쳤다.
그녀의 남편 앞에서 제 몸을 자랑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유부녀와의 연애를 즐기는 데 당당한 건 마르셀 개인의 의견이었다.
말로는 언제 들켜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처럼 굴지만 그는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마르셀이 만나는 여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귀부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소문이 나게 됐다.
다행인 점은 연애할 때만큼은 마르셀이 상대에게 심장이라도 내어줄 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만의 연애 철칙이었다.
첫째, 한눈팔지 말 것.
둘째, 연애 중일 때만큼은 상대를 열렬히 사랑할 것.
셋째, 이별은 합의하에 결정할 것.
만약 불륜만 아니었다면 세기의 로맨티시스트 취급받았을 거다.
이렇듯, 가벼운 만남치고 마르셀이 워낙 잘 대해주는 터라 진실을 아는 귀부인들끼리 따로 사교 모임을 만들었다.
언뜻 명망 있는 귀부인들로 구성된 듯한 이 모임을 ‘튜베로즈’라 불렀다.
모임의 멤버들은 비밀 유지에 힘썼다.
특히 남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또한 그들이 행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남편에게 바람을 넣어서 마르셀이 바라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임의 멤버들 모두가 헤어진 이후에도 마르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보니 선뜻 그를 도와줬다.
이렇듯, 마르셀에게 은밀한 연애는 잃을 게 없는 친목 활동이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할 거예요.”
대충 옷을 입은 마르셀이 침실을 나가려고 하자 빅토리아가 말했다.
“왜? 남편 때문에?”
“네. 그러니 황궁에서 얌전히 계셔야 해요.”
“황궁에 있어 봤자 따분한 얘기뿐인 것을.”
“막내 황녀님이 계시잖아요. 오랜만에 귀여운 여동생과 놀아주는 건 어때요?”
“…….”
“황녀님께서는 레기온이잖아요. 전하께서 그토록 좋아하는 취미인 사냥을 같이 할 수도 있겠죠.”
“계집애랑 사냥은 무슨 사냥이야.”
“어머. 황자님께서 그런 고리타분한 발언을 할 줄 몰랐는데.”
빅토리아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제 남편도 그런 식으로 꽉 막힌 얘기는 하지 않아요.”
“속으로는 나처럼 생각할걸.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이유는 나와 같은 권력이 없기 때문이야.”
마르셀의 오만한 발언을 듣고 빅토리아는 작게 웃어 넘겼다.
젊고, 건강하며 혈기가 넘치는 황자는 오만함마저도 매력으로 승화시켰다.
게다가 깊은 애정이 아니다 보니 귀엽게 봐 줄 수 있었다.
반면 마르셀은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짜증이 났다.
자신과 아라벨이 사냥 내기를 하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대 레기온이라니.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였다.
그 사실이 퍽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게 됐다.
“그렇다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황녀님과 나들이라도 가는 건 어때요?”
“왜 자꾸 아라벨 얘기지?”
“황녀님이 아름답게 자랐다는 얘기는 어느 모임을 가든 꼭 나오는 주제랍니다.”
“하는 짓은 아직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지만, 외모에 대한 평가만큼은 동의하지.”
마르셀이 일부러 정 없이 대꾸했다.
마르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빅토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황녀님의 성격상, 교외로 나가 마물을 잡으러 다닐 리 없으니 곧 결혼하겠죠.”
“…….”
“아마 폐하께서는 이번 성년식을 통해 황녀님의 남편감을 가장 먼저 찾으실 텐데, 그분이 황궁을 떠나기 전에 잘해 주세요.”
“같은 레기온인 하트 공자마저 아라벨을 기피했는데, 과연 그 성격을 받아줄 남자가 있을지.”
마르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아라벨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제게 가시를 세우는 동생을 마냥 예뻐할 수 없었다.
‘내가 엘리엇을 죽이려 들었다고 생각하니 도통 대화가 통할 리 없지.’
자신을 살인마 취급하는 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억울한 마르셀은 저를 향한 아라벨의 적의가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인간이 아닌 괴물에 가까운 레기온이라는 자각이 있어서 다행이지.
제 주제를 알고 황위 다툼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마르셀의 표정에서 불편함을 읽은 빅토리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분께서는 레기온이잖아요.”
만약 아라벨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타국의 왕족과 결혼시켜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했을 거다.
하지만 아라벨은 레기온이었다.
레기온은 곧 국력이었고.
레기온을 타국으로 빼돌릴 수 없는 법.
혹여나 딸이 타국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할까 봐 황제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자국민과 결혼시키려 들 것이었다.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었다.
아라벨을 묶어 둘 수만 있다면.
“몸이 멀어져 마음까지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친하게 지내세요. 레기온과 친근하게 지내는 편이 전하께도 좋을 테니까요.”
아라벨과의 친교가 황제가 될 마르셀에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
튜베로즈 귀부인들의 의견이었다.
***
금지된 서고에서 나온 루미나와 카라얀 그리고 엔디미온은 각자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만약 씩씩대며 달려오는 한 사람만 없었다면 별 소득 없는 금지된 서고 체험기는 그대로 끝났을 거다.
“루미나 폰 하트……!”
아라벨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제국의 별을 뵙겠습니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지?”
“집입니다. 전하.”
“어째서?”
“갈 시간이니까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주홍빛 저녁노을이 아라벨과 루미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 이 부스러기가 내가 바빠서 조금 늦었다고 홀랑 가버리려고 하네.”
“엘리엇 황자님께서는 황녀님이 저와의 만남을 너무 기대해서 전날 못 주무신 탓에 오수를 길게 즐긴다고 하시던데요.”
“뭐? 그, 그럴 리가 없잖니!”
흥!
어이가 없다는 듯 말까지 더듬은 아라벨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코웃음 쳤다.
“너 같은 부스러기를 만나는 게 뭐가 기대된다고 내가 잠을 못 잤겠어? 어제 일찍 잤어!”
“아, 일찍 주무셨군요.”
“그러니까 널 의식해서 일찍 잔 게 아니야!”
“네, 네. 알고 있어요.”
아라벨이 씩씩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하긴 했다.
마치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하루 종일 잠만 잤으니 말이다.
레기온인 그녀에게 수면제가 들을 리 없는데.
평소대로 식사하고, 티타임 때 오라비인 엘리엇이 나눠준 동방의 팥 차와 간단한 간식을 먹었을 뿐이다.
하루 일과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이 하찮은 부스러기를 만나는 건 눈곱만큼 기대하긴 했지만, 수면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었다.
별다른 점이 없는데 잠을 과도하게 자니 살짝 찜찜하긴 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있는 이 하얀 찹쌀빵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