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공자비.”
“네. 황녀님.”
진정한 아라벨이 다소 차분하게 루미나를 불렀다.
하지만 아라벨이 정상적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카라얀이 경계의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 성년식에는 무조건 참석해. 이건 황녀로서 하는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황녀님.”
“말만 하지 말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에도! 내 생일 때 올 것처럼 대답해 놓고 절대 참석하지 않았잖아.”
“……사정이 있었죠.”
“그래, 이번에도 사정이 있을 예정이겠지. 하지만 또 사정이 생겨서 불참하면 내가 따로 손쓸 거야.”
“…….”
“강제로 하트 공자를 징집시킬 거라고! 십 년 동안 마물만 잡도록! 그동안 넌 혼자가 되겠지!”
“이게 무슨…….”
갑자기 징집 위기에 놓인 카라얀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요즘 몸 상태가 아주 좋다면서? 마물 잡기에 딱 좋다던데.”
건수를 잡은 아라벨이 신이 난 어조로 말했다.
“황녀야말로 마물 열 마리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네.”
“저런. 난 황족이라 마물같이 흉측한 것들을 잡는 일을 하지 않고 루미나의 곁에 있을 수 있지.”
호호!
아라벨이 얄밉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라얀은 까득 이를 갈아야 했다.
하루라도 루미나를 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은데 마물을 잡으러 나가라고?
차라리 오늘부터 레기온을 안 하고 말지.
아니면 당장 나가서 마물이란 마물은 모조리 쓸어버릴 저의도 있었다.
‘아니. 루미나를 보지 못하는데 세상이 무슨 소용이지? 그냥 다 없어져도 괜찮을지도?’
겸사겸사 루미나를 노리고 있거나 노릴 예정인 날파리들도 없애고 딱 좋았다.
그만큼 카라얀에게 루미나와 떨어져서 지내는 건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연회에 꼭 오는 거야.”
시각이 늦은 탓에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해 아라벨이 다음을 기약했다.
“……알겠습니다. 황녀님.”
아라벨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사라지고,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엔디미온이 한마디 했다.
“누님께서는 인기가 많으시군요.”
“너도 만만치 않았어.”
“네?”
“그……. 아니야. 모르면 됐어.”
엔디미온은 자신이 엘리엇의 관심을 독차지한 걸 모르는 듯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교수님들께 불려 다니는 게 엔디미온의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찾지 못했지만, 언젠가 정보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알게 되는 게 있다면 바로 알려줄게.”
“감사합니다. 누님.”
엔디미온의 반듯한 인사를 받은 루미나는 그와 헤어졌다.
카라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타니 둘뿐이라 조용했다.
루미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마차가 살짝 덜컹거리며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굳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라얀을 보지 않고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부터 그가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이다.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니 잠자코 있는데 카라얀이 드디어 결심을 한 듯했다.
몸을 쓱 일으키더니 당당히 루미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루미나는 자리가 넓게 있는데 굳이 제 옆자리를 차지한 카라얀을 ‘뭐지?’ 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심지어 서로 맞닿을 만큼 바싹 붙어 앉았다.
무언의 시선을 읽었을 텐데 카라얀이 괜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그런 그의 손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건가?’
마물을 잡으러 나가는 게 싫으니 아라벨의 성년식 때 꼭 참석하자는 얘기 같은 걸 하려나 싶었다.
아라벨을 싫어하는 카라얀이었으니 충분히 껄끄러운 주제일 수 있었다.
그 얘기를 꼭 자신의 옆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엿한 어른이 된 카라얀은 키나 덩치가 웬만한 성인 남성의 평균보다 컸다.
근육이 무식하게 자리를 잡았다기보다는 균형 있게 큰 덕분에 언뜻 봤을 때 실제보다는 가늘고 길며 맵시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체격을 무시할 수 없는 법.
루미나는 한순간에 넓은 마차가 비좁게 느껴졌다.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쓸 심산으로 엉덩이를 꿈실거렸다.
그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옮기려던 찰나.
꼼지락거리던 카라얀의 손이 과감하게 루미나의 허리를 낚아채더니 훅 끌어당겼다.
아차 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제 옆에 바싹 붙은 루미나의 머리를 제 어깨 위로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웬 거대한 쿠션 같은 게 생겼으니 자세 자체가 편해졌지만, 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독점 중이야.”
자신이 단 한 번도 루미나를 제대로 독점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 카라얀은 줄곧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있고 싶었다.
막상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놓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 마차가 목적지 없이 영원히 달렸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네?”
당황한 루미나의 되물음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루미나는 그와 맞닿은 부분에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카라얀이 손을 떨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됐기에 루미나는 입을 다물고 슬쩍 반대편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투명한 창문을 통과한 짙은 붉은빛의 노을이 카라얀의 얼굴 위로 쏟아져 있었다.
빨개진 카라얀의 얼굴은 노을의 색인지, 아니면 그의 색깔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반대편 창문을 통해 오롯이 반사돼 볼 수 있었다.
루미나는 홀로 숨을 삼켜야 했다.
기다란 밀빛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색 또한 그와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
“……그렇게 돼서 황녀님의 성년식 기념 연회에 참석하려고요.”
다음 날 아침.
루키우스를 찾은 루미나가 앞으로의 일정을 성실하게 보고했다.
옆에는 뚱한 표정의 카라얀도 함께였다.
루미나는 그간 하트 공자비로서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긍정적인 여론은 이미 깔아뒀으니 굳이 사교 활동에 적극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퀸 상단을 이끄는 것이 먼저라 불필요한 곳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피했다.
‘또 황녀님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마음을 바꾼 것이다.
루미나는 어쩌면 자신이 ‘하트’라는 성을 달고 참석할 마지막 연회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나 때문이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카라얀이 말했다.
아라벨이 징집을 운운한 탓에 루미나가 저를 위해 희생하려 든다고 생각한 듯했다.
“카라얀 님 때문이 아니에요.”
루미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 번쯤은 참석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키우스가 상황이 정리되자 끼어들었다.
“마음대로 해라.”
역시 방임주의자다운 대답이었다.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깊이 관여하려 들지 않는 태도는 루미나를 편하게 했다.
굳이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일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으니 옷장에 있는 옷을 입을까요?”
“루미나.”
“네! 아버님!”
루키우스는 말갛게 웃는 루미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느리로 들인 지 벌써 오 년이 다 돼 가는데 아이는 여전히 가문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가끔 보면 똘똘하다 못해 영악한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어떨 때 보면 너무 순진했다.
“날짜에 맞춰서 드레스를 제작하라고 말해 놓으마. 납기 기한이 당장 내일이라 해도 의뢰를 거부하지 않을 거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닌데……!’
루미나가 바보라서 새로 옷을 맞추겠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계약도 끝나가는데 거창한 걸 받아내는 게 양심에 찔리잖아.’
과욕도 그런 과욕이 없었다.
그간 날름날름 잘도 받아놓고 이제 와서 양심을 운운하는 모습이 누군가는 웃길지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양심이란 희미하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카라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카라얀, 너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질문이 날아오자 카라얀이 움찔했다.
“참석할 건가?”
“당연히 참석할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 연회복도 제작하라고 얘기해 두마.”
어색한 부자의 대화가 끝나고, 루미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카라얀한테 말했다.
“카라얀 님, 카라얀 님. 그러면 저희 둘이 옷을 맞춰서 제작하면 어떨까요?”
이러면 죄악감을 덜 수 있었다.
“다, 당연히 그래야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은 카라얀은 짐짓 어른스럽게 대응하도록 노력했다.
노력만 말이다.
“우리는 부부인데 당연히 맞춰서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당혹과 옅은 흥분 그리고 삐딱함이 뒤섞인 말투였다.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으면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요!”
그 순간 카라얀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모든 상상에 대한 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미쳤다.’
아라벨이 성인이 된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장소와 사건은 그저 계기일 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세상에 하나뿐인 옷을 루미나와 맞춰 입는다고?
‘미쳤다, 미쳤어.’
머리에 열이 오른 카라얀은 연회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자신의 성년식이 이용당했다는 걸 아라벨이 알았다면 당장 성년식 연회를 취소했을 거다.
아라벨에게 남의 머릿속을 읽는 능력이 없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그날 머리는 어떻게 할지.
옷은 또 어떤 식으로 맞출지.
머릿속에서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입혀 봤는데 충격적이게도 전부 어울렸다.
루미나는 뭘 입어도 귀엽고 예뻐서 문제였다.
‘문제는 나지.’
카라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