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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10)화 (110/152)

오늘부터 루미나가 제일 좋아하는 이 얼굴부터 관리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먼저 가 볼게.”

“네? 벌써요?”

아버님이 부티크에 주문만 넣으면 끝인데. 대체 뭘 벌써부터 준비하겠다는 거지?

카라얀에게 루미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삐걱대면서 집무실을 나갔다.

적장의 목을 베어올 듯한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루미나와 루키우스만이 집무실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

루미나는 루키우스의 시선이 문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되면 아버님도 참석하세요.”

“카라얀이 싫어할 거다.”

“카라얀 님은 항상 말로는 싫다고 해요. 하지만 제가 봤을 땐 마냥 싫어하지만은 않을걸요.”

“…….”

“셋이서 오페라도 잘 봤잖아요.”

루키우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를 오래 지켜봐 온 루미나는 그 침묵 속에 다양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님.”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집무실에서 나가도 됐다.

하지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침묵 속에서 오도카니 남아 있던 루미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저희의 계약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이길 잘한 듯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

역시 괜한 얘기였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루키우스의 표정 변화를 읽은 루미나가 밝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외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애초에 기간을 정해둔 것도 저였는데 딴마음을 먹을 리 없잖아요.”

“…….”

“이것 말고 다른 걸 묻고 싶었어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버님에 대한 한 가지 소문을 들었었거든요.”

“사실이다.”

“네?”

아직 무슨 소문인지 얘기하지 않았는데요.

이젠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나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니 네가 들은 게 맞을 거다.”

“제가 봤을 땐 아니던걸요. 거짓되거나 부풀려진 얘기도 많잖아요.”

“보통은 이유 없이 소문이 돌지 않지.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맞는 소문을 듣게 된 거지?”

“아버님께서 흑마법을 연구한다는 얘기요. 엘리엇 황자님께서 제게 말하셨어요.”

루미나는 그가 흑마법에 손을 댄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문의 참과 거짓을 가르기 위해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나도 아버님 때문에 흑마법과 연루됐으니까 꼬리를 밟히지 말라는 의미지.’

한마디로 경고였다.

“선대가 흑마법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서 그런 얘기가 돌았을 거다.”

루키우스가 별거 아니라는 어조로 대꾸했다.

“내겐 소문이 여럿 따라붙기 때문에 그런 말 한두 마디 오간다 해서 뒤가 밟힐 일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괜한 노파심이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2황자가 그런 얘기를 꺼냈다니. 의외군.”

금지된 서고의 출입도 2황자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서 허가가 떨어졌다고 하더니.

그간 존재감이 전혀 없던 2황자의 행보가 미묘하게 거슬렸다.

루키우스가 머릿속으로 2황자, 엘리엇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있는데 루미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선대께서는 어쩌다가 흑마법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이 눈을 어떻게 해 보려는 속셈이었지.”

그러니까 선대는 흑마법으로 루키우스의 눈을 평범한 인간처럼 유지하는 법을 연구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언약식을 했을 때 선대가 흑마법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었지.’

그놈의 눈 모양이 뭐라고.

루미나는 조금 불퉁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선대 욕을 했다.

“부쩍 흑마법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군.”

“네? 제가요? 잘못 보셨어요.”

루미나가 욕설 같은 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무구한 얼굴을 했다.

방긋방긋 웃는 루미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루키우스가 불쑥 말했다.

“네가 언약식을 한 별관.”

“네?”

“원래는 네가 지내는 삼 층에 선대의 애장품을 보관했는데 모조리 별관으로 옮겼지. 그곳에서 주로 흑마법과 관련된 연구를 한다.”

‘알아서는 안 될 걸 알아버린 이 기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가까운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 그곳을 살펴보다가 목걸이를 당장 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어차피 계약이 끝나면 빼 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냐고 루미나가 대꾸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더 빨랐다.

“아니면 네가 찾는 자료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저는 찾는 게 없는걸요.”

“없다면 방금 들은 말을 잊으면 된다. 별관은 너만 한 아이가 오가도 티가 나지 않긴 하지만.”

대놓고 말하지 않더라도 ‘네가 내 자료를 훔쳐봐도 혼내지 않겠다’라는 의미였다.

엔디미온이 노골적으로 흑마법에 관심을 가진 탓에 흑마법과 관련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걸 루키우스가 모를 리 없었다.

루미나는 변명하기보다 그냥 웃고 말았다.

절대 별관으로 갈 일이 없다는 듯이.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루미나가 몸을 돌려서 집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불렀다.

“루미나.”

“네?”

“만에 하나 이곳에 남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면 내게 바로 말해라.”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가 어떻게 할 것도 없지.”

내 수하들이 처리해 줄 테니까.

말을 과도하게 잘라먹은 탓에 꼭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왜요?”

“계약과 상관없이 내 며느리가 되는 거니까.”

루키우스가 덤덤히 말했다.

그는 지금 루미나에게 현재와 같은 일상이 변치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그의 말투 탓에 루미나가 오히려 동요하고 말았다.

‘내가 며느리로 계속 남으려면 일단 남편인 카라얀 님의 의사부터 물어봐야 할 텐데. 또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잖아.’

하긴 처음부터 그는 이런 식이었다.

“네. 오늘은 농담으로 말했지만, 정말로 마음이 바뀌면 말씀드릴게요.”

싱긋 웃은 루미나가 집무실을 나갔다.

***

며칠 뒤, 루미나는 카라얀과 함께 번화가로 나갔다.

온갖 유명 부티크가 모여 있어서 제도 멋쟁이라면 꼭 한 번쯤 들르게 된다는 거리였다.

갑작스러운 하트 공자와 공자비의 등장으로 거리에 있는 모든 부티크의 직원들이 긴장했다.

그들이 한번 왔다 가면 웬만한 귀족들과는 다른 씀씀이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언제 제 부티크를 방문할까 싶어 고개를 내미는 이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듬뿍 받은 루미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드로잉 북을 훑어봤다.

의뢰를 받자마자 급하게 디자인을 짜냈다는데, 양이 제법 됐다.

“제 눈에는 이것도 괜찮은 거 같은데 카라얀 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루미나의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옮긴 카라얀이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남녀 복장을 보다가 이내 루미나를 쳐다봤다.

“……예뻐.”

“네. 의견 감사해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한 대화가 다섯 번쯤 반복됐으니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했다.

루미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옷과 맞춰서 착용할 보석 장신구도 둘러봤다.

그중 당연하게도 목걸이가 끼어 있었다.

“목걸이는 빼고 보여줘.”

“목걸이를 아예 착용하지 않으실 건가요?”

“아니. 지금 하고 있는 목걸이가 소중해서 다른 걸 착용하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거든.”

“그렇다면 지금 착용한 목걸이는 드러내실 예정인가요?”

“아니. 옷 안으로 감출 거야.”

“목걸이를 아예 배제한 채로 전체적인 디자인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루미나의 말을 들은 카라얀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귀를 만지작거렸다.

소중한 목걸이라니.

루미나가 착용한 목걸이는 혼인의 의미로 그가 낀 피어싱과 맞춘 것이었다.

카라얀은 얼마나 열심히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는지 그 부분이 새빨개져 있었다.

빨간 귀의 카라얀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그의 방식은 굉장히 단순 무식했다.

“너랑 어울린다.”

“…….”

“이것도 괜찮네. 널 위해 만든 것 같아.”

“…….”

“어떻게 이걸 구매하지 않을 수 있어? 네가 입는 것으로 이 옷은 제 가치를 다하는 건데. 구매해.”

“카라얀 님.”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카라얀을 불렀다.

“저희 지금 연회 날에 입을 옷을 딱 한 벌 구하러 나왔다는 거 잊지 않으셨죠?”

“아…….”

그제야 카라얀은 정신이 든 듯했다.

쑥스러운 듯 엉망으로 머리를 헤집더니 중얼거렸다.

“남은 건 다음에 또 입으면 되지. 그날만 날은 아니잖아.”

애초에 이 중에서 루미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고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전부 어울리니까.

대충 거적만 걸쳐도 예쁜데 전문가들이 공들여 만든 옷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입을 것만 생각하지 말고 본인도 입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텐데!’

말해 봤자 듣는 시늉만 하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을 듯했다.

두 사람은 더는 구매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부티크로 향했다.

당장 손에 쥔 건 없어도 저택 한 채 값을 지불한 것 같은데 아직도 살 게 남아 있다니.

‘이건 내가 사는 게 아니다. 카라얀 님의 옷도 같이 사는 거다.’

과소비로 인한 죄악감을 이기지 못한 루미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음. 좋아. 둘이 함께라면 절반이니까. 양심의 가책도 절반.’

끄덕끄덕.

납득을 마친 루미나는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이면 눈부실 정도로 쏟아져야 하는 햇살이 들어오지 않아 우중충했기 때문이다.

“날이 살짝 흐리네.”

분명 밖에 나올 때는 멀쩡했는데 늦은 오후가 되자 하늘이 회색빛이 됐다.

부티크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매장에 우산이 구비돼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미나가 걱정하는 건 우산의 유무가 아니었다.

비가 내린다는 상황 그 자체였지.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외출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은 그저 날이 흐리기만 해서 그런 걸까.

카라얀은 딱히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호위로 따라온 유리와 애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즘 상태를 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보통 비 오는 날에는 둘이 방에 콕 박혀 있어서 잘 모르겠네.’

루미나가 홀로 불안해하던 중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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