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 님! 여기서 뵙네요!”
“에블린, 레아. 반가워요.”
에블린 마이어와 레아 슈미트.
한때 아라벨의 좌측과 우측에 위치해 좌우 영애라고도 불렸던 이들이 루미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트 공자님께서도 계셨네요.”
뒤늦게 카라얀의 존재를 인지한 그들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카라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더니 살짝 자리를 비켜줬다.
루미나와 퍽 친해 보이는 데다 동성이니 편하게 대화하라고 배려해 준 듯했다.
카라얀을 마주 봤을 때부터 숨을 쉬지 못했던 에블린과 레아가 급하게 날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루미나한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저희는 잠깐 구경하러 나왔는데 루미나 님은 어쩐 일이세요?”
“황녀님의 성년식 기념 연회 날 입을 옷을 맞추러 왔어요.”
“아…….”
“결국…….”
그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예전에는 아라벨의 전속 시녀 자리를 노리면서 가깝게 지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라벨이 그들을 멀리했다.
게다가 전속 시녀 자리는 루미나 외에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으니 굳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아라벨과 같이 지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얻어먹을 티라미수 가루마저 없으니 에블린과 레아는 아라벨과 점차 멀어졌다.
그렇지만 루미나와는 마주칠 때마다 친근하게 인사할 만큼 친분이 있었다.
‘친구라기보다는 약간 그런 거지. 이번에는 너구나, 힘내라. 이런 거.’
매번 아라벨한테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과 동질감을 느낀 두 사람이 제게 잘해주는 거라고 추측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 정도 가벼운 친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라벨이라는 주제를 피하고 싶었던 루미나가 에블린이 들고 있는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뭔가요?”
“아! 이게 말이죠!”
에블린이 아닌 레아가 흥분해서 나서려다가 에블린에게 어서 말하라고 눈짓으로 재촉했다.
“제비꽃 설탕절임이에요. 바르텐 영식한테 받았어요.”
“제비꽃 설탕절임이요?”
“요즘 유행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비꽃 설탕절임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거요.”
“맞아요! 셀린 양이 선물 받은 꽃이 시드는 게 아쉽다고 하니까 한 남성 팬이 공연마다 애정 어린 편지와 함께 이걸 선물했잖아요.”
“그 한결같은 애정에 감격한 셀린 양은 결국 그 남자를 받아줬고요. 어찌나 로맨틱한지.”
에블린과 레아가 꿈꾸는 소녀 같은 눈빛을 했다.
“이 얘기가 퍼지고 나서 사교 시즌마다 제비꽃 설탕절임을 구하기 힘들잖아요.”
“그러고 보니 지금 사교 시즌이었죠?”
루미나의 물음에 레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르텐 영식도 예약을 하고 꼬박 한 달을 기다렸대요. 사실 에블린이 제비꽃 설탕절임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오늘 제가 만나자고 조른 거예요.”
남의 입에서 자신을 향한 연인의 애정을 확인한 에블린이 뺨을 붉혔다.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따듯해지는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 루미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제비꽃 설탕절임을 쳐다봤다.
“루미나 님도 드셔보실래요? 다디단 꽃이 아삭아삭 씹혀서 맛있어요.”
“아뇨. 괜찮아요.”
루미나의 거절에 에블린이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하긴 루미나 님이라면 아마 많이 드셔보셨겠죠. 제가 주제넘었네요.”
“네? 아녜요! 맛본 적 없어요.”
순간 에블린과 레아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미나가 하트가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지내는지 얘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였기 때문이다.
“단지 제가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고 보니 그러셨죠. 잠깐 깜빡했어요.”
루미나의 괴이한 입맛을 떠올린 에블린과 레아가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하지만 꼭 먹지 않아도 에블린의 얼굴을 보면 무슨 맛일지 충분히 짐작이 가네요.”
에블린이 수줍게 웃었다.
그 후 그들은 요즘 제도의 유행 같은 얘기를 조잘조잘 떠들었다.
“앗! 옷 구경하시는데 저희가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은 거 같네요.”
“그러면 연회 날 기대하고 있을게요.”
“네. 다들 그때 봬요!”
그들과 헤어진 루미나는 카라얀이 있을 만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 카라얀 님은?”
“공자님께서는 급한 일이 생기셨는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유리가 바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애쉬 또한 자세한 이유는 모르는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화장실이 급했나? 말없이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니까 무슨 이유가 있겠지.’
레기온도 사람이었다.
남한테 말 못 할 사정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루미나가 나머지 옷을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 후.
투둑, 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땅이 젖어들고 있는데도 카라얀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유리 경.”
빗소리를 들은 루미나가 다급히 유리를 돌아봤다.
루미나의 부름에 유리는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카라얀이 어떤 사적인 이유로 밖으로 나갔든, 위험했다.
“저는 작은 마님을 호위해야 하니 일단 애쉬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애쉬가 부티크를 나섰다.
유리는 직원들에게 다가가 간단하게 말을 전하고는 루미나에게 다시 왔다.
“저택에 연락을 넣어 충원을 요청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마님.”
“…….”
“이런 상황 자체가 오랜만이지만, 괜찮을 겁니다.”
유리의 다정한 위로에도 루미나의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정말로 큰일이 생길 예정이면 목걸이가 나를 부를 거야.’
루미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옷 안으로 숨겨뒀던 붉은 목걸이를 꺼냈다.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진정이 될 것 같아서.
제발.
별일 없어야 하는데.
“유리 경. 밖으로 나가자.”
“하지만 비가 많이 쏟아집니다. 일단 실내에 있는 편이…….”
“아니. 나가야 해.”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목걸이가 반응할 때 빛이 쏟아졌다.
그 광경을 남들에게 보일 바에 밖에 있는 편이 나았다.
강경히 명령을 내리자 유리가 경황이 없는 루미나 대신 뒷정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루미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부티크를 나가려고 하니 친절한 직원이 우산을 챙겨줬다.
대충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문을 열고 나가자 빗소리가 귀를 때릴 듯이 울렸다.
쏴아아-.
캐노피 아래에 선 루미나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봤다.
그간 카라얀이 폭주했던 이유는 레기온으로서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잔혹한 기억.’
어머니인 아이리스의 죽음은 카라얀이 폭주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나와 있을 때는 폭주하지 않더라도 심적으로 불안해 보였어.’
쏴아아-.
루미나가 또다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누가 시비를 걸어도 반항하기는커녕 그냥 맞고 있었지.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한테 맞고 있을지 몰라.’
루미나는 목걸이가 빛나지 않길 바랐다. 카라얀이 폭주 직전이라는 증거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목걸이의 힘으로 행방불명된 카라얀의 앞에 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카라얀이 걱정됐고, 당장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 보고 싶은 거다.
그가.
“안 되겠어.”
루미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바보, 멍청이.’
속으로 카라얀을 잔뜩 험담한 루미나가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마님!”
마침 문을 열고 나오던 유리의 외침이 뒤에서 들렸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카라얀에 대한 걱정으로 발걸음이 멈춰 서지 않았다.
“카라얀 님!”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간 루미나가 그의 이름을 커다랗게 불렀다.
“어디 계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꾸만 누군가와 부딪치며 그의 이름을 외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 같은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카라얀 님!”
제발, 제발, 제발!
몇 번이나 빌었을까.
누군가 루미나의 어깨를 잡아서 돌려 세웠다.
흠칫 몸을 떤 루미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루미나?”
카라얀이었다.
우산조차 챙기지 않고 나갔던 그는 홀딱 젖은 채로 서 있었다.
“어디 가고 있었던 거야? 왜 나와 있어?”
“그야!”
걱정과 염려, 그리고 당혹스러움, 그리움, 안도감. 온갖 감정이 풍선처럼 ‘팡’ 하고 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성을 높였던 루미나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잘못 하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루미나?”
“……비가 오잖아요.”
한숨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라얀은 루미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카라얀이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그의 뺨을 차갑게 적셨다.
“비가 내리잖아.”
그제야 비가 내리는 걸 인지한 듯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가 내렸는데 이제 알다니.
한참을 걱정했던 루미나를 허무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아, 맞아. 이걸 주려고 했어.”
카라얀은 소중히 품고 있던 물건을 루미나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루미나의 눈이 커졌다.
어여쁘게 리본이 묶인 상자였다. 열어보기도 전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제비꽃 설탕절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