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유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라얀과 루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카라얀을 찾으러 무작정 달리는 루미나의 뒤를 쫓았다.
인파 속에 섞여서 잠깐 심장이 철렁하기도 했지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루미나의 곁에 행방불명된 카라얀이 있는 걸 보며 안도하기는커녕 불안감이 고조됐지만.
‘괜찮으니까 다가오지 마.’
기척을 기민하게 감지한 카라얀이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굳이 접근할 필요 없다고 눈짓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카라얀의 상태가 제법 멀쩡했다.
굳이 기사들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걸 확인한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모습을 감췄다.
루미나가 제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선에서 호위를 하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누구 있어요? 어디를 그렇게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카라얀이 고개를 저었다.
유리를 부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저택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빠지지 않고 나올 터.
카라얀은 루미나와 자연스럽게 붙어 있을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루미나와 함께 있으면 쏟아지는 비마저 찬란한 빛처럼 보였고, 축축한 빗길마저 그 어떤 꽃길보다 화사하게 느껴졌다.
크흠.
찰싹 붙어 있고 싶어서 일부러 유리를 보냈다는 사실을 루미나가 알게 되면 변태냐면서 질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양심이 찔린 카라얀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고 유리를 도로 부르진 않았다.
대신 무작정 걸었다.
도저히 이 순간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일단 카라얀이 걸으니 루미나 또한 그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카라얀은 발 닿는 곳이 길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루미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별생각 없이 카라얀을 따라가게 됐다.
“그런데 먹지 않을 거야?”
카라얀이 제비꽃 설탕절임이 포장된 상자를 눈짓했다.
“조금 이따가 먹을래요.”
지금 상자를 열면 비에 젖을 수도 있으니까.
뒷말을 삼킨 루미나는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라얀은 문득 망치로 가격당한 돌이 일격에 깨진 것처럼 큰 소리를 냈다.
“아!”
“네?!”
덩달아 놀란 루미나가 언성을 높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카라얀은 난처하다는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현재 그는 한쪽 팔로 루미나와 팔짱을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산을 쥐고 있는 탓에 남는 손이 없었다.
만약 자유롭게 움직일 손이 있었다면 엉망으로 제 머리를 헤집어놨을 거다.
“그러고 보니 단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카라얀은 루미나가 어째서 울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멍청이인가?
같이 지낸 지가 몇 년인데 그걸 깜빡할 수가.
직원한테 설탕이라도 덜 묻혀서 달라고 할 걸 그랬다.
“맛없으면 한 입만 먹어보고 버려. 아니. 싫으면 그냥 먹지 마.”
“싫어요.”
“…….”
“마구 먹을 거예요.”
“그래. 많이많이 먹어.”
방금까지 눈물을 퐁퐁 쏟아낸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중얼거리니 안쓰러운 한편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심지어 루미나의 입가에 문득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게 꼭 무지개 같았다.
카라얀은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퍽-.
엉큼한 상상을 하는 그를 응징하듯 우산대가 거침없이 머리를 강타했다.
‘다음번에는 아예 가게째로 사버려야지. 그러면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선물할 수 있겠지.’
카라얀이 머리에 우산대가 박힌 채로, 루미나가 알았다면 과욕이라며 경악할 만한 생각을 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파 보이는데.”
“잠깐 손에 힘이 풀려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별거 아니야.”
진짜 별거처럼 보이는데…….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한 카라얀이 우산을 좀 더 루미나 쪽으로 들었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유리 경이 걱정할 텐데!”
젠장. 루미나가 깨닫고 말았다.
순간 카라얀의 얼굴에 낭패를 당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루미나는 그걸 보지 못하고 주변 풍경만 빠르게 둘러봤다.
“빨리 돌아가요.”
“……그치. 그래야지.”
다소 울적한 어조로 대꾸한 카라얀이 루미나가 조금이라도 빗물을 맞지 않도록 신경 쓰며 우산을 들었다.
우산은 이미 루미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깨가 홀딱 젖고 말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우산을 쓰기 전에도 젖어 있었으니까.
***
유리, 애쉬와 합류한 그들은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갔다.
급하게 호출을 받았던 기사들이 우르르 저택을 나섰다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우르르 돌아오게 된 소소한 뒷사정도 있었다.
“아휴, 감기 걸리면 어쩌나.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춥지 않으세요?”
“응, 아까부터 딱 좋았어.”
곧장 욕실로 직행한 루미나는 수증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하녀들의 걱정에 푸시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그대로 몇 시간쯤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루미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계시지.”
“아냐. 이 정도면 됐지.”
대충 닦고, 하얀 잠옷으로 갈아입은 루미나는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내가 어두컴컴했다.
안 그래도 비가 내려서 날이 흐린데 커튼까지 빈틈없이 드리워 어둠이었다.
곧바로 적응하지 못한 루미나는 불현듯 선명하게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먼저 씻고 나온 카라얀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이 좋으니 이만큼 어두워도 신경 쓰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루미나는 불편했기 때문에 직접 촛불을 켜고 있자니 카라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응? 불을 켜는 게 싫었나?’
그러면 말이라도 하지.
그보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으려고 욕조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이면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는 했다.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저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카라얀의 상태는 괜찮았다.
다만 시야에서 루미나가 사라지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는 터라 일찍 왔는데.
서둘러 나온 보람이 없었다.
루미나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이제 혼자서도 괜찮은 건가 봐.’
최근 폭주한 일도 없으니 계약의 내용대로 되고 있었다.
루미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카라얀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루키우스는 그런 루미나에게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어 주고.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게 점점 더 실감이 났다.
복잡한 심정으로 일단 침대에 앉았지만, 졸리지 않았다.
책이라도 읽을까 하다가 익숙한 상자가 문득 시야에 들어와 가지고 왔다.
제비꽃 설탕절임.
요즘 퀸 상단에서 잘 팔리는 물품 중 하나였다.
‘공연 때마다 셀린한테 이걸 선물한 것도 남성 팬이 아니라 나인데.’
제품 홍보 겸, 셀린도 좋아해서 꽃 대신 항상 보냈다.
그러다 셀린이 자신에게 자꾸 달라붙는 남자들이 귀찮다고 하소연을 하기에 ‘남성 팬’이라는 로맨틱한 소문을 퍼뜨렸을 뿐이다.
‘덕분에 연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면서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정작 상품을 기획한 루미나가 선물로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껏 그저 돈이 되는 상품으로만 봤는데…….’
연인의 마음이 되어 주는 걸 에블린을 통해서 확인한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단순히 돈을 주고 사는 ‘물품’이 아니라 사랑이고, 또 애정이며 사람의 마음이구나.
그런 감성적인 상념 말이다.
그 탓에 시선을 떼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카라얀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기피하는 빗길까지 한참을 돌아다니며 구해 왔다.
루미나는 퀸 상단의 로고가 박힌 상자를 몇십, 아니 몇백 개나 봐 왔다.
그런데 어쩐지 이것만은 특별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던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카라얀이 들어왔다.
그는 두툼한 타월을 들고 있었다.
루미나에게 다가온 그는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말했다.
“나한테 살짝 등진 채로 있어 봐.”
“네?”
“머리가 덜 말랐잖아.”
카라얀이 타월을 흔들었다.
그제야 어째서 그가 말없이 나갔다 왔는지 이해한 루미나는 타월을 빼앗으려 했다.
“제가 할게요.”
그렇지만 카라얀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팔을 위로 쭉 뻗어서 루미나가 건들 수 없을 만큼 타월을 높이 들었다.
“됐어. 머리를 말리면서 동시에 그것도 먹을 수 있으면 몰라도. 머리는 내가 말려줄 테니까 너는 그 설탕 꽃이나 먹고 있어.”
타월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다 보니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순간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의식한 루미나가 후다닥 꼬리를 내리며 그에게 등을 보였다.
“네, 네. 알겠어요.”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제대로 말릴 수 있을까?’
카라얀의 성격을 고려하면 손으로 머리를 막 헤집어 놓아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다지 섬세한 성격이 아니니까.
하지만 의외로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칼에 남은 물기를 닦아줬다.
사부작, 사부작.
그의 뜨거운 손이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루미나는 서둘러 상자를 열어 제비꽃 설탕절임을 집어서 한 입 먹었다.
우물우물.
“맛있어?”
“으음.”
“버려.”
“맛있어요!”
루미나가 머뭇거리며 애매하게 반응하자 카라얀이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말했다.
루미나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카라얀이 눈치챈 것처럼 루미나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혀 위에 굴리며 오랫동안 음미하고 싶었다.
이 달콤함은 사랑을 닮은 맛일 테니까.
“아, 해 보세요.”
카라얀은 단 걸 좋아하니 잘 먹을 것 같았다.
머리를 말리느라 바쁘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집어서 그의 입에 넣어줬다.
제비꽃 설탕절임이 그의 입 안에 쏙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가 이빨로 루미나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콱 깨물었다.
“……?”
루미나가 당황했다.
그건 카라얀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니까.
“지금 뭐 하는…….”
서둘러 손을 뺀 루미나가 뒤를 돌아보려고 손바닥을 짚었다가 잘못하여 그의 허벅지 쪽을 꾹 누르게 됐다.
“윽.”
그 순간 카라얀이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리둥절하던 루미나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짚은 게 허벅지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지, 짐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