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쩍!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일어난 루미나가 후다닥 카라얀과 멀어졌다.
카라얀은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
그대로 밖으로 도망치려던 루미나가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 힐끔 뒤를 돌아봤다.
촛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실내는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어둠이 드리운 카라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으며 뺨에는 열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루미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
“…….”
멈춰 세우긴 했으나 카라얀 또한 루미나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기껏 해 봐야 네가 만진 건 사실 허벅지일 뿐이었다는 거짓말?
……그 말을 할 바에 그냥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죽고 말지.
카라얀이 뺨을 붉힌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루미나는 덩달아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루미나가 더는 지체할 것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쾅-!
어찌나 힘을 줘서 닫았는지 큰 소리가 났다.
“루미나, 루미나!”
‘쾅’ 소리와 함께 퍼뜩 정신을 차린 카라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급히 문 앞으로 달려갔다.
“나가도 내가 나갈게!”
굳게 닫힌 문에다 대고 외쳤다.
기민하게 기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루미나가 문에 등을 대고 딱 붙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긴 춥잖아! 아니면 겉옷이라도 챙겨. 아니, 그냥 네가 안으로 들어와. 내가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카라얀이 절절하게 애원했다.
문에 대고 간절하게 외치는 모습이라니.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미친 건가?’ 싶었을 거다.
카라얀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계속 빌고, 애원했다.
그러다가 루미나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분명 문 너머에 루미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건 영 불길한 징조였다.
‘화가 잔뜩 났나? 다신 내 얼굴이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니, 내 얼굴을 좋아하니까 막상 얼굴을 보면 풀릴지도? 아니, 그러다가 또 화낼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건가?
너무 추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거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별별 망상이 다 들었다.
초조해진 카라얀은 이 문을 뜯어버릴까 말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열면 될 일인데 무작정 뜯어낼 생각부터 하는 게 그다웠다.
카라얀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도로 놓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문 틈새로 카라얀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미나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루, 루미나?”
루미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라얀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불시에 검문을 당하게 된 사람처럼 카라얀이 뻣뻣하게 선 채로 잔뜩 긴장했다.
“한 번만 믿어드리는 거예요.”
“응. 나 짐승 아니고 완전 인간이야.”
간절한 그의 말을 들은 루미나가 언제 딱딱한 표정을 했냐는 듯 입꼬리를 허물며 안으로 들어왔다.
카라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불편하면 내가 나갈까?”
루미나가 제비꽃 설탕절임을 집어서 제 입에 가져다줬을 때.
방금 씻고 나온 루미나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비누 향이 체향과 섞여서 나는 루미나만의 향기였다.
머릿속으로는 제비꽃 설탕절임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깨물고 말았다.
당장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불안해 카라얀이 묻자 루미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걸 짚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도망쳤을 거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설득하던 카라얀이 조용해진 순간 루미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불현듯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폭주의 징조가 나타났을까 봐.
하지만 카라얀은 멀쩡했다.
괘씸함은커녕 안도감이 크게 들었다.
‘따지자면 거길 짚은 건 내 실수였으니까. 서로 실수한 셈 쳐야지.’
서둘러 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두 사람이 등을 보인 채로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분명 평소와 같은 상황인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자꾸만 그를 의식하게 됐다.
쏴아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루미나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했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잠들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시간만 지나가던 그때였다.
부스럭-.
카라얀이 몸을 살짝 움직였다.
곧바로 루미나가 화들짝 놀랐다.
움찔!
“……안 덮쳐.”
카라얀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졸리지 않아서.”
“알아요.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저질러버렸겠죠.”
“내, 내가 짐승인 줄 알아?! 나쁜 마음 먹는다고 바로 저질러 버리게? 아직 그런 적 없어. 나는……!”
음흉한 마음을 먹은 전적이 셀 수 없이 많았던 카라얀이 억울해져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제 무덤을 파고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나쁜 마음. 먹은 적 있구나…….’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알아버린 루미나가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보인 채로 생각했다.
어색한 기류가 한참이나 그들 사이를 채웠다.
이대로 낮이 올 때까지 평생 잠도 자지 못하고 어색하기만 할 것 같던 그때.
카라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일곱 살 때.”
“…….”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성을 내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어.”
루미나가 슬쩍 뒤를 흘겨봤다.
카라얀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두 분이서 싸우신 거예요?”
“아니. 그냥 일상이었어.”
카라얀은 빛바랜 양피지에 찍힌 그림 같은 과거를 회상했다.
벌써 11년 전의 일이었다.
“바쁜 남자가 왜 가족이랑 놀려고 하는 걸까? 루크는 집무실에서 살아. 나는 우리 카라얀과 외출할 테니까.”
“아이리스……!”
“카라얀. 네 아빠는 레기온이라서 우리가 없어도 마음이 전혀 아프지 않다고 하는구나. 어서 가자.”
“네. 어머니.”
언뜻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아이리스가 안절부절못하는 루키우스를 내버려두고 카라얀의 손을 잡았었다.
이럴 때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편에 서는 것이 옳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일곱 살의 카라얀은 영리하게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고.
“어머니께서는 곧잘 장난을 치고는 했어. 그날도 심술처럼 장난을 친 거였을 거야.”
“화목한 가정이었네요.”
“그랬던 거 같아.”
카라얀이 모호한 어조로 답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나가니 비가 내리고 있었지. 어머니께서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어.”
“어째서요?”
“나한테 비를 알려주고 싶었대.”
쏴아아-.
살짝 눈을 내리깐 카라얀은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카라얀. 느껴지니?”
“차가워요.”
“그래. 그게 빗방울이야.”
“하지만 어머니. 빗방울이 차갑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아는 것과 직접 느끼는 건 달라. 나는 카라얀 네가 많은 감각을 직접 느껴봤으면 해.”
어린 카라얀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아이리스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행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모르지. 그런 거란다.”
아이리스는 종종 텅 빈 눈빛을 했다.
그 얘기를 할 때도 그랬다.
제 기억 속에서 영원히 11년 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카라얀이 말했다.
“레기온인 내가 곧 징집될 테니까 어머니는 최대한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했어. 그날도 그랬지.”
한두 번 폭주한 전적이 있었지만, 어렸기 때문일까.
충분히 수습이 가능한 규모였기 때문에 집안사람들끼리 쉬쉬하면서 넘어갔다.
때문에 카라얀이 여타 레기온들처럼 마물을 잡기 위해 징집될 거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라얀 님의 어머님께서는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어머니의 말로는 자신이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해서 남을 흉내 내는 것뿐이래.”
“…….”
“그러니까 절대 좋은 엄마가 아닐 거라고 못을 박고는 했지.”
정말 나쁜 엄마였으면 하지 못할 말이었다.
“내 부모는 레기온도 아닌데 레기온보다 더 잔혹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정말로…….”
“…….”
“혐오스러웠지.”
“…….”
“하지만 결국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배워먹은 게 그런 것뿐이니 아무리 노력한들 제자리걸음일 거야.”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가 나쁜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은 너도 잘 모를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아이리스가 우산 밖으로 손을 뻗어서 빗물이 떨어지도록 내버려뒀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네 아빠와 지내며 한낮이 따스하다는 걸, 꽃에서는 향기가 난다는 걸, 빗물이 차갑다는 걸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어.”
“…….”
“네 아빠도 나와 같다고 했지.”
그때 카라얀은 아이리스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다정함이 스민 미소였다.
“우리가 만나 조금씩 사람답게 살아가게 됐듯, 너 또한 사랑을 느끼면서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지.”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