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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15)화 (115/152)

아이리스는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루키우스에게 접근한 이유도 그가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카라얀 님이 생각하시기에 공작부인께서는 좋은 어머니였나요?”

“응. 단지 내가 나쁜 아들이었을 뿐이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당시, 그 대화를 끝으로 복면 쓴 사내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입을 막고 눈을 가렸다.

목이 바늘에 찔리는 느낌과 함께 힘이 쭉 빠진 카라얀은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건 필사적으로 자신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납치당한 것이다.

그 후로는…….

“명색이 레기온인데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어. 나는 어머니에게 최악의 자식이었던 거야.”

카라얀의 말투에는 어리고 나약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었다.

루미나는 몸을 돌려서 그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쳐다봤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카라얀의 등은 평소보다 왜소해 보였다.

“그래서 너만은 지키고 싶었어.”

루키우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성인이 되면 곧바로 아버지를 죽이고, 이딴 가문을 산산조각 낼 생각이었지.”

카라얀이 아무렇지 않게 폭탄 발언을 했다. 일순 루미나의 눈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루키우스가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을 테지만, 만약이라도 그가 카라얀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지?’

루미나의 눈빛이 떨렸다.

“그런데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

후우!

루미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얀의 한마디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그자의 손에서 생을 마감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하면 네가 날 미워할 거잖아.”

“……네?”

“그자와 사이가 좋다는 것쯤은 알아. 당장 네게 해코지를 한 적 없으니 그렇겠지.”

그리고 하얗고 동글동글한 감자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카라얀은 레기온인 자신이나 루키우스라고 해도 예외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꼭 너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는 거지. 그저 나는…….”

카라얀은 루미나와 함께였던 지난 나날을 떠올렸다.

그저 루미나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차오르는 순간순간이었다.

심지어 루키우스를 포함한 셋이서 지금 같은 일상을 유지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카라얀의 머릿속에 그 어느 날의 태양빛보다 찬란한 루미나의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너만은 내가 평생 지킬게.”

“…….”

“그,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야. 너를 지킬 생각뿐이니 덮칠 일이 없다는 거.”

언제 진지한 얘기를 했냐는 듯이 카라얀의 귀가 빨개졌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귀를 보게 된 루미나는 황급히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겼다.

그의 감정이 전염되는 듯했다.

지켜보고 있자면 마냥 무심할 수 없었다.

결국 루미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비록 뒤통수에 눈은 달리지 않았지만, 카라얀은 꼭꼭 숨어버린 루미나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 우울해졌다.

그런데 루미나의 손가락이 그의 등을 콕콕 건드렸다.

마치 문을 두드리듯.

“손만.”

루미나의 작고 하얀 손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카라얀은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올라가는 걸 느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만 잡게 해 드릴게요.”

빗소리에 금세 파묻힐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말투에서는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저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이불 속에 숨어 있을 루미나를 상상하니 심장이 쾅쾅 뛰다 못해 박살 날 것 같았다.

당장 루미나의 얼굴이 보고 싶어져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머릿속이 읽힌 것처럼 루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제 쪽을 보면 안 돼요.”

“……알겠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카라얀이 루미나의 손을 낚아챘다.

루미나는 제 손을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꽉 잡는 손길을 느꼈다.

“레기온은 집착이 강하지. 한번 제 사람이라고 각인하면 절대 놓아주지 않고.”

언젠가 루키우스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루미나가 알고 있는 집착 또한 그러했다. 제 목숨을 내줄지언정 결코 상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제 손을 꽉 옥죄는 압박감을 마냥 기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자꾸만 어머니가 하던 사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썼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음 한 톨 없는 남자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모두를 괴롭게 했던 그녀가.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루미나는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집착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크면 집착이 커도 괜찮을 걸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 집착마저 사랑이라 믿었는데.

지금 카라얀이 제게 느끼는 감정이 레기온으로서의 집착이라면.

그리고 자신 또한 레기온이니 집착하는 것뿐이라면 카라얀도 제게 금방 질리겠지?

‘어려워.’

루미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욕심 부리고 싶어. 하지만 이번만큼은 욕심 내면 안 돼.’

제비꽃 설탕절임을 먹었을 때.

입 안에 퍼지는 단내가 어색하고 불편했으나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가 선물해 줬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그러나 그 달콤함에 취해 먹다 보면 끝내 이가 썩어가겠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루미나는 그런 자신이 싫었다.

***

번잡한 기차역.

제도로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려 거리로 나갔다.

그중 제법 무거워 보이는 짐 가방을 든 노파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토록 사람이 많건만 다들 자기 갈 길이 바빠 노파를 외면했다.

머뭇거리던 노파는 근처에 있던 한 남성의 옷자락을 붙잡는 데 겨우 성공했다.

“미안하네만 내가 짐이 너무 무거워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네. 조금만 도와주게.”

옷자락이 붙잡힌 남자.

조제프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허름한 차림의 노파를 확인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언제 불쾌해했냐는 듯 단숨에 표정을 바꾸며 친절한 말투를 흉내 냈다.

“어디로 가는 길이십니까?”

“케텐필 거리로 가야 하는데 짐이 무거워서 삯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군. 바쁜 길이겠지만 조금만 도와주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네.”

제 몸 하나 간수하면 다행인 행색인데 은혜를 잊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코웃음을 친 조제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노파의 짐을 대신 들어준 조제프가 삯마차가 있는 곳까지 갔다.

“제도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군.”

“유행이 빠르게 바뀌는 편이죠.”

“손자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이 슬슬 결혼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걸음하게 됐는데. 이곳만큼이나 많이 자랐겠지.”

“네, 네. 그렇겠죠.”

건성으로 대꾸한 조제프가 삯마차 앞에 오자 마부한테 바로 짐을 넘기며 노파 대신 목적지를 말해 줬다.

“그러면 손자 같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서 들어가 보시죠. 목적지는 제가 말해 놨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혹시 이름을 알려줄 수 있는가?”

“괜찮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닌걸요.”

그저 알려주기 싫었을 뿐이다.

그러자 감동한 눈빛을 한 노파가 마차를 타고 멀어졌다.

“더럽군.”

언제 친절한 미소를 지었냐는 듯이 조제프가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손수건을 꺼냈다.

노파와 닿았던 손을 쓱쓱 닦고서는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버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딸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아빠! 또 착해 보이는 일 했지? 대체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거야! 그것도 병이야!”

“우리 오로라 공주님. 이 아빠가 많이 기다리게 해서 심술이 났구나.”

“아빠!”

조제프가 오로라를 달랬다.

하지만 오로라의 생각과 달리 조제프는 마냥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마부에게 목적지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잘못 도착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도 제도 외곽인 탓에 다시 삯마차를 잡기 힘들 거다.

‘내 시간을 빼앗았으니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도와주긴 했지만, 만약 제 옷자락을 붙잡지 않았다면 외면했을 거다.

한동안 딸의 교육을 위한다는 핑계로 휴양지에 내려갔던 조제프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빠! 연회 날에 입을 옷은 다 준비됐지?”

“그럼. 당연하지. 그날 아라벨 황녀님을 제외하면 우리 오로라가 가장 예쁠 거다.”

“흐음. 모든 남자들이 나한테 반하면 곤란한데.”

“그러게 말이다.”

조제프는 최근 고급 정보를 얻었다.

아라벨의 성년식 기념 연회.

그 연회는 오직 아라벨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다음 황제로 유력하게 지명되는, 아니, 그 외에 달리 멀쩡한 후보가 없으니 무조건 황제가 될 수밖에 없는 마르셀의 신붓감을 찾는다고 했다.

그 정보를 접하자마자 조제프는 환호했다.

“우리 공주님은 황태자비가 될 몸인데 괜한 놈들이 꼬이면 귀찮기만 하지.”

각자 다른 생각 속에서 아라벨의 성년식 기념 연회가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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