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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열리는 아라벨의 생일 파티는 또래 영애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하며 특별했다.
그러니 이번 연회는 지난 연회보다 더더욱 특별해야 했다.
다름 아닌 룬멜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며 아름다운 아라벨이 성인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누구보다 화려하게.
남들과는 다르게.
최고의 연회를 거행해야 했다.
까다로운 그녀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이번 성년식 기념 연회의 테마가 정해졌다.
바로 가면무도회.
단순히 얇은 가면 한 장으로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웃고 떠드는 연회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아라벨이니 마땅히 주인공다운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손님들에게는 특급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가면을 쓴 아라벨을 찾는 것.
그리하여 아라벨의 생일 전날부터 성대한 연회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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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
루미나는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나비를 닮은 화려한 가면이었다.
슬슬 황궁에 도착할 테니 가면을 써야 할 텐데 계속 손에서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불편하면 벗고 다녀.”
루미나를 지켜보고 있던 카라얀이 툭 한마디 했다.
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가면을 쓴다고 해서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볼까요?”
“멍청이들은 모르겠지.”
잔뜩 꾸며놔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아름다운 루미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카라얀이 말했다.
“하지만 나라면 널 알아봐.”
가면을 쓴다고 해도 루미나는 루미나였다.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음. 저는 못 알아볼 것 같은데.”
루미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카라얀이 살짝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그러자 루미나가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이라는 말을 듣고 카라얀이 진정했지만, 충격이 남아 있는 듯했다.
만약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시무룩해져 있을 것 같았다.
설핏 웃은 루미나는 조몰락거리고 있던 가면을 쓰며 말했다.
“카라얀 님. 만약 아라벨 황녀님 같은 사람을 보게 되면 꼭! 같이 도망치는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왜 아는 척하고 있겠어.”
자정이 되기 전까지 아라벨을 찾는 사람에게는 큰 상이 주어진다고 했다.
대체 그 큰 상이 무엇인지 몰라도 결코 그들에게 좋은 건 아닐 거다.
‘게다가 아버님이 연회에 불참하는 바람에 무슨 일이 터졌을 때 황녀님을 막아줄 사람도 없어.’
혹시나 해서 루미나가 신신당부하니 카라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아라벨이 루미나의 근처조차 다가가지 않았으면 했다.
자꾸만 루미나를 탐내는 듯한 아라벨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상대가 여성이라 해도 경계하게 됐다.
‘위험해.’
저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착한 감자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기 쉬웠다.
한시라도 경계를 늦출 틈이 없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카라얀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분홍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네? 뭐가요?”
“그런 게 있어.”
카라얀은 지금 자신의 속내를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다.
대신 가면을 쓰느라 헝클어진 루미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
경쾌한 곡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루미나는 곧바로 제게 쏠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작정하고 정체를 숨기려고 드는 게 아닌 이상 못 알아볼 리 없지.’
특히 루미나나 카라얀쯤 되는 제도의 유명 인사라면 더더욱.
소문으로만 듣던 하트가의 레기온과 그의 인간 아내에게 다들 관심이 많았다.
“하트 공자비로군요.”
“제 딸이 공자비와 건너건너 아는 사이라서 알아요. 듣기로는 공작님께서 저 아이를 참 총애한다고 하더라고요.”
“아. 저도 들었어요. 그림 관련으로…….”
이런 얘기도 나오고.
“결혼한 지 꽤 되지 않았던가요? 용케 살아있군요.”
“한집에 레기온이 하나도 아닌 둘이라니. 저는 그렇게 못 살아요.”
이런 얘기도 나왔다.
귀가 밝은 카라얀이 그들의 얘기를 들은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루미나가 생경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연회장.
깃털을 펼친 공작새처럼 잔뜩 꾸민 사람들 사이에 섞인 루미나는 저를 향한 온갖 추측에도 조금 들뜬 기분이 됐다.
‘웬만큼 화려한 곳을 가도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 오니까 색다른 느낌이네.’
문득 루미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들이 있었다.
연회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보는 남자들이었다.
‘뭐 하는 거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아라벨을 찾으라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라벨 황녀님도 참 레기온 중 레기온이라니까.’
속으로 그녀에 대한 소소한 험담을 하고 있는데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자.”
“네?”
“아니. 다들 춤을 추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잖아.”
카라얀이 변명처럼 뒷말을 중얼거렸다.
쑥스러움이 담긴 어조였다.
속으로는 루미나가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미나는 빙긋 웃었다.
“좋아요.”
그들은 댄스 플로어로 올라갔다.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허리에 두른 채 빠른 춤곡을 따라 움직였다.
루미나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솜씨를 보여줬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몸짓이었다.
반면 카라얀은 살짝 어설픈 춤 솜씨를 보여줬다.
박치나 몸치는 아니었으나 완벽한 루미나와 비교할 수 없었다.
“카라얀 님.”
“왜? 왜? 설마 내가 네 발등이라도 밟았어? 그럴 리가 없는데.”
본인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는지 이름이 불리자마자 지레 찔려했다.
“예법 시간에 땡땡이 쳤죠.”
루미나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눈썹을 두 번 빠르게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물었다.
“아냐. 제대로 들었어.”
“정말요?”
“어……, 니.”
‘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일부러 발음을 뭉갠 탓에 뜻이 모호해졌다.
“어차피 몸으로 때우는 건 다 비슷하니까 상관없잖아.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될 것도 없어.”
검술이나 춤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카라얀은 타고난 육체적 능력으로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춤이란 일방적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상대와 주고받는 것이었다.
카라얀의 엉성한 부분을 루미나가 잘 받아쳐 줬기 때문에 남들에겐 완벽한 한 쌍처럼 보였다.
“저라서 받아주는 거예요.”
“그러면 굳이 따로 춤 연습을 할 필요는 없겠네.”
“…….”
“평생 네가 받아줄 테니까.”
“네? 왜 그렇게 되는…….”
“너만이 날 받아줄 수 있다고 했잖아.”
순간 루미나가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처음으로 발이 꼬이고 말았다.
삐끗하는 루미나의 허리를 잡아챈 카라얀이 넘어질 뻔한 그녀를 높이 들었다.
허공에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루미나는 카라얀을 내려다보게 됐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체감상 애정이 선명히 새겨진 금빛 눈동자와 오랫동안 마주한 듯했다.
무사히 지면을 밟은 루미나는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때문에 주변이 조용하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곡이 끝난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힘이면 다 된다고.”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볼썽 사나운 꼴은 보이지 않았다는 걸.
“감사해요. 그러면 나중에 봬요.”
“어디 가는 거야?”
“그야 당연히 파트너를 바꾸려는 거죠.”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면서 파트너를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미나가 옆에 있던 남자 쪽으로 가려고 하자 카라얀이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다음 차례를 기대하고 있던 영식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가면 사이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기민하게 파악한 카라얀이 날카롭게 상대를 쳐다봤다.
뜨끔!
살의로 가득 찬 눈빛을 한 몸에 받은 영식이 뒷걸음질 쳤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한 곡만 추기로 했으니까 이만하면 됐어.”
루미나가 얼굴을 가려서 날파리가 꼬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휘익, 휘익-.
“카라얀 님, 뭐 하세요?”
“날파리가 더 있는 거 같아서.”
“날파리요?”
황궁에 왜 날파리 같은 게 있겠는가.
잔뜩 경계한 채 주변을 둘러보는 카라얀과 함께 루미나가 댄스 플로어에서 내려왔다.
‘이목이 너무 집중된 탓에 내려오는 거 맞긴 하지.’
원래는 없는 거창한 동작을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오늘 연회의 주인공처럼 보이게 됐다.
‘아라벨 황녀님이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지금은 아라벨이 숨어다니는 입장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루미나는 순순히 카라얀을 따랐다.
그때였다.
“루미나 님!”
“에블린, 레아.”
가면을 썼지만 단박에 그들을 알아본 루미나가 반겼다.
“결국 연회에 참석하셨네요. 그런데 루미나 님께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거든요.”
“할 얘기요?”
“레이디의 개인적인 연애 사업에 관한 얘기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을 꺼내긴 어려워요.”
“이미 기혼자인 루미나 님의 의견을 꼭 구하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 루미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 편하게 얘기해.”
……라고 말했지만, 루미나를 보낸 카라얀은 한없이 불편했다.
뚱하게 서 있자니 자꾸만 사람들이 다가와서 치근덕대는데 귀찮기만 했다.
‘무슨 얘기를 하길래 이렇게 길어지는 거야.’
그저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한참이 지났건만 루미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또 참던 카라얀이 결국 여성 휴게실로 갔다.
“루미나?”
하지만 루미나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