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17)화 (117/152)

***

루미나는 에블린과 레아를 따라서 휴게실로 향했다.

그런데 한참 동안 복도를 걸었다.

휴게실이면 연회장 근처에 위치해 있는 게 관례인데, 이상할 만큼 멀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에블린과 레아가 멈춰 섰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미나 님. 어서 들어가죠.”

레아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말했다. 하지만 루미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에블린과 레아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루미나가 말했다.

“솔직하게 고백해요. 무슨 용건이죠?”

치열한 생활 연기 인생.

에블린과 레아가 처음 제게 따라오라고 부탁했을 때.

루미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도 순순히 따라온 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순진한 영애들이 연기까지 하나 싶어서였다.

“네? 네?!”

“용건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도 봐라.

어설프기 짝이 없지 않은가.

루미나였다면 저런 식으로 어색하게 굴지 않았을 거다.

식은땀을 흘리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아서 제게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할 얘기가 있는 거죠?”

루미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뜨끔한 에블린과 레아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더니 억지로 루미나를 밀어 넣었다.

“이게 무슨……!”

“죄송해요. 저희도 부탁받은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정말 죄송해요!”

탁-.

그들의 사죄를 끝으로 문이 닫혔다.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간 루미나가 다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굳게 잠겨 있었다.

‘새로운 방법의 새싹 밟기인가?’

하지만 루미나는 더 이상 사교계에서 새싹이 아니었다.

더불어 에블린과 레아는 루미나를 싫어하지 않았고.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발코니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찌 방법이 없는 루미나가 발코니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남자?’

근사한 제복을 입은 남자가 루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굳어버린 루미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순간 잡은 손을 통해 익숙한 기운을 느낀 루미나의 눈이 커졌다.

“안녕?”

능청스러운 인사였다.

밋밋한 가면을 쓴 얼굴과 마주하자 루미나는 선명한 검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라벨 황녀님!”

눈앞에 있는 자는 남자가 아니었다.

남장을 한 아라벨이었지.

비록 익히 알고 있는 아라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루미나는 상대가 아라벨이라고 확신했다.

손을 잡는 순간 레기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억지로 낮춘 듯한 목소리를 곰곰이 곱씹어 보면 익숙했다.

‘마법을 쓴 건가?’

눈동자뿐만 아니라 머리 색깔까지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다란 머리칼을 대충 묶은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미소 지었다.

“찹쌀빵, 너. 나를 바로 알아보는구나.”

아차.

웬만한 눈썰미의 소유자라도 지금의 아라벨을 보며 그 아라벨 황녀임을 알아챌 수 없을 거다.

루미나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지 마.”

“……제국의 별인 황녀님을 뵙겠습니다.”

짜증 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아라벨의 까칠한 태도에 루미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앉아.”

아라벨이 발코니에 있는 티 테이블을 턱짓했다.

강압적이고 지독한 권력으로 인해 루미나는 아라벨과 마주 보고 앉게 됐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는 탓에 도저히 아라벨을 피할 수가 없었다.

“머리는 그렇다 치는데, 눈 색은 어떻게 바꾸신 건가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마음을 내려놓은 루미나가 아라벨을 꼼꼼히 뜯어보며 말했다.

“아버지 몰래 간단한 마법 물약을 주문했지. 자정이 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

“시시하고 따분한 인간들뿐이라니까? 어떻게 단 한 명도 나를 몰라보는 건지. 하품이 나올 정도야. 차라리 하찮은 네 그림이나 감상하는 게 생산적이겠어.”

머리와 눈 색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남장까지 했으니 찾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루미나 또한 얼핏 봤다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곳에 숨어 계시니까 모르죠.”

“숨어?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조금 전까지 연회장에 있었어. 복도도 마음껏 돌아다녔지. 너 말이야, 맹하게 생겨서 춤 잘 추더라?”

“……보셨군요.”

“오늘의 주인공이 너인 줄 알았어.”

뜨끔!

“하지만 당장 내 모습이 이러니 넘어가 줄게.”

루미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 하다못해 망할 첫째 오라비까지도 날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니까?”

“황녀님의 변장이 완벽했기 때문이죠.”

“넌 알아봤잖아.”

손을 잡는 순간 느껴졌으니까.

예전에 브랜든이 올리비아인 척했을 때 바로 알아봤던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 어물쩍 넘어갔다.

“어째서 저를 부르신 거예요?”

“심심해서.”

“……평범한 방식으로 부르면 되잖아요.”

“그러면 도망칠 거잖아. 그리고 잘못하다가 내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정식으로 부르겠어?”

제멋대로인 황녀님 때문에 애꿎은 에블린과 레아만 마음고생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나도…….’

무려 아라벨의 성년식 기념 연회였으니 그냥 넘어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납치당하듯 아라벨과 단둘이 있게 된 루미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제 앞에 놓인 찻물을 내려다봤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버지께서는 오늘부터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내 혼처까지 찾을 생각이라더군.”

당장 루미나의 심정이 어찌 됐든 전혀 개의치 않은 아라벨이 덤덤히 말했다.

그녀는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어둠이 내린 정원에는 조명등이 깔려 있었다.

때문에 발코니에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귀족 남성을 발견한 아라벨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저 이름 모를 영식은 아마 아라벨, 그녀를 찾고 있을 거다.

“오늘 나를 찾은 사람한테 주어지는 상이 뭔지 알아?”

“금괴인가요?”

“너, 보기보다 돈을 밝히는구나.”

“아닌데요.”

루미나가 정색했다.

피식 웃은 아라벨이 말했다.

“금괴보다 더 값진 것이지.”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인가요?”

“아니.”

이 하얀 찹쌀빵.

그냥도 아니고 엄청나게 돈을 밝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아라벨이 말했다.

“나와의 혼인이야.”

루미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황녀님을 찾는 사람들은 남성뿐이었지.’

영식들 사이에서 상과 관련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진 듯했다.

“내 남편이 되고 싶으면 이런 간단한 숨바꼭질 정도는 해내야지.”

아라벨의 말투에서 권태가 느껴졌다. 항상 오만하고, 뻔뻔하던 황녀님답지 않았다.

때문에 루미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황녀님께서는 카라얀 님과 혼인하길 원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런데 어째서 요즘에는 카라얀 님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

“결혼했잖아.”

“이혼시키면 되죠.”

아라벨이 루미나를 흘겨봤다.

제 남편이라는 자각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 이 작은 찹쌀빵은 못 하는 말이 없었다.

“나처럼 고귀한 자가 이혼남과 결혼하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렇다면 황녀님께서는 카라얀 님을 사랑한 게 아니었네요.”

아라벨이 제법 웃긴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코웃음 쳤다.

“사랑? 나는 레기온이야. 왜 그런 걸 해야 하지?”

“레기온이기 이전에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니까요.”

루미나는 아라벨이라면 결혼 상대도 이기적으로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남들처럼 재고, 따져가며 팔려가는 듯한 결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정말 얼굴만큼이나 순진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라벨이 살짝 고개를 든 채로 말했다.

“나는 황녀야. 남편조차 최고로 가져야지. 사랑 같은 같잖은 감정놀음은 고려 대상이 아니야.”

“그렇다면 카라얀 님께 구혼했던 이유도…….”

“그래. 그는 나와 같은 레기온이잖아. 그리고 하트 공작가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지.”

검게 빛나는 아라벨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정했다.

“때가 되면 결혼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나는 황제가 되지 못할 황녀니까 선택지는 많지 않을 테지.”

“…….”

“국내에 있는 귀족 중에서 대충 아무한테나 떠넘겨질 운명이라면 내 손으로 직접 최고를 선택할 생각이었어.”

아라벨이 주먹을 꽉 쥐었다.

“카라얀. 아니, 레기온인 하트 공자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어. 네가 빼앗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하지만 남의 손에 들어간 물건은 가치 없었다.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고만고만한 것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아 보여 가지려고 했는데 남의 손때가 묻다니.

최악이었다.

그래서 이제 남아 있는 것들에 시선을 줬더니 여전히 고만고만해서 똑같이 느껴졌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들뿐이라면 바뀐 내 모습이라도 알아봤으면 했는데…….’

반전은 없었다.

혈육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 어떤 남자가 알아보겠는가?

‘물론 앞에 있는 이 작은 찹쌀빵은 달랐지만.’

아라벨은 단번에 자신을 알아본 루미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이상했다.

별 볼 일 없는 맹한 얼굴이라 쉽게 갖고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코 호락호락하게 꺾이지 않았다.

지금도 봐라.

제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손에 망가지지 않은 채로 있어 줘서 기뻤다.

‘잠깐, 기뻐?’

스스로 생각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아라벨이 잔뜩 당황하던 때였다.

“그건 종마나 마찬가지잖아요.”

“뭐? 너!”

황녀한테 종마라니.

더없이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아라벨이 한마디 하려던 순간.

루미나가 티 없이 맑은 눈빛으로 아라벨과 마주한 채 말했다.

“왜 사랑 없는 결혼을 자처하세요. 황녀님처럼 멋지신 분이.”

“……내가 멋져?”

“네!”

루미나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흐흥, 내가 좀 멋지긴 하지.”

종마에 비유하는 건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이 대단하다는 의미니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가면 아래에 숨겨진 아라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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