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날 뻔했다.’
루미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너무 가감 없이 표현했다는 걸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평소 루미나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충동적으로 내뱉는 성향이 아니라는 걸 고려하면 답지 않은 일이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황녀님한테 동질감이라도 느낀 건가.’
비록 처지는 다르지만, 결혼이 선택이 아니라는 점은 비슷했다.
마치 저렴한 가격에 팔리는 듯한 원치 않은 결혼이 루미나의 마음을 건드렸다.
진심을 잔뜩 내뱉고 난 후에 아차 싶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네 눈에는 내가 최고인 거지?”
“당연하죠!”
“세상에 나만큼 멋진 사람이 없긴 하지.”
“그렇죠!”
……비록 계속되는 아라벨의 자기애에 동조해 줘야 했지만.
울기 직전의 아기한테 필사적으로 딸랑이를 흔드는 격이었다.
“그런데 루미나. 그 옷이나 가면은 대체 뭐니.”
디자이너들이 밤낮을 꼬박 지새워가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맞춤 드레스였다.
안목이 뛰어난 루미나마저 만족시켰는데 아라벨의 눈에는 영 아닌지 시비를 걸었다.
“기껏 가면무도회에 왔는데 멀리서 봐도 너인 걸 바로 알아보겠어!”
가면무도회라고 하나 꼭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라벨은 불만인 듯했다.
“이리 와!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이 많으니까. 내가 특별히 네게 선물해 주도록 하지.”
“황녀님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옷을 새로 갈아입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카라얀 님과 맞춰 입은 옷인걸요.”
“둘이 한 쌍으로 맞춘 거 알아. 그러니까 더더욱 바꿔 입어야지.”
부부인 걸 티 내고 말이야.
카라얀 그 녀석은 멍청하고 재수 없는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서 다행이지. 그 성격으로 너와 결혼까지 한 게 복이라는 걸 알아야 해.
아라벨이 꿍얼거리며 방과 이어진 드레스 룸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루미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마네킹이 돼야 했다.
“황녀님.”
“왜? 조금만 기다려봐. 이 드레스, 너한테 제법 어울릴 것 같으니까.”
“오늘 제가 황녀님을 축하해드리러 왔으니 카라얀 님께서 억지로 마물을 잡으러 갈 일은 없는 거죠?”
분주히 움직이던 아라벨의 손이 뚝 멈췄다.
“자정까지는 남아 있도록 해. 내일이 진짜 내 생일이니까.”
“네에에-.”
아라벨이 루미나를 힐끔 흘겨보고서는 말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그 협박 때문인 거야?”
“그럴 리가요! 당연히 황녀님을 축하하기 위해 왔죠.”
헤헤.
밉지 않게 배시시 웃는 루미나에게 나쁜 말을 할 수 없었다.
피식 웃은 아라벨은 드레스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가 옷시중을 들다니. 넌 오늘을 기념일로 삼도록 해.”
거적이나 입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게 입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라벨의 취향대로 꾸며진 기분이었다.
노출이 있는 드레스는 특히나 등이 깊게 파여 있었다.
평소라면 루미나가 입지 않을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가발까지 써서 누구도 루미나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할 듯했다.
루미나 본인조차 거울 속 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니 말 다 했다.
“흠. 생각해 보니까 좋네. 내 생일 전날이 네 기념일이라. 같이 축하할 수 있겠어.”
대체 뭘 축하하는데요…….
차마 그 말은 묻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가면을 찾아볼까.”
“가면도 바꿔요?”
“그럼 당연하지.”
루미나의 맨 얼굴을 쓱 훑어본 아라벨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널 닮은, 하얗고 말랑한 가면만 고르게 되니까 먼저 발코니에 가 있어.”
“네에에-.”
“아, 그래. 엘리엇 오라버니가 간식을 챙겨줬는데. 이름이 뭐더라? 양갱이라고 한다지?”
“양갱이요?”
“그래. 팥 차와 함께 들여왔다면서 너와 나눠 먹으라고 했어. 거기 있는 거 전부 먹도록 해.”
“황자님께서 저를 콕 집었다고요?”
왜요?
루미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아라벨이 쑥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와 내가 친해 보인다고 하더라고. 흥, 누가 누구랑 친하다는 건지.”
‘예전에 황녀님의 친구가 되라고 등을 떠밀더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까.’
발코니로 나간 루미나는 티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바로 앞에 놓인 간식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껄끄러워.’
이상한 일이었다.
아라벨보다 엘리엇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황자님은 레기온도 아닌데. 그냥 황족이라서 그런가.’
결국 차뿐만 아니라 디저트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꼼실꼼실 구두를 벗으며 난간 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이거 써. 평소 너라면 절대 쓰지 않을 디자인으로 골랐지.”
곧이어 다가온 아라벨이 귀부인 같아 보이는 화려한 가면을 건넸다.
루미나가 순순히 쓰고 있자니 아라벨이 말했다.
“왜 안 먹었어?”
“그게…….”
말끝을 흐리던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저기 황제 폐하께서!”
“흥. 내가 속을 줄 알아?”
“앗! 엘리엇 황자님과 함께!”
“재미있는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속을 거라고 생각하면 제법 앙큼한 착각이야.”
“…….”
“물론 작은 오라버니께서 연회에 참석한다고 했지만, 자정에만 잠깐 보고 간다고 했어.”
그 순간 루미나의 동공이 커졌다.
“아, 아버님?! 여기예요, 여기!”
“뭐?!”
아라벨이 홱 옆을 돌아봤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없었다.
주변을 샅샅이 둘러본 아라벨은 루키우스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루미나가 있던 자리에 선물로 준 구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쩐지 고분고분하게 군다 싶더니 끝내 도망친 것이다.
“이 하얀 찹쌀빵이……!”
분노한 아라벨의 외침만이 발코니를 쩌렁쩌렁 울렸다.
***
“아버님! 여기예요, 여기!”
“뭐?!”
아라벨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 루미나는 곧장 아래층 발코니로 뛰어내렸다.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덕분에 아라벨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윽.”
발을 살짝 삐끗한 것 같았다.
높이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루미나는 아라벨이 가면을 고르는 동안 확보해둔 도주 루트로 향했다.
“이 하얀 찹쌀빵이……!”
발목이 아팠지만 일단 달렸다.
아라벨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헉, 헉-.
‘다음 날이 될 때까지도 황녀님이 나를 옆구리에 끼고 다닐 것 같아서 일단 도망치긴 했는데.’
카라얀을 만나기 위해 바로 연회장으로 가면 아라벨에게 다시 잡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 번은 따돌려야 해. 자정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한 번만 따돌리면 나를 포기하겠지.’
아라벨은 자정이 되면 연회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하니까.
그것만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루미나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맨발로 정원 쪽으로 갔다.
조명등조차 밝혀지지 않는 외진 방향이었다.
어둠 속에 녹아든 루미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 있으면 나를 찾지 못하겠지. 조금만 쉬다가 돌아가는 거야.’
루미나가 자정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던 때였다.
“헤어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미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한마디만 엿들었을 뿐인데, 가까운 곳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짐작됐다.
‘남의 연애사가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듣고 싶진 않았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자니 남녀의 대화가 선명히 들렸다.
“빅토리아. 어째서 내게 이별을 고하는 거야?”
“설마 저를 붙잡는 건가요?”
“갑작스러워서 말이야.”
“혼처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차후 황후가 될 여인이 앉을 자리인데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겠죠.”
여인이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저는 이만 뒤에서 황자님을 응원할게요.”
“앞으로 로웨인 부인이라고 불러야겠군.”
“어머. 정 없어라.”
연인이 이별하는 상황치고는 지나치게 정답고, 담백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으니.
‘자, 잠시만.’
빅토리아 로웨인이면 유부녀잖아!
잔뜩 당황한 루미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
루미나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카라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디 갔지?’
분명 휴게실로 간다고 했다.
휴게실이라는 휴게실은 전용 성별과 관계없이 이 잡듯 뒤졌지만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루미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익숙한 밀빛 머리칼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흑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루미나의 성격상, 말없이 사라질 리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 사라진 게 아니라면.
어머니처럼 누군가 납치한 거라면.
카라얀은 어금니가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깨물었다.
그의 발은 루미나에게로 가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해 점점 심장이 검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만약 누구도 카라얀 님을 도와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
“카라얀 님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처럼 저도 찾아갈게요.”
문득 언젠가 루미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라얀의 손이 자연스레 피어싱으로 향했다.
‘만약 이곳에서 내가 폭주한다면.’
루미나가 자신에게로 와 줄까?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어진 그는 자신이 했던 것이 일반적인 결혼식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루미나가 노란 우비를 입고 폭주 직전인 자신에게로 온 그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도.
모든 인과관계는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귀에 꽂힌 피어싱들은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최근에 몸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하나 이것의 도움이 없다면 폭주까지는 어렵지 않을 터.
하지만 현재 카라얀이 있는 곳은 황궁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폭주하면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고 말 거다.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건만.
루미나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당장 그녀가 보고 싶어 이성이 점점 마비됐다.
벌레가 신경줄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카라얀이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선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쓸데없이 덩치만 큰 하트 공자 아니야.”
남성용 제복을 입은 인영이 카라얀에게 다가왔다.
저보다 작다는 것만 인식한 카라얀은 껄렁껄렁한 태도로 시비를 거는 상대를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만약 그가 루미나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계속 무시했을 거다.
“다람쥐같이 쪼르르 도망치기를 잘하는 아내를 찾나 보지?”
“뭐야?”
흑발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카라얀이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