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사내와 카라얀의 시선이 부딪쳤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살기였다.
그런데 상대는 움찔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뭐 하는 자식이지?’
카라얀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은 머리의 남자.
아니, 아라벨은 카라얀마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이 상황 자체가 제법 웃기다고 생각됐다.
광대놀음 같다고 해야 하나.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봤던 루미나가 특이했던 거다.
“넌 결혼 잘한 줄 알아.”
“뭐?”
이 재수 없는 말투는 둘째 치고, 대체 뭐 하는 자식이길래 아는 척이지?
무엇보다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칼이라는 점이 카라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어릴 때도 동년배보다 덩치가 크더니. 어른이 되니 귀엽지 않게 근육만 늘어서 얼굴 보는 재미도 없잖아.”
아라벨은 자신을 못 알아본 탓에 적대와 혼란이 가득한 눈빛을 한 카라얀이 웃겼다.
때문에 조소를 삼키며 그를 가차 없이 폄하했다.
“그런데 그 다람쥐 같은 애가 결혼까지 해 줬으니 평생 모시고 살아.”
아라벨이 가면을 벗었다.
그제야 상대가 아라벨이라는 걸 깨달은 카라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루미나를 데려갔구나.”
아라벨이 무어라 대답하려 했다.
그 전에 카라얀이 따지듯이 아라벨을 다그쳤다.
“루미나는 어디 있지?”
“못생긴 남자한테는 얘기해 주지 않을 거야.”
흥.
루미나가 제게서 도망쳤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제 말을 막는 듯한 카라얀의 태도가 아니꼬왔던 아라벨이 심술을 부렸다.
“루미나는 내 얼굴이 좋다고 했어!”
“……뭐?”
아라벨이 자꾸 외모로 놀리자 카라얀이 참다못해 발작하듯 외쳤다.
그의 성격이 더러운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어서 외모로 놀렸던 건데.
카라얀에게는 민감한 문제였다.
잠깐 당황하던 아라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웃기지도 않았다.
아라벨은 어릴 적부터 카라얀을 알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저런 유치한 말을 하다니.
“내가 너 같은 남자랑 결혼하려고 했다니. 진짜 격 떨어졌던 건 너였구나.”
“뭐?”
“으음.”
정말로 듣지 못해서 되묻는 게 아닌 줄 알면서 아라벨이 딴말을 했다.
“루미나가 나한테는 멋지다고 했다고.”
“언제?”
“방금.”
“마음에도 없는 소리겠지.”
“아니, 완전 진심이었어. 거짓 한 점 없었지. 딱 보면 알아.”
“네 착각이야.”
아라벨과 만담 같은 대화를 떠들면서 카라얀은 마음 한편으로 조금 안심이 됐다.
적어도 아라벨이 루미나의 목숨을 위협할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면한 거다.
“그래서 루미나는 어디에 있는데? 설마 걔를 홀로 둔 거야?”
“알려줘도 못 찾을 거야.”
못 찾았으면 좋겠다는, 심술이 섞인 바람을 가득 담은 채로 아라벨이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사뭇 진지했다.
“아니. 나는 찾아.”
“나도 못 알아본 네가?”
“너는 내게 무엇도 아니니까. 하지만 루미나는 아니야.”
진중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한 아라벨은 다시 가면을 썼다.
그리고 카라얀에게서 등을 돌렸다.
“따라와.”
***
한편, 루미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불륜 현장을 목격 중이었다.
‘아니. 방금 원만한 이별을 했으니까 이제 과거형으로 불륜했던 연인이라고 해야 하나.’
뭐가 됐든 이상했다.
루미나는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전하께서도 아라벨 황녀님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시나요?”
“전혀. 오랜만에 친절한 오라비 흉내를 내보려고 했는데 머리칼 한 올 보이지 않더군.”
마르셀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아라벨한테 관심 있나?”
“누가 황녀님의 옆자리를 차지할지 궁금한 건 당연하죠. 전하께서도 모르신다면 꼭꼭 숨으셨나 보네요.”
“…….”
“그러면 저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그래. 같이 나가면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나는 나중에 가도록 하지.”
로웨인 부인이 떠났다.
이대로 마르셀 황자가 떠나면 루미나 또한 살금살금 연회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부스럭-.
루미나가 낸 것이 아니었다.
‘새 같은 짐승이 돌아다니는 건가?’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난 터라 루미나가 잔뜩 긴장한 채 있었다.
기민하게 기척을 느끼고 있자니 마르셀이 소리가 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루미나가 이 틈을 타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봉변이 있었으니.
“흐읍.”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서 삐끗한 발목이 문제였다.
살금살금 걸어가려고 했는데 기척을 내고 말았다.
홱-.
동시에 몸을 돌린 마르셀이 단숨에 루미나를 찾아내 그녀를 붙잡았다.
“일부러 저쪽으로 유인하려고 기척을 냈나 보군.”
루미나는 억울해졌다.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죽이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잡히다니.
“어디까지 들었지?”
“네? 무슨 대화를 나누셨나요?”
깜빡깜빡.
루미나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능청을 떨었다.
“방금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있었네요.”
한때 루키우스를 속이려고 했던 만큼 루미나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아주 일품이었다.
하지만 마르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듣지 않았다 해도 의심될 수밖에 없지. 이름이 뭐지?”
루미나가 머뭇거렸다.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마르셀은 루미나의 가면을 억지로 벗겼다.
반항할 새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
루미나의 맨 얼굴을 본 마르셀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흰 눈처럼 잡티 하나 없이 하얀 얼굴.
촉촉한 분홍빛 눈망울.
세상의 악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제 동생인 아라벨처럼 한 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히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미인이었다.
루미나를 처음 봤을 때.
마르셀은 입고 있는 복장 탓에 고혹적인 미녀거나 추녀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가면을 벗기자 전혀 다른 외모가 튀어나왔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가…….’
두근두근-.
‘기혼 여성이 아닌 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마르셀은 지금껏 자신의 취향이 기혼의 여성이라 굳게 믿고 살았다.
기혼 여성이라면 생김새와 상관없이 좋아했고, 실제로 그들과의 연애를 즐겼다.
그런데 딱 봐도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듯한 외모의 상대는 웬만큼 빨리 결혼하지 않은 이상 기혼자일 리 없었다.
‘약혼자는 있을 수 있겠지만.’
약혼은 약혼일 뿐.
결혼하지만 않았다면 남들이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르셀에게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사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미나는 넋이 나가 있는 마르셀을 밀쳐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진짜예요!”
마지막까지 절실하게 외친 루미나가 쪼르르 도망쳤다.
몰래 도망치기는 글렀으니 그냥 도망치는 거다.
‘지금쯤 카라얀 님이 걱정하고 있겠지.’
곧 자정이 될 터.
루미나는 서둘러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라벨.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라벨은 카라얀을 루미나에게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또 한바탕 남으로 인형놀이를 하는 데 심취했다.
카라얀은 루미나처럼 가면뿐만 아니라 복장까지 아라벨의 입맛대로 갈아입게 됐다.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가발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 남자는 인기 없어. 그러니까 보채지 좀 마.”
“지금 내 꼴을 보고도?”
현재 카라얀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날 따라주면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만약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 애의 신변은…….”
“알았어. 알겠다고.”
그 잘난 카라얀이 ‘루미나’만 언급하면 약한 모습을 보이니 아라벨은 퍽 즐거웠다.
그리고 제 눈에 들 때까지 카라얀을 변장시킨 후에야 말했다.
“그 애를 마지막으로 봤던 건 이 발코니였지. 도망쳤으면 아마 저쪽 정원으로 갔을 거야.”
아라벨은 정확히 루미나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근히 머리가 잘 굴러가니 잠깐 나를 따돌릴 생각으로 몸을 숨겼겠지.”
아라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달리려고 했던 카라얀이 멈칫했다.
“왜 따라가지 않았어?”
루미나가 어디로 갔을지 그토록 잘 아는 아라벨이 어째서 루미나를 쫓지 않고, 제게 시비를 걸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근 아라벨의 행보를 보면 저보다 루미나에게 더 관심을 갖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까 널 골리는 게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
아라벨은 속마음과 사뭇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실제 그녀는 루미나를 제 손아귀에서 너무 쥐고 만지작거렸다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쫓아갈 수 있으면서도 굳이 뒤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카라얀한테 시비를 걸었지.
“실제로도 더 재미있었고.”
카라얀이 차게 식은 눈빛으로 아라벨을 짧게 쳐다보다가 더는 지체하지 않고 달렸다.
확실히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앞만 보고 직진하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와 부딪쳤다.
“히익!”
거의 정통으로 몸을 부딪친 격이라 얼결에 잡아줬다가 바로 놓았다.
‘이건 뭐야. 귀찮게.’
패대기치듯이 상대를 대충 버린 카라얀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루미나를 찾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카라얀이 사라지고.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는 몽롱한 눈빛으로 카라얀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방금 저분께서 날 잡아줬지.”
그녀의 이름은 오로라 멜칸.
조제프 멜칸의 외동딸이었다.